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오래됐지만 항상 새로운 화두도 없다.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것은 종교, 철학의 가장 근본적 고민이었다. 동양의 공자, 맹자 등은 물론이고 서양의 플라톤, 소크라테스 이래 종교, 철학자들 고민의 중심에는 '삶이란 무엇이냐'의 문제가 존재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많은 사람들이 각자 특색 있는 답을 남겼다. 일부의 답은 두고두고 후인들의 존경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 수많은 고민과 답들의 공통점은 인간적 욕망에 대한 극적인 제약이다. 대부분 종교가 성직자들에게 인간적 생을 포기하도록 하듯 말이다. 그러나 한자에서 삶에 대한 해답은 그 출발은 역시 욕망이지만 방향은 완전히 상반된다. 다른 모든 한자가 그렇듯 참 단순 명쾌하고 인간적이다.
살 활(活) 자가 그 고민을 잘 보여준다. 혀舌에 침이 고여 있는 모습이다. 혀가 마르면 삶의 반대가 된다. 병이 든 모습이고, 죽어가는 모습이다. 사실 갑골문의 모습이 현재의 활 자보다 복잡하다. 강 변의 웅덩이에 나무가 자라는 모습이라고 할까?
혀 설 부분만 따로 살피면 아예 화분 위에 있는 나무의 모습이다. 잎에 물기가 촉촉이 젖어 생기가 영롱한 모습이다.
참으로 한자를 만든 선인들의 사무사(思無邪) 한 순수함에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살 활(活)는 "살아 있다"라는 것은 "혀에 침이 도는 것"이라 말,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있다. 사무사한 표현이다 싶어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치게 된다.
사무사란 공자가 시경을 평한 말이다. 시경의 시들이 순수한 욕망을 적나라하게 그렸다는 칭찬이다. 사실 이 공자의 말씀을 이해하면 한자가 전하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다.
사무사란 게 무엇인가? 사람은 먹어야 살고, 살면 똥을 싸야 한다. 신진대사가 원활하지 못하면 병이 생긴다. 동물의 발정기처럼 사람은 일정 나이가 되면 이성을 그리게 되고, 그래야 종족을 보존한다. 더 좋은 종족으로 만들기 위해 남자는 예쁜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는 멋진 남자를 좋아한다.
하지만 사람이 스스로 욕망이 복잡해지면서 그 멋지다는 것 역시 복잡해진다. 좋아한다는 것 역시 복잡해진다. 멋지다는 게 누구에게는 외모고, 누구에게는 그가 가진 것이다. 누구에게는 그 사람 자체다. 좋아하다는 게 누구는 매 순간 다르고, 누구는 죽는 순간까지 변하지 않는다.
노래 가사도 그렇다. 아재들은 요즘 유행 가사를 유치하다 하지만 젊은이들에게는 그저 좋기만 하다. 감정이 순수한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다고 한 게 바로 공자다. 공자의 사무사에 개념은 한마디로 감정이 순순한 게 좋다는 것이다.
다음 시경의 시를 보면 이해가 된다. 솔직히 요즘 가사 못지않게 유치하다.
아아 애달프다. 우리 부모님
나를 낳아 기르시기에 얼마나 고생하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