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 튀며 살아라, 삶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 욕망 없는 삶이란 없다. 욕망하지 않는 것은 죽음뿐이다. 심지어 욕망하지 않는 삶조차 욕망해야 얻을 수 있다.”
본래 혀 설舌자도 생물에 물기에 묻은 모양이다. 여기에 다시 삼 수 변을 붙인 글자가 바로 활기찰 활活 자다. 침이 튀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 강조했던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입에 침이 도는 것이다. 맛있는 것을 보면 입에 침이 돌아야 건강한 것이다. 침이 안 돌면 입맛을 잃은 것이고, 몸 어딘가 불편하다는 징조다.
실제 한방에서 침은 건강의 이상을 알리는 주요한 신호다. 중국 저우춘차이(周春材)가 지은 한의방약에 따르면 "혀 설(舌)은 집(舍)"이라며 "심장의 싹이며 심장의 기운이 머무는 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역시 혀 설의 갑골문에 대한 설명과 일치한다. 혀 설은 식물의 싹이 자라며 물기를 머물고 있는 모습이다.
심장의 기운이 모은 곳이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이 있다. 침이 많이 고인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 한방에서 침이 많이 고이면 위에 열이 있다는 의미이고 식욕이 과해지고 방귀 냄새도 독해진다고 한다.
반대로 침이 마르는 지나친 갈증 역시 당뇨병 등 각종 질병의 초기 증세이기도 하다.
묘하게 중용의 묘와 닿아있다. 입안의 침은 많아도 적어도 문제인 것이다. 중용의 묘, 바로 여기에 우리 한자의 가르침이 빛난다.
입안의 침은 건강함의 상징이면서 욕망의 ‘메타포’다. 무엇인가 먹고 싶다. 바로 모든 욕망의 시작이다. 한자의 세계는 욕망은 가장 인간적인 것이다. 살아 있다는 증거다.
한자의 세계에서는 그래서 우리에게 욕망에 따르라고 한다. 다만 입안의 침처럼 욕망이 적어도 문제고 많아도 문제라고 가르친다.
어쩌면 침을 일정량으로 유지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숙명인 지도 모른다. 침을 흘려도 적당히, 대상을 가려가며 흘려야 한다.
그렇다고 어찌 남녀 모두가 아름답고 멋진 이성을 보고 눈길 한번 안 줄 수 있을까? 분명 우리는 욕망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욕망 없는 삶이란 없다. 욕망하지 않는 것은 죽음뿐이다. 심지어 욕망하지 않는 삶조차 욕망해야 얻을 수 있다. 다만 침이 항상 일정 수준을 유지하도록 해야 하듯 욕망 역시 중용의 묘로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몸과 마음 모두가 병들지 않고 건강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