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국가는 짧다. 1절이 전부다. 내용도 명료하다. 起来! 不愿做奴隶的人们! 把我们的血肉,筑成我们新的长城! 中华民族到了最危险的时候, 每个人被迫着发出最后的吼声。 起来! 起来! 起来! 我们万众一心,冒着敌人的炮火前进! 冒着敌人的炮火前进! 前进! 前进! 前进!进! 일어나라 ! (깨어나라!) 노예가 되고 싶지 않은 이들이여 ! 우리의 피와 살로 새로운 만리장성을 만들자 ! 중화민족이 가장 위태로운 이 때에 억압받는 모든 이들의 최후의 함성이 터져나오리!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적의 포화에 맞서 전진하자! 적의 포화에 맞서 전진하자! 전진 ! 전진 ! 전진 ! 나아가자 ! 중국 국가의 별칭은 '의용군진행곡(义勇军进行曲)'이다. 1935년에 상하이에서 개봉된 영화 '풍운아녀(风云儿女)'의 주제곡, 즉 OST이다. 가사는 한 눈에 봐도 전투적이고 비장하다. 곡은 힘차고 울림이 장엄하다. 이런 내용과 느낌의 주제곡이 삽입된 영화라면 스토리가 어떠할지 감이 잡힌다. 영화가 개봉됐던 당시 시대 상황을 살펴보면 영화와 주제곡의 메시지가 더 명료해진다. 당시 상하이는 이미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의 행정권과 치외법권이 보장된 조계지가 광
청나라 말기 동양의 지식인들에게 서구 문명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2500년 동안 공자와 맹자만을 최고로 알았던 지식인들에게 서구의 발달한 과학기술, 기계산업, 의학, 군사무기 등은 마치 새로운 하늘이 열린 것 같았다. 서구는 모든 방면에서 동양의 중심이던 청나라를 압도했다. 서구 문물은 빠르게 중국에 전파됐고 청 황실은 이런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는 전초기지가 됐다. 당대 최고 권력자였던 서태후(西太后, 1836~1908)를 비롯해 황제와 대신들은 서구 문물의 '얼리 어답터' 역할을 했다. 당장 서태후만 해도 중국에서 가장 먼저 자동차를 소유했던 여성이다. 또 중국 최초의 여성 사진작가이기도 했다. 청 황실의 마지막을 기록한 사진들은 대부분 서태후를 찍었거나, 그녀와 관계가 있다. 당시만 해도 사진은 영혼을 가두는 일로 여겨져 많은 중국인들이 겁을 냈다. 하지만 서태후는 직접 사진 기술을 배워 주변 궁녀들은 물론 대신들의 사진을 찍어 남겼다. 이 시기 중국에 X-레이도 들어온다. 그럼 중국인 가운데 누가 처음으로 이 X-레이를 찍었을까? 사람의 겉모습을 찍는 사진기에도 두려움이 컸는데, 몸 속을 찍는 X-레이에 누가 최초로 몸을 맡겼을까? 주인공은 바로 청…
마오쩌둥(毛澤東) 이래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의 공식 복장은 인민복(人民服)이었다.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즐겨 입으면서 새롭게 주목을 받았지만 사실 개혁개방과 함께 인민복은 한동안 사라졌었다. 그렇다면 과연 중국 공산당 지도자 중 누가 처음으로 인민복을 벗고 서구식 양복을 입었을까? 중국에서 무슨 일이든 용감하게 처음 시도한 사람을 '게 요리를 처음 먹을 사람'이라고 한다. 과연 이 분야에서 게요리를 처음 먹은 인물은 누굴까?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서 처음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인물은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이다. 그는 1980년대 덩샤오핑(鄧小平)과 함께 개혁개방을 주도하며 개혁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공산당 최고 지도부의 일원이자 당 총서기인 후야오방이 넥타이를 매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당대 중국 지도자들이 양복을 따라 입게 됐다. 그런데 당시는 넥타이라는 게 대단히 낯설었던 시절이다.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중국의 소설 '평범한 세계'에는 이 때의 혼란상이 잘 나타난다. 갑자기 대도시, 농촌지역 할 것 없이 당 간부들이 줄줄이 양복을 입기 시작한다. 일부는 넥타이 매는 법을 몰라 매듭을 만들어 항상 걸어 놓기도 했다. 갑자기 양복이 가장
축구장 72개(72만㎡)가 들어갈 정도의 크기로 중국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이 올해로 603살이 됐다. 베이징 한복판에 자리한 자금성은 명나라 영락제 집권기에 20만 명이 넘는 인력으로 15년에 걸쳐 공사를 진행해 1420년에 완성됐다. 명청 왕조 시기 9999개 방이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현재 많은 건물이 소실됐지만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중국인들에겐 생전에 가장 가보고 싶은 곳으로 꼽힌다. 매년 춘제(春節, 설) 연휴가 되면 방문객 신기록을 갱신하는 자금성이 처음 대중에게 개방된 날은 언제였을까? 지난 1925년 10월 10일로 황제의 거처에서 국민들을 위한 고궁박물관으로 변신을 한다. 중화민국 정부가 자금성을 고궁박물원으로 개칭하고 황실의 진귀한 보물 및 다양한 궁중 유물들을 보관,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자금성이 처음 시민에게 개방된 날은 황제의 거처를 보러 몰려든 사람으로 말 그대로 장사진을 이뤘다는 기록이 지금도 남아 있다. 기록에 따르면 첫 개방은 오후 2시쯤 이뤄졌다. 사람들은 당일 오전 8시부터 이미 줄을 서기 시작해 신무문 앞까지 이어졌다. 베이징에 자동차가 드물었던 시절이지만, 차를 몰고
"排场 [páichang]" 우리 말로 '웅장한 장면', '겉보기', '겉치레' 등으로 번역된다. 중국을 이해하는 데 정말 중요한 단어지만 아쉽게도 우리에게는 그리 좋은 뜻으로 들리지 않는 단어다. 우리가 지나치게 '실사구시'实事求是의 '실'实에 방점을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허虚와 실实에서 허를 버리고 실 만을 옳다 보는 것은 어떤 점에선 큰 오류다. 허와 실은 서로 보충하는 것이지, 상반된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허는 멀리 있는 이익, 즉 '명리'名利고, 실은 눈앞에 이익, 즉 '실익'实利이다. 명리만 쫓으면 실속이 없고, 실익만 쫓으면 큰 이익을 놓치게 된다. 본래 허를 얻으면 실이 절로 오고, 실을 얻으면 허가 뒤따르게 된다. 이 이치를 일찍이 중시한 게 중국의 문화다. 군자는 항상 둘을 모두 추구한다. 아니 둘의 균형을 추구한다. 그게 중용의 이치다. 특히 일정 수준, 소위 "이만하면 먹고 살 걱정이 없다" 싶으면 추구하게 되는 게 실보다는 허, 명리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도 대기업 반열에 들면, 그 이름만으로 어떤 사업을 해도 성공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 이름을 걸고 너무 작은 이익을 추구하면 오히려 해가 되는 이치다. 이런 의미에서 예
요즘도 중국어는 구어와 문어가 차이가 크지만, 과거 중국에서는 구어와 문어는 완전히 다른 언어였다. 표의문자의 특성 때문이다. 쉽게 말해 말한다고 글을 쓰지 못했고, 써 놓은 글을 소리내 읽었다고 그 뜻을 일반 백성들이 알지 못했다. 글을 쓰는 수많은 법칙이 있었고, 그 법칙을 두루 달통하는 데 평생을 바쳐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쉬운 예를 과거 시험도 마찬가지다. 4자, 4자로 대구를 이루는 문형을 써야 했다. 붓을 들고 쓸 때도 예서와 행서를 정해 놓고 쓰도록 했다. 그냥 논하는 글을 쓰기도 쉽지 않은 데 문형 규칙까지 지켜야 했으니, 오늘날의 대입 논술의 어려움은 과거 과거시험에 비할 바가 아니다 싶다. 굳이 과거시험 문장은 말하지 않더라도 지방 행정 관서의 모든 문서가 이렇게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언어로 작성됐던 것이다. 시골에서 웬만큼 글을 배워서는 지역 관공서 일을 보기조차 힘들었다. 이렇게 차이가 컸던 게 문어와 구어다. 그나마 이렇게 큰 차이가 났던 게 좁혀진 게 청나라 말기 일어난 구어 문체 운동, 백화문 운동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럼 백화문 운동은 언제 일어났을까? 중국 지식인들은 백화문 운동의 시조를 후스(胡适,18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