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을 해보자. 갑자기 지구에 대형 위성이 떨어졌다. 혹 대형 핵폭발이 있었다. 대지가 요동을 하고, 전 화산이 순간 폭발을 한다. 화산재가 순식간에 하늘을 덮는다. 해가 가려지고, 그렇게 세상이파괴된다. 문명은 순식간에 종말을 맞았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흘렀다. 저주받은 지구에 다시 생명이 돋기 시작했다. 하늘이 열렸고, 비가 내려 땅 위 분진이 어디론가 씻겨 내려갔다. 산과 바다가 다시 푸르게 됐고, 동물과 물고기들이 넘쳤다. 위대한 자연이 스스로 정화하고 치유해 되살아 난 것이다. 그동안 숨어서만 살던 인류도 다시 땅으로 나왔다. 그런데 저 많은 풀 가운데 인류는 뭘 먹을 수 있을까? 이 순간 정말 누군가 한자를 기억했다면 걱정이 없다. 한자는 수십 기가의 인류 문화 코드 저장 장치다. 동양 문명의 비밀을 담은열쇠들이다. 벼 화禾를 알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게 된다. 인류가 모든 기억을 상실해도 이 한자를 아는 이들은 쉽게 먹을 수 있는 벼와 보리, 수수 등의곡식을 찾아낼 수 있다. 갑골자 벼 화자에 그 비밀이 담겨 있다. 갑골자 벼 화는 누가 봐도 식물의 모양을 그대로 본뜬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 벼 화 자처럼 생긴 곡식은 모두 우리가 즐겨 찾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의 나를 가장 오래 기억해 주는 이들이 가족이다.© soulsaperture, 출처 Unsplash중국 속담에 "가추부능외양"(家醜不能外揚; 가족 내 부끄러운 일이나 잘못은 밖에 알리지 않는다.)했다. 우리 속담에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라고 했다. 가족이어서 그런 것이다. 내가 그동안 어떻게 행동해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가장 잘 아는 이들이 내 가족이기에게 가족이라면 그래야 하는 것이다. 가족은 내가 가장 오래 기억하는 이들이다. 반대로 나를 가장 오래 기억해주는 이들이기도 하다. 내가 이 세상을 다녀간 그 이유 나 가고 기억하는 이 나 슬픔까지도 사랑했다 말해주길조수미 씨의 고운 목소리로 부른 명성황후 ost의 가사다. 이 세상을 살다 가는 수많은 이들 가운데 타자에게 기억되는 이 몇이나 될까? 또 시대를 넘어 기억되는 이 몇이나 될까? 이 문제는 한 사람의 존재 가치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기도 하다. 과연 왜 살다 가는가? 최소한 누가 나를 기억해주는가? 동양에서는 이 노래의 질문에 대한 답을 가족으로 풀어낸다. 어머니, 아버지, 님들이 살다간 이유 제가 기억합니다. 낳으며, 키우며 보여주신 그 정을 제가 기억합니다. 제 아
가족의 정은 사회 속 꿀과 같다. 사회를 달고 따뜻하게 만든다.© mero_dnt, 출처 Unsplash꿀은 만든 꽃마다 그 맛이 다르고 효능이 다르듯, 사회 속 가정마다 만든 정情도 느낌이 다르고 효능이 다르다. 다르기 때문에 모두가 이 사회 꼭 필요한 존재가 된다. 동양의 사상은 현존에 대한 관찰이지, 현존의 지향이 아니다. 새롭게 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본래 그대로 제대로 있도록 해 얻는 것이다. 서구의 현대화가 기존의 가족이란 개념 허물고, 새롭게 하고 있다. 물론 좋자고 하는 짓이다. 하지만 자연 그 자체가 좋다는 것을 이제서야 아는 게 우리 수준이다. 무위자연无为自然이라는 도리를 유위자연有为自然으로 자연을 파괴한 뒤 안다. 가족은 자연의 생산물이다. 사람이 만들었지만, 자연 속에서 자연히 만들어진 것이다. 마치 벌이 살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꿀을 생산하듯 말이다. 물론 현대 사회 속에 가족이란 개념의 왜곡이 생기듯 시대 속에 동양사 각 장마다 왜곡이 있었다. 그런 왜곡은 모계 혈족 사회에서 씨족 사회로, 부족사회로 성장하면서 보이는 집 가 자의 변연 속에서도 나타난다. 가족에 대한 대한 가장의 절대적 권한과 소유, 가족 구성원의 가장에 대한 절대적
© lumapienteml, 출처 Unsplash가족이 경제 사회의 최소 단위라는 것은 묘하게 서양의 사고와 닮아있다. 영어 'Family'의 어원을 따져 보면, 그 이유를 안다. 묘하게 인류 각 언어들은 그 어원, 근본적 의미에서 상통하는 면이 있다. 영어 Family는 원래 하인이나 노예를 뜻하는 famulus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후 한 집안을 의미하는 라틴어 familia, 중세 영어 familie를 거쳐 지금의 Family가 됐다는 것이다. 돼지와 노예라니, 묘한 공통점이 느껴진다. 모두 재력, 생산력의 기본을 의미하는 것이다. 가족은 그렇게 한 생산 단위로 부양되는 한 무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 집에 살면서 생산한 것을 함께 나누는 단위가 바로 집의 개념인 것이다. 자연스럽게 족(族)이란 한자에 왜 화살이 포함돼 있는지 알게 된다. 생산된 물건을 같이 지키는 이들이라는 의미다. 먹을 것을 같이 만들고, 지키는 무리가 바로 가족인 것이다. 가족은 혈연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남과 남이 만나 자식을 낳아 한 가족 단위를 이룬다. 그 가족은 함께 먹을 만들고, 생존을 위해 서로 무한하게 의지한다. 가족이어서 무한한 사랑이 가능하고, 무한한 책임이
가족은 타인의 시작이요, 혈연의 시작이다. 사회를 만들어가는 세포다. © pixel2013, 출처 Pixabay 가끔 한자를 만든 선인들은 참 이성적이다 싶다. 어쩌면 그렇게 냉혹하게 불필요한 개념의 가지를 쳐내고, 단순화 추상화를 할 수 있을까 싶다. 집 가 자 역시 마찬가지다. 갑골문자를 만든 선인들에게 가족은 어떤 개념이었을까? 갑골문 집 가 자 자형만 봐도 그 이유는 대단히 명확하다. 누가 봐도 지붕 아래 동물, 돼지가 있는 모양이다. 어떻게 돼지인 것을 알까? 여기에 재미있는 팁이 하나 있다. 갑골문자는 몇 개의 선만으로도 동물들을 정확하기 구분해 냈다. 예컨대 코끼리, 토끼, 호랑이, 거북이 등은 세 살배기 영아가 봐도 코끼리요, 토끼요, 거북이다. 또 새도 그렇다. 그런데 개와 돼지는 어떻게 구분을 했을까? 물론 오늘날에 와서는 쉽게 구분되는 자도 있다. 돼지 시(豕) 자와 개 견(犬) 자이다. 그런데 과거 갑골문자 시절 둘은 어떻게 구분했을까? 모두 네발 달린 집 짐승이다. 꼬리가 비밀이다. 갑골사에서 돼지는 꼬리가 내려가고, 개는 꼬리를 올려 표시했다. '꼬리 내려간 개도 있는데?' 하는 이도 있겠지만, 그 건 계란 속에 뼈를 찾는 짓
중국인을 보고 핏줄에서 돈 냄새가 난다고 한다. 좋은 뜻도 있고, 나쁜 뜻도 있다. 그런데 사실 중국어 한자 가족과 식구에는 본래 경제적 의미가 크다는 사실은 놀랍다. © jenn_azraimages, 출처 Unsplash아이가 '당신은 나의 태양'(You are my sunshine)이란 노래를 좋아한다. "당신의 나의 햇볕, 나의 유일한 햇볕. .." 불과 10년 전만 해도 이 노래를 들으면 사랑하는 연인, 아내가 생각났겠지만 이젠 아이 얼굴이 떠오른다. 햇빛 쏟아지는 지붕 아래 잔디 위에서 아이를 안고 딩구는 모습만큼 정겨운 정경이 있을까? 가뭄에 콩 나듯 가끔 아이와 외출을 하지만 그때마다 이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하고 바라기가 한두 번이 아니다. 말 그대로 아이는 나의 유일한 햇볕이다. 아내와 아이, 가족이란 게 그렇다. 생각만 해도 절로 사람을 포근하게 만든다. 내게 있어 집이란 별다른 게 아니다. 가족이 있는 곳이 바로 집이다. 한 집에 사는 족(族)이 바로 가족이다. 그러고 보니 가족이란 게 참 묘하다. 혈연관계와 비혈연 관계의 묘한 경계에서 둘을 이어준다. 최근 2대의 가족사를 보면, 어머니와 아버지의 가족에서 내가 나왔고, 나와 아내가 가
민은 복수인가? 단수인가? 개인주의인가? 전체주의인가? © suju, 출처 Pixabay1900년 대 초 일본은 아시아를 대표해 서구 문물을 받아들였다. 특히 서구의 책을 번역하면서 다양한 새로운 개념들을 중국과 우리나라 등 한자 문화권으로 들여온다. 경제(經濟), 사회(社會), 자유(自由), 연애(戀愛) 같은 단어가 그때 생겼다. 연애란 단어가 없으면 연애를 못할까?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그랬다. 단어가 없으면 그런 행동도 없는 것이다. 돌이켜 당대의 동양 사회를 보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결혼은 부모가 정해주는 이와 했다. 운이 좋아 서로 사랑하게 되면 좋은 것이고, 서로 사랑을 하지 않아도 남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첩을 들이면 됐기 때문이다. 소위 정실부인은 집안과 집안끼리 하는 것이고, 첩실은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와 하는 것이었던 셈이다. 그런 사회에서 무슨 연애가 있을까? 어찌 보면 당시 일본인들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자유연애를 꿈도 꾸지 못했을지 모른다. 물론 연애라는 단어가 만들어지기 전에 연(戀)과 애(愛)라는 단어는 쓰였다. 연은 기생과 노는 좀 더 육감(?) 적인 단어였고 애는 애국(愛國)처럼 좀 더 숭고(?) 한
백성 민은 노동계층이었다. 다스림의 대상이었지, 다스림의 주체가 아니었다. © Couleur, 출처 Pixabay 우리 동양의 민주주의는 애초부터 철인정치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철인은 스스로 나기도 하지만, 백성이 믿고 따를 때 만들어진다. 그런 믿음을 쌓아가는 게 우리 동양에서 '덕치'요, '선정'이었다. 이런 점에서 동양의 민주는 서양의 ‘democracy’와 차이가 있다. democracy를 ‘민주주의(民主主義)’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두 단어 어근의 의미는 사뭇 다르다. 영어의 ‘democracy’는 민중을 뜻하는 ‘demos’와 지배를 뜻하는 ‘kratos’가 결합된 단어다. 즉 대중, 다수가 지배하는 사회라는 현대적 의미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살폈듯 동양의 ‘민주’는 그렇지 않다. 옛 중국에서 ‘민주’는 ‘민의 주인’, 즉 군주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동양의 역사에서 백성 민은 스스로 군주를 저버리는 게 유일한 대안이었다. 산속에서 숨어 살거나, 산 속에서 뭉쳐 도적이 될 뿐이었다. 앞서 보았듯 백성 민은 노동자를 의미했다. 노동하지 않는 민은 더이상 민이 아니었다. 화적, 중국에서는 流氓liúmáng이라 불렸다. 결국 동양
시력을 잃은 노예, 백성 민은 노동이 무기였다. 점차 민은 직업을 가진 노동력을 의미하게 됐고, 귀족들은 민의 주인 됨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자각하게 됐다. 그렇게 민은 조금씩 역사의 굴곡을 기어 나왔다. © CoolPubilcDomains, 출처OGQ 학자들은 ‘민’이 백성이란 의미를 갖게 된 것을 주(周) 나라 때로 보고 있다.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그 의미가 확고해졌다는 게 학자들의 견해다. 주나라 이전의 풍속을 노래한 시경 소아(小雅)의 ‘어떤 풀이 시들지 않느냐(何草不黃)’라는 시에 "부역 간 장부들만 불쌍하네, 그들만 홀로 백성(民)이 아니란 말인가 (哀我征夫, 獨爲匪民:애아정부, 독위비민)"라고 노래했다. 즉 부역 간 장부가 ‘민’의 대접을 못 받고 있다고 한탄한 것이다. 노예가 아니라, 이제 대접을 받는 백성이 된 것이다. 정말 시력을 잃은 노예에서 상상도 못하던 변화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민의 의미는 아직 아니다. 이때만 해도 지금 흔히 쓰는 '민주'民主라는 말은 그 의미가 달랐다. 춘추전국시대 민주는 민이 주인됨이 아니라, 민의 주인 즉 군주를 의미했다. 주나라 이전 왕조 역사를 다룬 상서(尙書)에서 ‘민주’ 란 단어가 군주란 뜻이었
참 슬픈 역사의 주인공이 민民, 백성이다. 노예에서 직업을 가진 사람을 의미했고, 이제 역사의 주인이 됐다. © ajaegers, 출처 Unsplash ‘민주’ 뜨거웠던 청춘 대학시절 이 말을 듣고 가슴 띄지 않았던 이 있으랴. 특히 한국 민주화 시대 80년대 대학시절을 보낸 이들이라면 예외가 없을 듯싶다. 뛰는 가슴 안고 살아가는 청춘들의 열망이었다. 민주, 쉽게 '백성이 주인 된다'라는 의미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어려웠고, 아직도 진정한 민주가 완성됐는지, 의문부호가 찍힌다. 사실 민주라는 말이 어떻게 연변 했는지 알면 그 어려운 이유를 새롭게 체감할 수 있다. 갑골자에서 민자는 노예를 의미하는 자였다. 갑골자에서 민자는 사람의 눈을 날카로운 침으로 찌르는 모양이다. 눈이 멀어 피가 흘러내리는 모습이 바로 백성 민이다. 피눈물을 흘리는 게 백성 민이다. 참 무서운 글자다. 눈을 찌른 이유는 시력을 빼앗기 위해서다. 실명이 아니고, 눈이 잘 보이지 않도록 한 것이다. 옛날 이웃 마을과 전쟁을 해 부락민을 노예로 잡으면 했던 일이다. 노예들이 일은 하지만, 전투력을 상실하도록 하기 위해 한 조치다. 시력을 상실하면 스스로 구속되길 자청한다. 주변에 의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