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 서서 차라리 봄도 꽃 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 songsy, 출처Pixabay 1940년 '인문평론' 7월 호에 발표된 이육사의 작품 '교목'이다. 거세 바람, 세월의 풍파를 이겨낸 고목을 보면 누구나 그 의연함에 고개가 숙여진다. 오래됐다는 때문이 아니다. 세월을 이겨냈다는 것 때문이다. 벼랑 아슬아슬 곳에 자라 이리 휘고 저리 휜 소나무도 우리를 의연하게 한다. 그의 자란 모습에서 그가 견뎌야 했던 고통이 절로 느껴진다.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묘하게 꼬인 그의 몸은 그가 견뎌야 했던 고통의 무게다. 그 무게가 느껴질 때 우리의 의연함은 배가 된다. '의연'이라는 단어는 참 동양적인 단어다. 바람 앞에 꺼질 듯 꺼질 듯 꺼지지 않는 등불, 세월을 이긴 나무, 바위에서 우리는 의연함을 느낀다. 노자가 지적하듯 가장 약하지만 가장 강한 물이라고 할까. 반드시 세월로 강함이 증명돼야 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닮고 싶은, 그렇게 되고 싶은 단어다. 사전을 찾아보면
© jenandjoon, 출처 Unsplash 쓸모 있다는 것만큼 현대에서 존중받는 가치도 드물다. 반대로 "어디다 쓰니?", "쓸모없는 놈" 같이 심한 욕도 없다. 그런데 과연 '쓸모 있다'라는 게 무슨 뜻일까? 동양에서는 오래전부터 이 쓸모에 대해 고민해왔다. 대표적인 화두가 노자의 '當無有用'(당무 유용)이다. 통이 채워져 있으면 수레바퀴로 쓸 수 없고, 통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 것이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흙으로 그릇을 빚어 쓸모가 있는 것은 그것이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비어 있기 때문에 쓸모가 있다고 한다. 사실 쓸모의 용자에는 일찌감치 이 화두가 담겨 있었다. 갑골문의 용자는 나무로 만든 물통의 상형자다. 용 자의 가운데 작대기는 물통의 뚜껑을 의미한다. 개인적으로는 우물의 지렛대 두레박 모양이라고 생각한다. 솟을 용(甬) 자와 같은 자인데 쓸 용자의 의미가 쓰다는 뜻으로 고착되면서 쓸모라는 뜻으로 쓰이게 됐다는 게 학자들의 분석이다. 그리고 쓰다, 쓸모 등의 뜻으로 用 자가 쓰이면서 나무 통이라는 뜻의 한자 인 통(桶) 자를 만들었다고 학자들은 본다. 언제나 그렇지만 그 옛날 한자를 만든 선인들의 순박한 지혜에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쓸모
정情을 뜻 정이라고 한다. 참 마음에 안 든다. 뜻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 …. 그런데 사실 뜻이나 마음이나? 뭐가 다른가. 지금은 상상하기도 힘들지만 동양에서는 연애恋爱라는 게 없었다. 아마 젊은이들은 깜짝 놀랄듯싶다. 그럼 어찌 결혼을 했을까? 연애가 우리 사회에 일반화된 것은 근대화 이후다. 일본 지식인들이 서양에서 수입을 해왔다. 크 아직도 무슨 말인가싶다. 연애라는 말은 일본에서 서양 기사도에 나타나는 남녀 간 '사랑' 관계를 번역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서양 기사도와 귀부인의 사랑 이야기는 동양에서 보면 황당한 일이다. 능력 있는 남자가 귀부인과 사랑을 나눈다. 육체적인 사랑이기 보다 서로의 명예를 존중해주는 사랑이다. 때론 이 사랑을 위해 기사도 귀부인도 각기 목숨을 걸기도한다. © sniv, 출처 Unsplash 지금 생각하면 '이게 어때서?' 하겠지만, 18세기 말 동양에서는 참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동양에서 남녀 관계는 단순히 딱 두 종류만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서 집안 정해준 부부관계, 혹은 그 밖의 관계? 가 전부다. 부부는 집안에서 서로 맡은 역을 하고, 남자는 더 필요(?) 하거나 능력이 있으면 첩을 얻으
정 情이란 무엇일까? 우리 동양에서 사람 관계에 가장 중요한 게 정이다. 그 복잡한 모든 감정을 정이라는 한 마디로 아우른다. 그래 어려운 게 정이다. 그런데 이 정을 "항상 마음이 푸르른 것"이라고 해석하면 어떤가? 와닿지 않는가. 한자 정은 마음 심(心)에 푸를 청(靑) 자를 쓴다. 회의 자다. "마음이 항상 푸르다"라는 게다.역시 한자를 만든 선인들의 생각이 명쾌하고 사사로움이 없다. 현재 갑골 자형은 보이지 않고 금문의 자형만 보인다. 금문에서 정 자는 앞에 설명한 그대로 갑골문자의 상형자인 심(心) 자 옆에 푸를 청(靑)를 쓴다. 그럼 푸르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학자들은 푸르다는 것은 푸른색 염료의 탄광에서 나왔다고 본다. 위 모양은 날 생 生 자의 원형이고 아래 모양은 광산의 갱도를 의미한다고 본 것이다. 아래 모양은 붉을 단(丹) 자의 원형으로 봤다. 결국 푸를 청자는 붉을 단(丹) 자위에 날 생(生) 자의 자형인 셈이다. 우습게도 붉은 것에서 다시 붉어져 나오는 게 푸른 것이다. 결국 "붉디붉은 게" 푸른 것이다일본의 시라카와 시즈카 교수는 농경 제례의식에 푸를 청(靑) 자가 붉고 푸른색으로 농경 기구를 칠한 뒤 정화시키는 의식에서 유래했을
행운을 바라는 사람이 많지만, 진정 행운의 의미를 아는 이는 드물다.행운은 기다리면 오지 않는다. 기다리지 않는 이에게 돌연히 찾아와 놀라키고, 기쁨을 주는 게 행운이다. 그런데 아는가? 행운은 바라는 순간부터 불행해진다는 것을…. 한자의 행운 그 자체가 그것을 경고하고 있다는 것을. 행운의 행자에는 정말 놀라운 비밀이 숨어있다. 바로 한자의 원형, 갑골문자만이 담고 있는 비밀이다. 그 비밀을 알면 진정한 행운의 의미를 안다. 참 묘한 모양이다. 갑골문의 자형은 마치 무슨 공상과학 영화 속에 등장하는 무기나 비행 물체 같다. 학자들은 이 모양이 나무로 만든 수갑이라고 본다. 두 나무를 아래 위로 맞댄 뒤 양 끝을 노끈으로 묶어 손을 꼼짝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 설명을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 정말 잘 만든 도구다. 행운의 행 자가 활용된 다른 사례다. 사람이 정말 손을 묶인 형태다. 집행한 집자다. 손으로 사람을 잡는 도구가 행운의 행자이고, 실제 이를 활용해 사람을 잡은 게 집행할 집인 것이다. 이제 비로소 다 이해가 된다. 정말인가? 아니 정말 큰 의문이 남는다. 수갑의 행이 어떻게 행운의 행이 됐을까? 그냥 발음이 같아 뜻을 빌려 쓴 것이라고
중국 간자는 단순화되서 편한 것도 있지만, 아쉬운 것도 많다. 사랑 애가 그렇다. 간체의 사랑에는 마음 심이 빠졌다. 마음 없는 사랑이라니 …. 참 그렇다. © paulgarciaph, 출처Unsplash 한자를 만든 동양의 선인들은 참 순수했다. 매번 키스를 하고, "I love you"를 달고 사는 서양보다 그 달콤함은 좀 떨어질지 몰라도 마음의 따뜻한만은 더 넘쳤다. 오죽했으면 사랑을 "상대방의 마음을 따뜻하도록 '호' 불어주는 것"이라 풀이했을까? 아무리 다시 봐도 정말 멋진 해석이다. 시경에서 노래한 사랑도 참투박하다. 死生契闊, 與子成說. 執子之手, 與子偕老"사생계활, 어자상설, 집자지수, 어자해로" 죽음과 삶 그 모든 고난도, 그대와 함께 있어 행복하네.그대 손을 잡고, 그대와 함께 늙어 가네 마치 "사랑이 별 거 있어. 둘이 아끼고 살아가면 되지"하는 시골 어른들의 말을 듣는 듯 싶다. 여기에 발, 행동이 들어간 게 사랑이다. 사랑은 진정한 위(爲) 함을 실천하는 것이다. 위한 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이미 갑골자 위를 통해 살펴봤다. 사랑의 애뜻함은 말을 못하는 데 있다. 먼 길 떠나는 남편을 문 뒤에서 배웅하는 아내의 모습은 대표적인
'사랑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사랑은 마음을 '호'하고 불어주는 거야"라고 한다면 어떨까? © caroliveer, 출처 Unsplash "사랑은 나일강 같다. 갑자기 범람해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다 파괴하는 듯싶지만 결국 남기는 게 강변의풍요다." 독일 문호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에 나오는 말이다. 괴테는 사랑을 이렇게 격정적이지만,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라 정의했다. '사랑이 무엇인가?' 수많은 시인들이 답했다. 괴테 같은 질풍노도의 답도 있고,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심지어 허무주의적 답도 있다. 체내 화학물질의 작용에 불과하다는 극단적 냉소주의 답도 있을 수 있다. 다 차치하고 개인적으로 가장 좋은 답이 '사랑은 마음을 호하고 불어주는 거야'다. 한자, 갑골문자의 자형이 알려준 답이다. 참 쉽고 단순하다. 순수하고맑다. 갑골사에서 위의 모양에 대해 사람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아래는 심장이다. 심장은 비교적 분명하다. 상대방의 심장을 두 손으로 살포시 잡아 '호'하고 안전을 시켜주는 모양이란다. 상상만 해도 절로 마음이 따뜻해진다. 내 입김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게 사랑이다. 전서 말기에 들어 부호가
요즘 자동차도 그렇지만, 동양에서 마차는 오랜 전부터 여러 상징적 의미가 있다. 우선 신분의 상징이었다. 또 보병전이 대부분이었던 과거 적의 병력 규모를 파악하는 가장 좋은 기초 자료였다. © Gellinger, 출처 Pixabay 중국 시안(西安) 병마총엔 황제의 마차가 있다.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산(傘)이 사람이 타는 마차 가운데 있고, 황제가 앉을 곳과 시종이 서 있을 곳만 있는 단순한 구조였다. 그래서 더욱 고상해 보였다. 요즘도 그렇지만 차는 동양에서 오랜 전부터 신분의 상징이었다. 한(漢) 대까지 황제는 4두마차, 장상 제후는 3두마차, 사대부는 2두마차, 필부는 1두마차를 탔다. 시대가 변하면서 신분을 상징하는 차량도 다양해졌다. 명(明) 나라 대신인 장거정(1525~1582)은 개혁적인 사고방식을 지녔지만 거실은 물론 화장실과 욕실까지 갖춘 초대형 마차를 타고 다녔다. 마차꾼만 30명에 달했다고 한다.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 때는 귀족을 친왕(親王), 군왕(君王), 패륵(貝勒), 패자(貝子), 공(公) 등 5등급으로 나눠다. 공은 다시 진국공(鎭國公)과 보국공(輔國公) 등으로 나눈 뒤 보국공을 다시 팔분(八分) 대접을 받는 보국공과 그
가끔 한번은 사물을 뒤짚어 볼 필요가 있다. 평소 당연했던 게 달라져 보일 때가 많다. 의외로 새로운 것을 배울 수도 있다. © Emslichter, 출처Pixabay 한자 차 車에 무슨 현묘함이 있을까? 처음부터 너무 쉽게 추상화돼 지금도 바뀌지 않고 쓰이는 한자가 바로 차 자다. 그래서 뜻도 깨끗 명료 단순하다. 참 쉽다. 마차, 요즘은 자전거, 오토바이, 자동차 등도 다 포괄해 소위 탈 것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이 단순한 차 자도 갑골자를 보다 보면 무릎을 치게 되는 현묘함이 있다. 말을 뺀 마차의 모습을 그대로 옮겼다. 바퀴를 작대기 하나로 표현하고 사람이 앉는 부분을 네모상자에 십자를 더해 표현했다. 재미있는 것은 초기 갑골문에서는 바로 선 이 마차가 금문으로 넘어가며서 거꾸로 서있다는 점이다. 차 자는 앞으로 가는 마차 모양이 아니다. 옆으로 가는 모습, 혹은 마차를 세워놓은 모양이다. 왜 선인들은 달리는 마차로 바로 글자를 표현하지 않았을까? 단순한 이유는 글자를 써보면 안다. 현재 모양의 글자가 쓰기가 편하다. 옆으로 눕히면 글자를 쓰기 힘들어진다. 비교할 글자로 주 州 자가 있다. 하늘에서 커다란 강물이 흐르고 그 사이 퇴적된
和而不同 화이부동많은 사람이 좋아하지만, 그 진정한 뜻을 쉽게 설명할 이는 많지 않다. 화와 동의 개념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군자는 화요, 소인배는 동이라고 했다. 화는 그래서 같이 어울리지만, 동은 그래서 같이 있다 싸운다고 했다. 거 참????!!! 뭐지 싶다. 이미 화는 살며 봤다. 왜 화목한지도 안다. 그럼 동은 무엇일까? 갑골자 동은 사다리 같은 모양 아래 입 구(口) 자가 있는 자형이다. 이 사다리 모양에 해석이 많다. 우선 이 사다리 모양을 범선의 범(凡) 자의 원형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다. 본래 배에 돛인데, 무릇 혹은 대중이라는 뜻으로 쓰이면서 본래 뜻을 살리는 범(帆) 자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중국 학자들은 이에 네 개의 손잡이가 달린 기구라고 설명한다. 농사 때 땅을 고르는 기구이고 네 명이 일을 하기 때문에 무릇 범이 됐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학자들은 돛 범자에서 범은 발음부호 역할을 할 뿐이라고 본다. 이제 개인적으로 가장 점수를 주는 게 중국 왕샹즈王祥之의 견해다. 왕샹즈는 중국 50대 서예가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정통학자는 아니지만, 서예를 통해 문자학에 조예가 있다. 왕은 이 사다리를 그릇이라 본다. 같은 그릇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