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인(人)자는 크게 쓰기 힘들다. 획이 너무 단순해 자칫 우습게 보이기 일쑤다. 한자 그대로 사람도 마찬가지다. 크게 쓰이는 사람이 되기 힘들다.” 중국에서 한때 대사적인大寫的人이란 노래가 유행했다. 마을을 위해 일하다 과로로 쓰러져 숨진 안후이安徽성 펑양凤阳현 한 촌락의 당서기 선하오沈浩의 생애를 소개한 영화의 주제곡으로 인기를끌었다. 위대한사람이란 크게 쓰이는 사람 인 같다는 생각에서 쓰인노래다. “一撇一捺写出个人yī piě yī nà xiě chū gè rén一生一世才做成个人yī shēng yī shì cái zuò chéng gè rén红手印按出个大写的人hóng shǒu yìn àn chū gè dà xiě de rén万事根本是做人wàn shì gēn běn shì zuò rén做人 做大写的人zuò rén zuò dà xiě de rén清清白白 勤勤恳恳qīng qīng bái bái qín qín kěn kěn不求光环 不求缤纷bú qiú guāng huán bú qiú bīn fēn只愿做棵禾苗深深扎根zhī yuàn zuò kē hé miáo shēn shēn zhā gēn做人 做大写的人zuò rén zuò dà xiě de rén平
“사람은 품品과 격格으로 산다. 품과 격이 두 획을 이룰 때 비로소 사람 인人자가 쓰인다.” 위인为人과 주인做人이사람 인人의수양의 도道라 한다면 그 정도를 보여주는 게 품과 격이다. 한자 품은 쉽게 입 구口자가 셋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셋은 많다는 의미다. 많은 입이 하는 한마디가 품인 것이다. 삼인성호三人成虎의 고사가 있다. "밖에 호랑이가 있다"는 말을 한 사람이 하면 못 믿지만, 둘이 하면 마음이 흔들리고, 셋이 하면 믿게 된다는 고사다.사람 스스로의 위인과 주인의 수준은 최소한 3명에게 보증 받아야 하는 것이다. 격은 나무 목木에 각各자가 합쳐진 형성자다. 나무의 의미를 따르고 각의 소리를 따랐다고 본다. 그래서 글자의 본의를 긴 나무 가지라고 본다. 그러나 소리 부분 역시 의미와 전혀 무관한 게 아니다. 각의 윗부분은 앞으로 나가는 모습이며 아랫부분은 입 구의 모양을 하고 있다. 흔히 사거리에 나가 상의하다는 의미로 본다.자형만으로 보면, 사거리에 나가 말한다는 의미가 있어,묘하게 삼인성호의 고사와 상통하는 게 있다. 둘이 합쳐 만든 단어가 품격이다.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1) 사람 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 2) 사물 따위에서 느껴지는
“사과나무는 사과를 맺고, 배나무는 배를 맺는다. 나무는 스스로 어떤 결실을 맺을지 의심하지 않는다. 그냥 열심히 살 뿐이다. 살아 때가 되면 반드시 결실이 생기고, 그 결실을 맛보는 이들이 생긴다.” 그게 자연을 따르는 삶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본인이 행한 일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다. 중요한 것은 열심히 그 결과를 맺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살아남는 것이다. 스스로 완전에 가까운 인격체로 완성돼 가는 것이다.한자의 획이 두 획이듯 중국에서 한 사람이 스스로를 인격체로 만들어 가는데 두 가지 개념이 있다. 하나가위인(爲人)이고 다른 하나가 주인(做人)이다. 흔히 위인은 사람의 본바탕을 말한다. 타고난 사람 됨됨이다. 나무로 치면 사과나무와 배나무 같은 종의 차이를 의미한다. 사과나무와 배나무가 자라는 조건, 열매를 맺는 조건이 다르듯 위인에 인격체로 완성되는 조건이 달라진다.모든 나무가 자신에 맞는 환경을 찾아 뿌리를 내리고, 줄기가 자라 열매를 맺듯 사람도 스스로 위인 됨을 깨달아 스스로를 가다듬어야 완성체로 자랄 수 있는 것이다.그래 나오는 게 주인(做人)이다. 위인의 모자람을 채우는 노력이다. 예컨대 위인이 삼각형이고 완성체가 원형이라면 주인
노동의 가치를 서구가 발견했다고?한자를 알면 동의하기 어렵다.갑골문자에서 사람 인(人)은 허리를 굽혀 일하는 모습이다. 가을 수확을 하는 사람의 모습일까? 과실인지, 익은 벼인지, 사람 인자는 몸을 숙여 수확을 하는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했다.인간을 노동하는 동물로 본 것이다.경제학 및 사회학에서 노동은 사회의 유지에 필수적인 생산활동을 가리키는 용어다.교과서적으로 말해서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공동생활에 참여하며 자아실현을 도모하고 인격의 성장을 이룬다. 노동은 사회를 유지하는 신성한 기본 요소인 것이다.서구 사회가 인간의 지혜를 강조해 호모사피엔스의 인간에 주목을 할 때 동양의 선인들은 사람을 노동하는 인간, ‘호머 레이버스’(labourer)로 본 것이다.19세기 유럽의 철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들이 노동의 신성함을 인정하기 수천 년 전의 일이다.
사람 인(人) 자를 늘이고 머리에 획을 더하면 자꾸 커진다.클 대(大) 자와 연결되고 하늘 천(天) 자와 연결되고 맑을 호(昊)자와 이어지고…. 사람 인 자는 그렇게 끊임없는 한자의 우주 속으로 빠져든다. 도무지 하나로 꿰일 듯싶지 않은 것들이 사람 인에서 출발한 선으로 꿰어져 이어지는 것이다. 아, 사람이 우주인 것이다.
서예를 하다 보면 가장 쓰기 어려운 글자가 사람 인(人)자다.본래 한자 서예는 쓰다면서 획이 적은 게 많은 것보다 쓰기 어렵다. 획이 많은 것은 적당히 쓰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획이 적은 글자는 웬만큼 잘 써서는 잘 썼다고 보이기 힘들다. 특히 사람 인(人)자는서예의 좌우 두 획의 기본을 가지고 있다. 撇와 捺가 그것이다. 그래서 사람 인 자는 일(一) 자와 이(二) 자보다 힘들다. 일, 이 자에는 힘만 담으면 되지만 사람 인 자에는 경륜을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예가들은 붓을 들어 가장 쓰기 어려운 한자 중 하나로 사람 인 자를 꼽는다.어찌 단 두 획에 경륜을, 인생을 담을까? 역시 쉽지 않은 문제다.
“물의 법칙으로 소통하도록 하는 것, 물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그 위험을 이웃에, 미래에 떠넘길 수 없다. 치(治)의 도리다.” 민강이 이 정도이니 장강의 치수 규모는 말할 나위가 없다. 최근 상하이上海인근의 물이 베이징北京에 다다르도록 치수가 끝나 중국 동부의 지도에 큰 변화가 있다. 삼협댐의 규모만도 보는 사람들을 경탄케 한다. 이렇게 치수는 그 물의 양이 커지면 커질수록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 된다. 좀 엉뚱한 이야기지만,실제 봉건시대 치수 작업은 국가의 명운을 바꾸기 일쑤였다. 치수 규모가 크다 보니 많은 인력을 일시에 동원해야 했는데, 이렇게 동원된 인력이 반란군으로 변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원나라 말기 장강 치수다. 홍수가 난 장강 주변을 정리하기 위해 징집한 농민이 순식간에 반란군으로 변했다. 당시 원나라 조정에서는 이를 두려워해 범람한 강을 정비할지를 놓고 토론까지 벌였다. 하지만 홍수 피해가 커농토를 정비하지 않을 없는 지경이었다. 이렇게 곡절 끝에 장강 홍수 정비 공사가 시작된다. 징집돼 반란군이 된 인물 가운데 명을 세운 주원장도 있었다. 주원장의 본명은 주중팔이었다. 주 씨 집안 여
“물은 가장 약하지만 가장 강하기도 하다. 그래서 물을 다스리기 가장 어렵다. 다스린다는 것은 물의 특성을 법칙으로 안정을 추구하고 소통하게 하는 것이다.” 참 멋드러진 말이다. 이렇게 동양의 통치 철학은 분명한 곳에서 출발해서 아쉽게도 갈수록 모호해졌다. 간단히 물처럼 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남을 이롭게 하고 항상 낮은 곳에 임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바로 요즘 우리가 다시 한번 물을 다스리는 법을 되돌아봐야하는 이유다. 한자치(治) 자에 그 답이 있다. 금문 이전의 치는 분명물 옆에 길을 내 아래 마을을 지키는 모양이다. 고대 우(禹)왕의 치수법이 바로 그랬다. 한자 치는 치수에 바빠 집 앞을 3번 지나치고도 집을 들리지 못했다는 우왕의 치수법을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다. 우왕의 치수법은 아직도 현존하고 있다.쓰촨(四川) 두장옌(都江堰)그 그 곳이다.두장옌은 진나라 촉군의 태수 이빙과 그의 아들 이랑이 기원전 306~251년 사이 건설했다는 수리시설이다. 전설의 우왕이 하왕조의 시조이고, 은, 주왕조를 지나 춘추전국 시대까지 약 2000년의 시공은 넘어 우왕의 치수법을 그대로 실현한 것이다. 역시 한자의 매력이다. 두장옌은민강의 범람을 막고 쓰촨 농경
다스리기 어렵다. 모든 정치인들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사실 어렵다. 그런데 그래서 그 대가도 크다는 것을 정치인들이 알까?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 것일까? 모두가 다스린다는 개념에서 유래된 문제다. 그럼 다스린다는 게 도대체 뭘까? 요즘 자유민주주의, 대의민주주의 등 다양한 개념이 나와, 다스린다는 게 명쾌한 듯 하면서 어느 순간 일반인들에겐 더욱 멀어진 개념이 됐다. 동양적 의미도 마찬가지다. 요즘우리와 중국 등 한자권에서는 다스린다는 게 대단히 두리뭉실하게 두루 쓰인다. 한마디로 그 뜻이 복잡하다. 우리말부터 보면, 먼저 대표적인 뜻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이다. 그 외 통증도 다스리고 흉악한 죄인을 중벌로 다스리기도 한다. 또 사물을 정리해 처리한다는 의미도 있고, 어지러운 사태를 수습하다는 뜻도 있다. 한자 치는 우리의 다스리다는 말과 그 의미범위가 크게 겹쳐 있다. 역시 우리말처럼 두루 다스리는 의미로 쓰인다. 재미있는 것이 동서양의 차이다. 동양의 다스린다는 말이 서양의 개념과는 분명히 다르다. 나라를 다스리다는 영어로 govern, rule (over)이며 감정 등을 다스리다는 control, (formal) subdue 등이다. 죄인 등
아쉽게도 사람의 유한함은 언제나 하늘의 도리를 볼 수 있도록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인간이 옳다는 가치나, 그르다는 가치는 그때 그때 다른 경우가 많다. 가끔 그래서 옳은 이야기를 하며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이들이 나온다. 혹세무민(惑世誣民)이다. 한나라 어제의 고사가 있다.한나라 애제(哀帝;BC26~BC1)는 몸이 약했다. 20세 젊은 나이로 황위에 올랐지만 병치레가 잦아 나라가 엉망이었다. 대신 하하량(夏賀良)이 상소를 해 연호를 바꾸고 대사면을 권해 애제가 따랐지만 정국은 더욱 혼란에 빠졌을 뿐이다. 사실 연호를 바꾸거나 대사면을 하는 것은 시기만 맞았다면 정권에 도움이 됐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당시 실정에 전혀 맞지 않는 정책이었고 정국은 혼란스러워졌다.결국 애제는 하하랑을 사형에 처한다. 당시 하하량의 죄는 '불합시의'(不合時宜), 말 그대로 때에 적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때에 맞지 않는 옳은 일들이 때론 때에 맞는 옳지 않은 일보다 더 나쁠 수 있다.미국의 마이클 샌델 교수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인간적 정의가 다양한 가치들의 순서를 정하는 것임을 예리하게 지적했다. 서양의 여러 철학적 사상 속에서 강조하는 정의의 가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