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철시킬 능력이 있어야 옳다고 한다. 옳은 것도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킬 능력이 있어 옳은 것이라 한다. 그럼 진실로 옳아도 지킬 수 없다면 옳은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갈릴레오 사례가 있다. 그는 하늘의 진리를 발견했지만 무지한 인간들 앞에서 그 진실을 지킬 수 없었다. 그래서 굴복을 했고, 감췄다. 그럼 갈릴레오의 태도는 한자를 만든 선인들이 관점에서 어떻게 봐야 하는가? 진실은 정복되지 않는다. 강한 무지(無智)는 언제나 한때뿐이다. 진실은 정복되지 않으니 지지 않는다. 여기서 답은 시간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증명한다. 실제 시간이 지나 갈릴레오가 옳다는 것이 밝혀졌다. 무한한 하늘의 시간 속에 유한한 인간이 굳이 가타부타 하지 않아도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른 것이다. 그른 것은 자연스럽게 멸하게 되고, 옳은 것만 남는 게 하늘의 도리라는 게 한자 문화권의 생각이다. 바로사필귀정(事必歸正)의 도리다. 노자가 이야기한 자연의 도다. 자연이 정답이다. 그래서 자연의 결론은 너무나 명쾌하다. 옳은 것은 영원하다. 결국 영원히 살아남은 자들이 옳다. 도 밖에는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태어나 땅의 시간을
바르다는 것은 무엇일까? 바른 방향이란 무엇일까? 역사 이래 수많은 이들의 고민거리였다. 수많은 철학자, 현자들이 고민을 했고 답을 내놓았다. 한자를 만든 선인들이 역시 마찬가지다. 언제나 그렇듯 한자를 만든 선인들의 답은 참으로 인간적이고 짧고 명료하다. 갑골문자 바를 정(正) 자에 그 고민들이 담겨 있다. 갑골문자의 정 자는 발을 강조해 앞으로, 정면으로 한발 내딛는 모습을 추상화한 것이다. 정면이 어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 발아래 입 구(口) 자 모양이 있다. 중국 학자들은 이 입 구를 마을이라고 풀이한다. 어쨌든 앞으로 한 발을 내딛는 모양이 사람의 앞모습, 정면인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 외 몇 개 선으로 정면이라는 의미를 추상화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정 자는 수천 년을 살아남았다. 앞으로 보는 게 바른 것이다. 가장 본능적인 이야기다. "똑바로 보고 이야기 말해 봐!" 어려서 잘못을 한 뒤 변명을 하면 부모님은 자주 이렇게 꾸짖으셨다. 기자가 돼 출입했던 경찰서 조사실에서 이 말을 자주 들었다. 경찰들은 범죄 혐의자에게 고성으로 "똑바로 쳐다봐!"라고 소리쳤다.똑바로 본다는 것. 그것은 진실을 말하는 자세다. “하늘을
흐르는 물처럼 산다니? 결의를 다졌는데, 갑자기 우스운 생각이 든다. 본래 ‘물 같은 삶’은 보통 사람 모두가 싫어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도 한때 가장 싫어했던 말이 ‘물 같은 삶’이었다. “흐르는 물처럼 살리라.” 그럴 듯해보지만, 말을 바꿔 들어보면 무슨 의미인지 잘 안다. ‘나를 물로 보니?’ 분명히 화난 사람의 말이다. 본인이 물먹었다고 생각하면 기분 좋은 사람은 분명 하나도 없을 것이다.다른 말도 있다. ‘왜, 물먹고 사니?’ 역시 마찬가지다.정말 별로 말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은 말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물처럼 살고 싶다니. 어찌 우습지 않은가?그리 생각하니 물처럼 사는 게 그리 어렵지만 않구나 싶기도 하다. 물로 보이면 되고, 물먹고 살면 되는 것이다 싶다.그런데 또다시 그리 생각하고 나니, 아무리 생각해도 ‘물 같은 삶’이 쉬워 보이지 않는다. 물 같은 삶을 산다는 게 말이다. 정말 되돌아가 그토록 싫어하던 물로 보이고, 물을 먹고 그리 살아야 한다는 것인가?물처럼 사는 게 무색무취하게, 모양도 없이 그저 그렇게 자신을 담은 그릇에 맞춰 가며 사는 것인가? 그렇게 스스로 존엄을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이런 질문에 ‘물 같은
물은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임하기에 도에 가까운 것이다. 물의 성질에 대해 가장 많이 연구해 상선약수론을 정립한 이가 바로 노자다. 후대 많은 이들이 그가 정립한 명제를 설명하는 데 그쳤는데, 어떤 설명도 노자가 말한 것 이상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어떤 설명도 그저 부족할 뿐이다.노자는‘도덕경’에서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정리하면서 비유도 없이 간결하게 물의 성질을 설명하면서 물의 성질을 삶의 행동 지표로 삼을 것을 설파했다. “水善利万物而不爭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고 공을 다투지 않는다.” 참 간결하고 심플하다. 바로 덕을 쌓는 방법이다. "저 사람 여윳돈만 생기면 어려운 이들을 위해 봉사활동에 나서, 그런데 남들은 잘 몰라. 한 번도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까, 내가 우연히 그 현장을 봐서 알게 됐지."바로 누구나 듣고 칭찬할 수밖에 없는 칭찬 중 최고의 칭찬이다. 이런 사람을 덕이 있다 하지 어떤 사람을 덕이 있다 하랴. “處衆人之所惡, 幾於道물은 항상 낮은 곳에 임하기 때문에 도에 가깝다.” 물은 본래 높은 곳에서 맺힌다. 그래서 땅에 떨어져, 모이고 모여 저 아래 계곡을 채우고 강을 이뤄 더 낮은 바다로 가는 것이다. 바다는 이 땅의 가장
끊이지 않는 물은 세상 만물을 이롭게 한다. 그리고 항상 낮으로 곳에 임한다. 공을 이루면 물러설 줄 아는 게 수다. 끊임없는 물방울은 그렇게 내를 이루고 강을 이뤄 바다로 간다.그냥 가는 게 아니다. 물방울은 산속나무의 갈증을 다 채우고 흐르며, 샘은 숲 속 동물의 갈증을 모두 채우고 흐른다. 강의 달은 사람이 없었던 순간에도 있어,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난 인간을 비췄고, 지금도 강의 사람의 비춘다. 강물 역시 아주 오래된 어제 사슴의 갈증도 채웠고, 오늘의 사슴 갈증도 채운다. 내일도 변함없는 게 강물이다. “靑山依久在, 幾度夕陽紅?(청산의구재 기도석양홍;언제나 푸르른 저 산은, 얼마나 많은 석양을 겪었을까?)” 명나라 양신(揚愼)이 노래한 장강이다. '滾滾長江東逝水(곤곤장강동서수: 굽이굽이 장강은 동쪽으로 흐르는 물)이란 시의 한 구절이다. 강물의 끊임없는 흐름은 이렇게 사람을 의연하게 만든다. 변함없는 게 진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참 진(眞) 자를 통해 살펴봤었다. 양신의 시구절처럼 "수많은 영웅들은장강 물결을 따라 주변에 수많은 영웅들이 꽃처럼 피고 졌다".강물의 끊이지 않음은 또 묘한 운동의 법칙을 만든다. 중국이 아니라 일본의 한 소설에서 이
강은 끊이지 않아 바다에 이른다. 끊이지 않는 낙수는 결국 바위를 뚫는다. 물이 강한 것은 끊이지 않기때문이다. ‘상선약수’(上善若水)는 동양의 사상의 정수다. 동양에서 추구하는 삶의 최고 행동 강령이다. “물처럼 살아라!” 왜 물일까? 상선약수론에 따르면 물은 세상에 가장 약하지만, 가장 강하다. 가장 천하고 착하지만, 가장 고결하고 지고하다. 도대체 무엇이길래, 물은어떻게 이렇게 극적으로 상반된 두 가치가 동시에 담기게 됐을까?한자에서 그 생각의 단초를 찾을 수 있다.한자 물 수(水)는 누가 봐도 상형자다. 그런데 잠깐, 이 부분에서 쉽게 넘어가기 어려운 점이 있다. 상형자는 본래 모양을 본 딴 것을 말하는,상형자라니? 물이 모양이 있나?당연히 물은 모양이 없다.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이고, 세모난 그릇에 담으면 세모다. 색도 없다. 파란색 그릇에 담으면 파랗고, 노란색 그릇에 담으면 노랗다.동양의 선인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물 수(水)를 만들었을까? 물의 움직임이었다.선인들이 본 것은 물의 성질이었던 것이다. 옛 글자일수록 그 특성이 잘 드러난다. 물 수와 같이 물의 흐름을 딴 글자가 내 천(川)다. 물 수가 도도한 강물을
칭송받을 행위를 하고 그것을 모두에게 인정받는 모양이 바로 한자 덕(德) 자다. 가장 칭송받는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도(道)에 맞춰 사는 것이다. 결국 도가 흥한 게 덕인 것이다. 덕이 복잡하지만 단순한 이유가 그 글자 속에 들어있다. 덕은 남에게칭송받을 일을 한 '나'다.그래서 덕 자는 일찍이 은혜라는 뜻으로 쓰였다.시경에"무언부수,무덕불보"(無言不讐,無德不報)라 했다.말하지 않으면 원한 맺을 일이 없고, 덕이 없으면 보답을 받을 일이 없다는 의미다. 쉽게 함부로 한 말은 원한을 사고, 공덕을 쌓으면 보답을 받는다는 것이다. 말과 덕은 이처럼 상대적인 개념이다. 덕이란 사거리를 걷는 행위, 실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흔히 박덕(薄德)이 무슨 의민지 잘 알게 한다.행동은 적고 말만 많은 것이다."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했지만, 그게 한 번인 경우이지 매번 말로만 그친다면 어떨까? 모두가 그 답을 잘 안다. 묘하게 도와 덕은 다른 이들에게 박수받는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아마 그래서 도와 덕을 붙여 '도덕'이라 하는 것은 아닐까? 두 자를 붙여 쓰면 두 가지 동영상이 잇따라 연상된다. 도는 제사장이 신에게 승리를 고하는 제사를 지내러 가는 모습,
도(道)와 항상 같이 가는 한자가 있다. 바로 덕(德)이다. 흔히 도와 덕을 합쳐 도덕이라고 한다. 도가 주변의 박수를 받으며 가는 승리의 길을 글자로 만든 것이라면 덕은 무엇일까? 고래로 우리 동양에서 도(道) 만큼 중요한 게 덕(德)이다. 고관대작은 물론, 시정잡배도 덕을 쌓는 일의 중요하게 여겼다. 공자는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 덕이 있으면 반드시 이웃이 있다)라 덕자(德者)를 칭송했다. 누구든 "덕이 없다"는 평은 가장 치명적인 비난이었다.어찌 보면 도 보다 더 일반적인 게 덕이다. 동양 유구한 역사 속에 덕은 종교, 사상, 신분 등의 차이를 넘어 중요시됐다. 반면 그래서 도보다도 어려운 게 덕이다. 덕이 무엇인가? 우리 네이버 사전에는 '크다', '일을 차리어 벌이다', '도와줘 혜택을 받게 하다' 등의 뜻으로 나온다. 지난 2013년 개정된 신화 한어사전 제6판에서는 1) 도덕, 품행, 정치품덕 2)심의(心意) 3)은혜 4)이름 성 등이라 설명한다. 참 모호하다. 그럼 덕이 그냥 남을 돕는 일인가? 사실 여기까지만 해도 쉽지 않은데, 소위 맹자의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덕'(四德)에 들어가면 갈수록 이해가 어려운 개념이 되고 만다.
“도는 모두가 절로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승리의 길이요, 선언이다. 크고 작은 구분이 없다.” 도를 따르지 않는 것은 소멸된다. 그래서 도는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을 관통하는 도리다. 살아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지금 이 순간까지 도를 어기지 않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도에 머물 수 있는가?전국책친책일(戰國策秦策一)에"도덕부후자,불가이사민(道德不厚者,不可以使民;도덕이두텁지못하면백성이따르지않는다.)고했다.반대로두터우면모두가따르게되는게도인것이다. 도에 머무는지는 스스로 자문을 해보면 안다. “내 길은 승리의 길인가? 적이 두려워하고 내 편들이 환호하는 길인가?” 도에 머물면 많은 이들이 보고 알아 준다. 그래서'내가도에들었는가'에대한또하나의측정포인트가 어떻게 기억되느냐는 것이다. 선인들이 역사에 기록되는 걸 두려워한 이유다.당장노자,공자,두성인만해도인류모두에게시대를뛰어넘어기억된다.그들의도가그만큼위대했다는의미일것이다. 특히노자는끝까지이름을남기지않았지만, 모두가 그를 노자라부르며 기억한다. 공자는 이름도 자자손손 남겼다.노자같은 이들은 어쩌면 한 둘이 아니다. 이름 없이책의 한 귀퉁이에 그 흔적을 남긴 이들도 적지 않다. 논어에서
"도는 ‘도’(道)다", "도는 승리의 길이다." 다만 그 속에 담긴 지혜를 어떻게 풀어내 체득하느냐는 것은 마뜩치 않은개인적인 문제일 뿐이다. 갑골문의 도의 자형이 길을 간다는 뜻이지만, 일찌기 그 길은 추상적인 의미로 문장에서 쓰이기 시작했다. 당장 노자부터 도를 길이라는 뜻 이상의 의미로 쓰고 있다. 노자 42장에서 "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도에서 하나가 나오고, 하나에서 둘이, 둘에서 셋이, 셋에서 만물이 나온다)고 했다. 공자도 마찬가지다. 논어에서 "오도 일이관지"(吾道 一以貫之;내 학설은 일관된다)며 도를 도리, 학설의 의미로 썼다. 그러다 보니 길이라는 의미의 로(路)가 필요해진 것이다. 역시 노자의 말이 맞았다. 말이 나와 오해가 생기고, 그 오해를 풀기 위해 다시 말이 나온 것이다. 어쨌든 왜 도는 이렇게 남다른 의미를 갖게 됐을까? 도 자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한 장의 스냅사진 같다. 긴 망토를 드린 제사장이 양손에 사람의 머리를 들고 가는 모습을 사진을 찰칵 찍은 자가 바로 길 도자다. 머리 수에 책받침 변이 그 모습을 잘 보여준다. 상상력을 동원하면 재미있는 장면이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