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유는 '농'에서 나온다. 어렵고 힘들 때 불평이나 욕을 하는 게 아니라, 가볍게 농담을 던질 때 우리의 삶은 여유롭고, 풍요로워 진다. 최소한 옛날에는 그랬다. 힘들고 어려울 때 직접적이지 않게 애둘러 말했다. "이 놈의 세상, 의료개혁 같네. 뜻 대로 되는 게 없어!" 중국에서는 음력 7월 7일 칠석에는 고마운 사람을 찾아 식사를 대접하는 풍습이 있다. 옛날 중국 한 마을에 자린고비로 유명한 이가 살았다. 이 자리고비는 그래도 자녀 교육에는 돈을 써 주변에 유명한 학자를 물색해 아들의 스승으로 삼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칠석이 됐다. 온 마을 사람들이 서로를 불러 식사 대접을 했다. 스승도 이 자린고비가 불러주길 기다렸다. 그런데 웬걸? 이 자린고비는 칠석이 다가 와도 요지부동, 스승을 부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스승이 참지 못해 학생을 불러 넌즈시 물었다. "아버님이 식사는 언제 하자고 아무 말씀도 없으셨나?" 그제야 스승의 마음을 알아챈 학생이 아버지를 찾아 말했다. 그러자 아이의 아버지 자린고비가 "허허"하고 웃으며 답했다. " 아니, 내가 깜박 실수를 했구나. 밥은 한 번 먹어야 하는 데 이미 칠석은 늦었고 오는 음력 8월 15일 중추절에
중국 자린고비 이야기다. 자린고비는 구두쇠를 뜻하는 순 우리말이다. 옛날 중국의 한 마을에 소문난 구두쇠가 있었다. 어느날 이 구두쇠가 옆 마을에 있는 구두쇠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감탄한다. '내가 아낀다고 하는게 정말 하찮은 것이구나. 그 선생의 찾아 뵙고, 사부로 모셔 아끼는 방법을 배워야겠다.' 이리 결심한 구두쇠가 옆마을 구두쇠 선생을 사부로 모시기로 하고 찾아간다. 각종 예물을 준비했는데, 종이로 각종 과일을 그리고, 빈 술병에 물을 채워 사부에게 드리는 선물이라 준비했다. 하지만 찾아간 당일 아쉽게도 소문난 구두쇠 선생이 출타를 하고 없었다. 대신 사모가 있어, 구두쇠는 사모에게 온갖 예를 갖춰 인사를 하고 예물을 바쳤다. 그러자 사모 역시 종이로 그린 접시에 종이로 그린 과일과 과자를 얹어 내놓으며 말했다. "과일과 과자 좀 드시고 가시죠" 그 것을 본 구두쇠가 '역시 사모는 남다르군' 하고 감탄하고 돌아갔다. 얼마 뒤 그 유명한 구두쇠 선생이 집에 돌아왔다. 사모는 낮에 찾아온 구두쇠 이야기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이야기 했다. 내심 '대접은 잘했지요'라고 생각하며 구두쇠 사부의 칭찬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웬걸. 칭찬 대신 떨어진 것은 '호
옛날 부가가치 생산이 극히 적었던 시절, 돈을 버는 방법은 간단했다. "버는 것보다 적게 써라. " 본래 과거 농사일은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농사를 져서 수확하는 것으로, 투여되는 자본이 극히 적었다. 노동력이 대부분이었다. 간단히 그렇게 걷어들인 곡물을 시장에 내놔 돈을 얻으면 그 돈에서 생활비로 쓰고 남는 게 축적되는 자본이었다. 그러니 아껴쓰면 쓸수록 부자가 됐다. 이에 옛날 중국 유머에는 자린고비에 대한 일화가 많다. 읽다보면, '뭘 이렇게 까지' 하는 생각도 들지만, 한 푼이라도 더 아끼려는 이들의 서민들의 마음이 담겨져 있어 아련할 때가 많다. 옛 날 중국에 인색하기로 유명한 부자가 둘이 있었다. 둘 다 술을 좋아했는데, 워낙 자린고비들이어서 술을 마시는 데 돈을 쓸 수가 없었다. 이 두 부자는 고심 끝에 이들만의 독특한 '음주법'을 만들었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재미있었는지, 두 부자의 음주법은 동네를 넘어 이웃마을까지 전해졌을 정도다. 그럼 그 음주법은 뭘까? 술을 젖가락으로 마시는 방법이다. 술 한 잔을 놓고 젖가락으로 떠서 마시는 것이다. 젖가락을 너무 많이 적셔도 안된다. 적당한 깊이만 젖가락을 술에 젖셔서 마시는 게 이들의 독특한 음주법이
자본을 쌓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게 '자린고비' 정신이다. 무엇이든 아껴서 모아야, 그게 쌓이면 자본이 되는 것이다. 굳이 자본주의가 아니더라도, 재물을 쌓는 원리는 유교의 경전 가운데 하나인 '대학'에서도 나온다. '대학'은 나라가 부국이 되는 길을 하나로 제시하고 있다. "生之者众,食之者寡“ (생지자중, 식지자과: 생산하는 이가 많고, 소비자가 적으면 재물이 쌓인다.) 하지만 재물의 도리는 버는 도리만 있는 게 아니다. 아끼는 것도 도리가 있다. 이 도리를 모르면 아끼는 게 고통스럽기만 할 뿐이요, 아낀다고 자본이 쌓이는 것이 아니다. 중국 옛 이야기는 배거(裴璩)라는 자리고비면서 악독한 관리가 나온다. 이 관리는 보기 좋은 가구만 보면 탐을 내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매번 좋은 가구만 보면 사들였다. 하지만 한 번 산 가구는 아까워서 쓰지를 못했다. 매번 제대로 포장을 뜯지도 않았고 집 한귀퉁이에 쌓아 놓기만 했다. 그러다가 꼭 가구를 써야할 순간이 오면, 그 때는 어땠을까? 이 관리는 그래도 가구를 쓰지 못했다. 권력을 활용해 주변의 중고품을 빌려서 쓰곤 했다. 자신의 새 가구는 아까워서 쓰지 못하고 남이 쓰던 것을 쓴 것이다. 하지만 이 관료가 모르는
아첨은 참으로 무섭다. 받는 이만 모른다. 아첨은 누가 봐도 지나친 것이다. 주변에서 보는 이들은 누구나 그 지나침을 본다. 하지만 유독 받는 자만이 모른다. 아첨은 받는 이의 눈만을 가리는 술수다. 병으로 치면 아첨은 당뇨다. 당뇨병이 무서운 것은 신체의 기능을 서서히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피를 혼탁하게 해 조금씩 생명을 갉아먹는다. 당뇨로 인해 남보다 빠르게 신체 기능이 떨어지고 많은 합병증이 유발되지만 처음에는 대다수가 그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실 당뇨 자체는 당장의 아픔도, 불편함도 초래하지 않는다. 아첨은 이런 점에서 당뇨보다 더 무섭다. 마약과 같은 기쁨을 준다. 아첨을 받을수록 기뻐하고, 스스로 한계를 넘는다. 그리고 자신을 패망의 길로 몰아간다. 당뇨와 마약처럼···. 전국책 제책편에는 장의를 패망의 길로 몰아간 위나라 장군 공손연의 사례가 나온다. 단 한 번의 아첨으로 장의를 곤궁에 빠뜨린다. 때는 합종연횡이 한참이던 시기였다. 당시 위나라는 공손연을 앞세워 제나라를 쳤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나라 힘만 쇠해졌다. 위나라 왕은 장의를 재상으로 삼고, 제나라와 화해를 한 뒤 진나라와 연횡을 했다. 제나라는 자신을 공격한 공손연이 위
듣기 좋은 소리가 나쁜 것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듣기 좋아하는 소리는 정해져 있다. 그래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남이 듣기 좋은 소리를 할 수 있다. 듣기 좋은 소리나 듣기 싫은 소리나 ‘참되다’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듣기 좋은 소리에도 참된 소리가 있고, 듣기 나쁜 소리에도 참된 소리가 있다. 다만 그것은 듣는 입장에서도 말하는 입장에서 보면 듣기 좋은 참된 소리는 굳이 아니 한만 못하고, 듣기 나쁜 참된 소리는 하고 싶어도 안하는 게 좋다. 듣기 좋은 참된 소리는 들은 사람이 자꾸 듣고 싶고 듣게 되는데, 소리란 게 들으면 들을수록 소리만 남고, 실체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자기도 모르게 소리와 다른 행동을 하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듣기 좋은 거짓 소리로 만들게 된다. 말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듣기 좋은 참된 소리를 듣고 기뻐하는 사람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자꾸 참되지 않은 듣기 좋은 소리까지 하게 되는 법이다. 듣기 싫은 소리는 말할 나위없다. 중요한 것은 듣기 좋은 소리에서 참되지 않은 것을 고르는 지혜이고 듣기 나쁜 참된 소리를 골라듣는 노력이다. 전국책 제책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나온다. 전국의 패자 제나라 재상 추기는 8척
본래 똑똑하기가 쉽다. 아니 똑똑한 척 하기는 쉽다. 진실은 누구나 똑똑한 척을 한다. “모두가 선생이 되려해 싸움이 난다.” 천하의 스승인 공자의 말이다. 똑똑한 참모는 좋은 계책은 내놓지만, 슬기로운 참모는 주군이 좋은 계책을 내도록 한다. 그러면서도 때론 자신의 가치를 분명히 알도록 한다. 슬기로운 참모는 그래서 다른 이의 질시를 받지 않는다. 전국책 제책편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있다. 제나라에는 추기(鄒忌)와 전기(田忌)라는 두 사람이 문무 두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하지만 둘은 서로 사이가 나빴다. 전기는 문에도 뛰어났지만 무에도 뛰어나 추기가 질시를 했다. 그러던 어느날 추기가 제나라의 재상이 됐다. 추기의 가신 가운데 한 명이 꾀를 냈다. “아니 왜 왕에게 위나라를 치자고 주장하지 않습니까? 전쟁에서 이기면 재상께서 세우신 계획 덕이고 지면 전쟁에 나서 제대로 싸우지 못한 전기 탓을 몰아 전기를 곤혹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추기가 그럴 듯하다 싶어 왕에게 위나라 침공 계획을 보고 했다. 왕은 추기의 조언에 따라 위나라를 침공했다. 전기가 장군이 돼 선봉에 섰다. 그런데 전기의 재주는 추기의 기대 이상이었다. 백전백승의
마음 약한 이들이 흔히 하는 실수가 자신의 부를 자신보다 더 부자에게 나눠주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설마 그럴까’ 싶지만, 주변에서 흔히 일어난다. 특히 회사 경영 과정에서 쉽게 비슷한 사례를 발견하게 된다. 수많은 경우가 있다. 그냥 선의로 돕는다는 게 그만 자신의 경쟁력을 빼앗기는 경우가 흔하고, 지략을 써 적을 강하게 해 더 강한 적을 상대하도록 한다는 게 그만 자신이 너무 약해진다는 사실을 계산에 넣지 못한 경우도 있다. 고래로 지략은 산법이라고 한다. 나뭇가지들을 놓고 서로의 길고 짧음을 대보는 것이다. 여기서 나뭇가지들은 다양한 가능성을 상징한다. 나뭇가지가 많을수록 산법은 복잡해진다. 이 때 가지의 수가 모자라면 계산이 짧아지고, 가지의 장단점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계산을 틀리게 되는 것이다. 어려운 산법 가운데 하나가 남을 돕는 방법이다. 남을 괴롭히거나 공격하는 것보다 산법이 더 복잡하다. 전국책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있다. 제나라 이웃인 조나라가 강국인 위나라의 공격을 받았다. 위는 조의 수도인 한단을 포위하고 공격을 했다. 조가 이웃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제나라 대신들이 모여 논의를 시작했다. 관건은 구원을 보낼 것이냐,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화장을 하고, 남자는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건다." (士为知己者死,女为悦己者容:사위지기자사, 여위열기자용) 페미니스트가 보면 뭐라 한 마디 할 수도 있겠다. 남녀유별의 전통적 관념에서 한 대비일 뿐이다. 중국의 전국책에 나오는 말이다. 전통적 관념에서 생은 그 종류가 정해져 있다. 사는 선비로서, 자신의 의지를 다지고 실현하는 생을 사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전국책의 일구(一句), 저 한마디는 그런 선비가 생을 대면하는 자세를 말한다. 같은 전국책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나온다. 제나라의 이야기를 담은 제책(齊策)편에 실린 제나라를 강국으로 만든 재상 전영(田婴)의 고사다. 전영에게는 제모변이라는 식객이 있었다. 그는 독특하게 주변의 모두가 싫어하는 성격을 가졌다. 묘하게 오직 전영만 그가 재주가 있다고 믿고 아꼈다. 전영이 그를 아끼자 주변의 온갖 사람들이 전영에게 제모변의 험담을 했다. 전영의 편애에 식객 중 일부가 떠날 정도였다. 심지어 전영의 아들인 맹상군마저도 제모변에 대해 험담을 했다. 전영은 크게 노하여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을 다 없애고 우리 집이 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제모변을 싫어하는 자들에 대해 나
세상일은 선후가 있고, 본말이 있다. 모든 게 순서가 있어 그 순서를 다르게 하면 같은 구성이라도 다른 결과가 나온다. 선은 선이요, 후는 후다. 본은 본이요, 말은 말이라는 의미다. 본말이 뒤집히면 ‘바늘 허리에 실 매어 쓰는’ 꼴이 된다.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여도 옷을 꿰맬 수 없듯 어떤 일이든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 스스로 총명하다는 이들이 저지르는 실수가 바로 이런 실수다. 전국책 제책편에는 ‘해대어’라는 고사가 나온다. 제나라 왕에 의해 설(薛) 땅의 제후가 된 전영(田嬰)이 성곽을 높이 쌓아 지역 방비도 강화하고 자신의 위상도 높이려 했다. 곧 많은 지역민들이 반대를 했다. 전영의 계획으로 백성들의 고통이 가중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하지만 제후 전영은 이 같은 충언을 듣지 않았다. 부하에게 “객들을 더 이상 들여보내지 말라”고 명했다. 그러자 제나라의 한 사람이 찾아왔다. “내 딱 세 글자로 한마디만 할 터이니 제후를 만나도록 해주시오.” 그렇게 전영을 만난 이가 자신의 약속처럼 소리를 쳤다. "해海, 대어大魚!" 그러고는 다시 나가 버렸다. 놀란 전영이 소리쳤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말인가? 이것보다 더 할 말이 있을 텐데." 그때서야 객이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