“평은 앞 숨과 뒤 숨이 달라지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숨이 고르면 평한 것이다. 천리를 달리면서도 숨이 고르면 평온한 것이다. 숨을 평온하게 쉬면 절로 마음과 몸도 평온해지는 것이다. 몸의 평온은 체력이 필요하고, 마음의 평온은 정력이 필요하다.” 금문에서 출현한 평平자는 일찌감치 여러 뜻으로 두루 쓰였다.한자의 고문에서 쓰임을 정리한 '고대한어사전'(상무인서관 1998)에 따르면 평 자는 무려 10가지의 뜻의 쓰임이 나타난다.우선 가장 초보적인 땅이 평평하다는 뜻이다.맹자에 "然后人得平土而居之"(그 뒷사람이 평지를 찾아 거주하기 시작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형용 용법 이외 동사로 쓰이기도 했는데, '~을 평평하게 하다'라는 타동사와 '마음의 안정을 찾다'라는 자동사 둘 모두의 쓰였다. 타동사는 실제 땅 등을 고르게 한다는 뜻에서 반란을 진압하다, 안정되게 하다는 뜻으로 발전해 쓰인다.공평하다는 뜻도 이미 춘추 전국시대의 문서에서 보인다. 진나라 변법을 주도했던 상앙의 사상을 집대성한 상군서商君书에는 "法平则吏无奸"(법이 공평해야 관리가 사악해지지 않는다.)이라는 말이 나온다. 동양의 법철학을 집대성한 말이다.이 말은 이어 법가에
“무엇이 평온平穩인가? 어떻게 해야 우리는 마음이 평온한 지 아는가? 무엇이 어떤지 알아야 얻을 것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게 평온의 삶이다. 그런데 정작 평온이 무엇인지 아는 이는 드물다. 무엇을, 어떤 상태를 우리는 평온이라 하는가? 최소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얻을 것이 아닌가?물론 우리는 평온이 무엇인지 막연히는 안다. 이게 말로 설명하기 힘들 뿐이다. 그냥 가만히 누워 있으면 평온하다. 저녁 번잡한 일자리를 떠나 가족과 함께 있는 순간 평온하다. 아, 아주 가끔은 그때부터 평온이 깨지는 가족이 있을 수 있다. 카페에 한가로이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부릴 때 우리는 평온하다.'평온'이라는 감정은 공감, 전파 능력이 강하다. 내가 평온하면, 주변 사람도 평온해지고, 평온한 사람을 보면 나 역시 평온해진다.그런데 이렇게 말고, 정말 평온이란 무엇인지,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는가?역시 정확히 부를 수 있어야 얻기도 쉬울 것 아닌가?아니면 평온이라는 게 본래 그리 어려운가? 그리 어려워 얻기가 힘든 것인가?언제나 이야기지만 이 순간 도움이 되는 게 한자다.한자를 만든 선인들의 지혜가 큰 도움이 된다.가장 글자의 원형에 가까운 갑골문자에서 평(平
“만족滿足은 발로하는 것이다. 욕망을 그치도록 하는 것이다. 실천하는 것이다.” '만족하는 삶'은 예부터 인간의 최대 고민거리 중 하나다.살아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욕망이고 삶이 바로 그 욕망을 채워가는 과정이 아니던가.무엇을 어떻게 욕망하느냐는 문제나,어떻게만족하느냐는 문제의 답을 찾는 과정이 바로 삶이다.사실 욕망이 있고서야 만족이 있으니, 둘은 분명 동전의 양면이다.하지만 다르기 때문에 동전의 앞뒤가 되듯 욕망과 만족, 둘 사이 차이도 분명히 있다.만족의 가장 쉬운 방법은 욕망을 조절하는 것이다.욕망의 총량을 줄이는 것이다.자학(?) 형방법이다. 성인聖人들이 취한가장 확실한 방법은 면벽이다.보지 않고 듣지 않는 것이다.보지도 않은 샤넬 백을 사고 싶은 여자는 없다.말은 제일 쉬운 데 실천하기에 가장 어렵다. 그래서 역대'성인'이 그리 적지 않나 싶다.한자의 세계 사고방식은 다른다. 한자는 인간적이다. 한자는 "사는 것은 욕망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만족은 발로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만족을 발로 한다니? 좀 표현이 이상하다. 그러나 배고프면 참고 굶는 것이 아니라 먹어 배를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면 쉽다.그럼 욕망 층위의 변화는 어떤가?맛에 대
“침 튀며 사는 게 열심히 사는 거다. 욕망에 충실한 거다. 그럼 언제 좀 쉬어야 할까? 바로 만족할 때다. 그럼 언제 어느 순간 만족할 수 있을까?” 참 어려운 이야기다. 모든 욕망이 문제가 되는 순간이 필요한 것을 넘어서는 순간이다. 만족을 하지 못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아예 욕망을 억누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만족할 순간을 알면 인생사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된다.참 말이 쉽지 결코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랬으면 진작에 세상이 천국이 됐다.순수했던 선인들, 한자를 만든 선인들의 생각은 이때 항상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족은 한자로 '滿足'다. 발이 가득한 게 만족이라는 의미다. 물론 여기서 족은 명사로 발을 뜻하지만, 형용사로 충만하다, 채우다는 뜻이다.언제 발족은 이렇게 명사와 형용사의 뜻이 달랐을까?고대 발 족 자가 의미하던 것을 알면 의문이 풀린다.다음은 갑골문자의 발 족과 그 후의 변화다. 어린아이 그림 같은 글자를 보면 절로 웃음이 난다.아이에게 로봇이 앉아 있다고 설명을 해주면 금방 알아듣는다.그렇게 쉽다. 그런데 혹 기억하는 이가 있다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정면의 정, 바를 정 자와 갑골문의 형태가 같기 때문
“침 튀며 살 활(活) 자는 언제부터 쓰였을까? 비교적 오래된 사례가 노자의 도덕경이다. 노자는 죽일 살(殺)의 반대의 뜻으로 살 활 자를 쓰고 있다. 감히 하지 않는 데 용기를 내는 이가 살 것이라고 했다.” “勇于敢則殺, 勇于不敢則活 yǒng yú gǎn zé shā , yǒng yú bú gǎn zé huó” '감히 하는 것' 보다 용감하면 죽을 것이고, '감히 아무 것도 못하는 것'보다 용감하면 살 것이다. 노자 도덕경 73장에 나오는 말이다. 于는 ~ 하는 데 있어서 또는 ~하는 것 보다 등의 뜻이다. 쉽게 말해 '용감'하면 죽기 쉽상이고, '용무감'하면 산다는 의미다. 용감과 부용감이 아니라 용감과 용부감이라는 데 주의할 필요가 있다. 먼저 용감을 보자 용감은 흔히 쓰듯 겁 없이 나선다는 뜻이다. 그럼 용부감이란 무엇일까? 부용감은 용감하지 않다는 의미다. 겁쟁이라는 말이다. 용부감은 이와 다르다. 부감하는 용기가 있다는 뜻이다. 겁쟁이라는 의미와 달리 감히 하지 않는 용기를 낸다는 의미다. 참 묘한 말이다. 절로 무릎을 치게 한다. 본래 감히 하는 것보다 감히 하지 않는 게 더 어려운 법이기 때문이다. 살면서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 모험을 해야 하
“침 튀며 살아라, 삶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 욕망 없는 삶이란 없다. 욕망하지 않는 것은 죽음뿐이다. 심지어 욕망하지 않는 삶조차 욕망해야 얻을 수 있다.” 본래 혀 설舌자도 생물에 물기에 묻은 모양이다. 여기에 다시 삼 수 변을 붙인 글자가 바로 활기찰 활活 자다. 침이 튀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 강조했던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입에 침이 도는 것이다. 맛있는 것을 보면 입에 침이 돌아야 건강한 것이다. 침이 안 돌면 입맛을 잃은 것이고, 몸 어딘가 불편하다는 징조다.실제한방에서 침은 건강의 이상을 알리는 주요한 신호다. 중국 저우춘차이(周春材)가 지은 한의방약에 따르면 "혀 설(舌)은 집(舍)"이라며 "심장의 싹이며 심장의 기운이 머무는 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역시 혀 설의 갑골문에 대한 설명과 일치한다. 혀 설은 식물의 싹이 자라며 물기를 머물고 있는 모습이다.심장의 기운이 모은 곳이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이 있다. 침이 많이 고인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 한방에서 침이 많이 고이면 위에 열이 있다는 의미이고 식욕이 과해지고 방귀 냄새도 독해진다고 한다.반대로 침이 마르는 지나친 갈증
“세상의 모든 수양이 욕망에 맞서 억제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한자만 다르다. 욕망에 진정으로 충실하라고 가르친다. 욕망에 충실해야 인간이고, 욕망에 충실해야 그 욕망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물에 들어가지 않고 수영을 배울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욕망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욕망이라는 게 무엇일까? 이 질문은 삶이란 무엇일까?에 가장 닿아 있는 것이다. “삶이란 정말 무엇인가” 이처럼 오래됐지만 항상 새로운 화두도 없다.“어떻게,무엇을 위해 살아가야하는가?"라는것은 종교,철학의 가장 근본적 고민이었다.동양의 공자,맹자 등은 물론이고 서양의 플라톤,소크라테스 이래 종교,철학자들 고민의 중심에는'삶이란 무엇이냐'의 문제가 존재했다.역사에 이름을 남긴 많은 사람들이 각자 특색 있는 답을 남겼다.일부의 답은 두고두고 후인들의 존경을 받기도 했다.그러나 그 수많은 고민과 답들의 공통점은 인간적 욕망에 대한 극적인 제약이다. 대부분 종교가 성직자들에게 인간적 생을 포기하도록 하듯 말이다. 그러나 한자에서 삶에 대한 해답은 그 출발은 역시 욕망이지만 방향은 완전히 상반된다. 다른 모든 한자가 그렇듯 참 단순 명쾌하고 인간적이다
“蘭香細而幽(lán xiāng xì ér yōu), 난향이 은은히 깊다. 송 시인 서기(徐璣)의 말이다. 사람의 향은 난향과 같다. 깊고 은은하다.” 수양한 사람의 향을 흔히 난향에 비유한다. 그 특성이 같기 때문이다.코를 자극하지 않지만 은은히 오래간다. 위인과 주인의 노력으로 크게 쓰인 사람의 향이다. 초두 변에 사람 인자를 쓴 한자를 상상해 본다. 꽃다울 방(芳) 자의 변형인 셈이다.향기 나는 사람 인이다. 욕망에 지지 않고 열심히 산 사람이다. 블루, 레드, 화이트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었다. 1993년 이후 폴란드 출신의 감독 키에슬로프스키가 내놓은 영화다. 프랑스 국기가 상징하는 색으로자유, 평등, 박애를 주제로 했다. 개인적으로 인간들이 관계를 세 가지 색으로 강조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근 20년이 넘었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장면이 있다. 세 영화 모두에 길거리 쓰레기통에 병을 버리는 노인네의 모습이 등장한다. 할머니였다 싶다. 길을 가던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쓰레기통에 애써 병을 버린다. 손이 닿지 않아 겨우 애써 병을 버린다. 그냥 길에 두고 갈 법도 한 데 꼭 쓰레기통에 넣는다. 너무 애쓰는 모습에 보는 이의 안타까
“살아 있다는 건 신진대사를 한다는 것이다. 신진대사 쉽게 먹고 싼다는 의미다. 배 속에 항상 똥이 들어 있다는 말이다.” 사람은 배 속에 누구나 똥을 담고 산다. 더럽지 않으면 산 사람이 아닌 것이다.겉은 씻으면 되지만 배 속의 똥은, 마음의 똥은 씻는다고 깨끗해지지 않는다. 음식으로 배 속을 깨끗이 하는 법을 배워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스스로 욕망을 제어하려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수양으로 닦아 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허나 그래도 산 사람이 어찌 배 속에 똥을 담지 않고 살 수 있으랴?본래 음식과 똥은 내가 있어 구분이 되는 것이다. 내가 먹기 전의 것을 음식이라고 하고, 먹고 난 뒤의 것을 똥이라고 하는 것이다.음식과 쓰레기의 구분도 마찬가지다. 내가 먹을 것이 음식이고, 먹지 않고 버린 것이 쓰레기인 것이다.버려야 할 것을 억지로 먹는 것이 욕심이요, 욕망이다. 맛있는 것을 보고 먹을 만큼 먹으면 음식을 먹은 것이고, 버려야 할 것을 먹으면 쓰레기를 먹은 것이다. 욕망은 사람으로 하여금 쓰레기를 먹도록 하는 것인 셈이다.쓰레기를 먹으면 똥이 달라진다. 냄새도 심해지고,색도 나쁘다. 실제 건강의 적신호이기도 하다.사람이 쓰레기를
“사람 인人은 두 획이 하나로 합쳐진 모양이라고 하지만 한 획이 둘로 나누어진 모양이기도 한다. 사람이 바로 그렇다. 항상 하나가 둘로 갈라지는 선택을 해야 한다. 항상 갈림길에 서는 게 인생이다.” 흔히 사람 인(人) 자를 둘이 힘으로 모으는 모양이라 설명한다. 사람 혼자 살지 못해 둘이 서로 힘을 합쳐 살아야 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지만 이는 사람 인의 한 면만 본 것이다.다른 면으로 생각하면 사람 인은 하나가 항상 둘로 갈라지는 모양이다. 매번 갈림길에 서서 갈등하는 인간을 그렸다. 사람의 생은 수많은 갈림길의 선택을 통해 이뤄진다.갈림길이 없다면 인생의 곡절이 있을 수 있을까?매번 갈림길에서 헤어졌던 이들에 대한 추억이 있을 수 있을까?바로 그래서 한 인생에는 수많은 아쉬움과 후회와 희망이 공존하는 것이다.사람을 인간(人間)이라고 한다. 사람 인 자에 다시 사이 간(間)를 넣었다. 오죽했으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것을 인간이라 했을까? 한 사람의 인생이 갈림길이라는 의미를 절실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결국 갈림길과 갈림길 사이에 서 있는 게 바로 우리 인간이다. 후회와 곡절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돌이킬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