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4월 1일 류샤오치에게는 ‘사면홍기’의 날이었다. 중국 전국 신문에 치번위가 쓴 ‘애국주의냐, 매국주의냐’라는 제목의 긴 장문의 평론이 게재된다. 내용은 청궁비사라는 영화 평론을 빗댄 류샤오치 비판 문장이었다. 문장은 류샤오치가 청궁비사를 애국주의 영화라 평했다면서 류샤오치의 8대 죄악들을 열거했다. 류샤오치는 내용을 읽고 신문을 구겨서 바닥에 던진다. “아니 이 전부가 거짓말이다. 내가 언제 ‘청궁비사’ 영화를 애국주의 영화라 평한 적이 있었던가? 내가 하지도 않은 말들을 했다고 하다니, 이는 정말 무고다. 당내 투쟁이 언제부터 이렇게 하류에 머물렀던가?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용어는 내가 7차 전인대에서 처음 언급한 것이다. 그 뒤 누구보다 마오쩌둥 사상의 확산에 기여해왔다. 이제와서 내가...” 류샤오치는 억울했다. “내 발언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면, 누군가는 나를 변호해야 한다. 당 중앙 간부가 변호를 해야 하고, 인민들이 변호를 해줘야 한다. 지금이야 말로 내게 이 나라, 이 인민, 이 당의 공정한 몇마디가 필요한 시점이다.” 하지만 현실은 류샤오치의 소망과 달랐다. 1967년 4월 6일 저녁 홍위병 조반파가 류샤오치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제발 아내만은 건들지 마오 류샤오치의 비판이 거세지던 1966년 12월 18일 결국 왕광메이를 조사하는 특별 조사부가 신설된다. 한국으로 치면 ‘왕광메이 특검’이 시작된 것이다. 왕광메이는 류샤오치의 6번째 부인이다. 중국이 나은 학자요, 정치가였다. 1948년 류사오치와 결혼해 1969년 사별하기 전까지 류사오치와 1남3녀를 두고 살았다. 공산 중국 건국 초기에는 마오쩌둥도 아끼던 여성 인재로 꼽힌다. 무엇보다 일찍이 미국 유학을 영어를 잘했다. 공산당 활동도 미국과 군사 협상에서 공산당측 통역을 맡으면서 이뤄졌다. 그의 영어 실력을 마오쩌둥도 감탄했을 정도다. 오죽했으면 왕광메이를 아끼는 마오쩌둥에 마오의 부인이 장칭이 질투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을까. 문제는 바로 이 점이다. 장칭은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4인방 중 한 명이다. 당대 중국 최고 권력인 마오쩌둥의 아내였다. 왕광메이는 통역 과정에서 미국에 간첩노릇을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바로 이 혐의에 대한 조사가 시작된 것이다. 물론 이 조사의 끝에는 류샤오치가 있었다. 왕광메이는 1967년 1월 6일 돌연 중학교를 다니던 딸이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전화를 받는다. 놀란 왕광메
문화대혁명의 불길은 타오르고 “제 자아비판은 총 3개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 1966년 10월 23일 중앙공작회의에서 류샤오치의 발언이다. 이날 류샤오치는 마오쩌둥이 지시한 그대로의 자아비판 검토서를 제출한다. 류샤오치의 검토서는 그의 생 전체에 대한 비판이 담긴 것이었다. 류샤오치는 먼저 마오쩌둥과 갈등 발생 직후 문화대혁명이 발생한 50여일의 자신의 행동에 대해 자아비판을 한다. “무산계급의 문화대혁명 발발 직후 저의 잘못은 노선의 방향성의 문제입니다. 이 잘못은 전적으로 제게 있습니다.” 두 번째로 류샤오치는 이 같은 노선의 선택의 문제가 자신의 오랜 잘못한 생각에서 나왔다고 자아비판을 한다. “두 번째 부분은 제 오랜 활동 속에 원칙과 노선에 대한 역사적 잘못에 대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난 1946년 동북전선에서 임표에 대한 지도가 부족했고, 지난 1949년 톈진에서 행한 연설에는 우경화 사상의 깃들어 있었습니다. 1962년에는 우경화의 잘못이 드러났고, 1964년에는 형식만 좌이며 실제로는 우인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마지막으로 류샤오치는 이 같은 생에 걸친 우경화에 잘못에 대한 원인으로 결국 충분치 못한 무산계급에 대한 학습, 마오쩌둥
류사오치의 몰락을 그렇게 빠르게 찾아왔다. 류샤오치가 마오쩌둥의 발언을 자르고 자신의 주장을 펼쳤을 때 이미 몰락의 씨앗을 심어졌고,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을 촉발했을 때 몰락을 그렇게 우후죽순처럼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1966년 8월 1일 중국 공산당 제 8기 11중전회, 바로 류샤오치의 몰락의 서막이 열린 회의다. 이 회의에서 류샤오치 당서열이 급전직하했다. 무엇보다 마오쩌둥의 후계자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마오쩌둥은 이 전 공식석상에서 류샤오치를 자신의 후계자임을 공언하곤 했다. 하지만 제 8기 11중전회를 통해 류샤오치는 더 이상 마오쩌둥의 후계자가 아니었다. 새롭게 등장한 이가 바로 린뱌오였다. 이 같은 변화는 류샤오치에게는 치명적인 충격이었다. 본래 말수가 적었던 류샤오치는 더욱 더 말수가 줄었다. 하지만 그래도 류샤오치는 이제 막 성립한 신 공산 중국의 국가 주석이었다. 해야 할 일이 있었고, 그 일은 주석으로서 꼭 해야할 일들이었다. 1966년 10월까지 류샤오치는 자신의 우경화 노선을 자아비판하는 보고서를 준비한다. 10월 가을은 베이징이 가장 아름다운 달이기도 하다. 그런 계절 마오쩌둥은 인민대회당에서 중앙공작회의 개최를 예고하고
‘문화대혁명’ 마오쩌둥의 선택이었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가 자칫 공산당 노선의 변화를 예고할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마오쩌둥이 선택이다. ‘전쟁의 신’이라 불릴 정도로 전장의 미묘한 변화에 민감하고 가장 유효적절하게 반응해 생존을 해온 마오쩌둥의 본능적 선택이었다. 중국 공산당 사료에 따르면 마오쩌둥이 당시 위기의식을 느낀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바로 류샤오치였다. 류샤오치는 자신이 믿고 대외적으로 후계자를 사실상 확정해 놓은 상태인데, 그런 류샤오치가 마오쩌둥이 자신과 당 내 노선을 달리한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특히 당 중앙공작 회의에서 류샤오치는 새로운 청렴운동을 통해 당내 불순한 무리를 솎아 내려는 마오쩌둥의 생각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심지어 마오쩌둥의 말을 중간에 끊고 청렴운동은 말 그대로 경제적 관점에서만 다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또 이 회의에 마오쩌둥이 공산당 내 업무처리 능력을 인정한 덩샤오핑이 류샤오치와 한 부류였다. 심지어 좋은 의도를 가장(?)한 채 - 적어도 마오쩌둥의 그리 생각했을 수 있다고 당 사료들은 당대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덩샤오핑은 “감기 몸살로 몸도 불편하니, 회의 참석을 하지 않으면 어떠냐?”고 마오
‘산치카이’(三七開) 중국에서 하나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전체적인 공을 논할 때 흔히 쓰이는 방식이다. 3푼 정도의 잘못은 큰 공을 세우는 데 어쩔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덩샤오핑의 마오쩌둥의 평가가 그랬다. 문화대혁명이라는 3푼의 잘못이 있지만, 인민들의 중국 국가를 세운 공이 7푼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같은 평가 방식은 중국의 전통적인 방식이다. 대세를 흔들지 못하는 비율의 대표 3을 통해 나온 개념이 ‘천하 3분지계’다. 누구도 천하의 주인이 되지 못하도록 해서 천하의 안정을 찾자는 것이다. 하지만 류샤오치는 7보다 중요한 3을 이야기한다.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잘못이 있다는 것이다. 류샤오치는 이 논리로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의 폐해를 언급한다. 바로 1962년 1월 25일부터 27일까지 열렸던 ‘칠천인대회’가 그 발언 장소다. 류샤오치는 현장 경험을 통해 일부 지역에서 보이는 대약진 운동의 폐해는 전체의 공을 뒤집을 정도의 잘못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재해는 하늘의 가뭄이 3푼이면, 7푼은 인재다. 경험부족이 큰 원인이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당 간부들이 자만했고 오만했다. 실사구시의 정신에 위배된 것이다” 류샤오치는 그러면서 펑더화이의
1962년 한 사건은 마오쩌둥의 마음에 류샤오치에 대한 의심의 싹을 키운다. 그 싹이 자라서 마오쩌둥의 한 때 ‘나의 친밀한 전우’였던 류사오치는 일순간에 ‘반동’, ‘배반자’로 내몰린다. 그 것은 돌이켜보면 류샤오치의 변치 않는 한 가지 마음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바로 인민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사실 정말 많은 초기 중국 공산당 멤버들은 한 가지 목적으로 공산주의를 선택했다. 미래 중국을 일으킬 사상은 ‘공산주의’여야 한다. 공산주의는 노동자들이 세상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들에게 공산주의는 변증법적 역사발전에서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세상은 왕권과 교권의 싸움에서 귀족들과 연맹한 왕권이 교권을 눌렀고, 다시 왕권은 커져가는 귀족들의 권력을 젠틀맨, 소위 자본을 일궈낸 부르주아지 눌렀다. 부르주와의 자본은 사실 노동자들의 노동에서 나오는 것인데, 노동자를 착취해 이익을 독식한 자본가들이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바로 노동자들이 스스로 다스리는 세상, 공산혁명이 일궈내는 세상이었다. 서구 유럽의 발전에서 노동자들은 중국에서 농민을 포함한 세력으로 변해 있었다. 산업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중국에는 지주들의 착취를 당하는 농노와 소
달이 차고 기울 듯...류샤오치와 마오쩌둥의 가까웠다 멀어진 행보 류샤오치는 그렇게 중국 공산당 정치무대에서 강제로 끌어내려졌다. 중국 공산당사에 가장 기이한 회의로 꼽히는 지난 1968년 10월 13일 열린 중국 공산당 제 8기 중앙위원회 12차 전체회의는 류샤오치의 사형 선고를 내리는 회의였다. 마오쩌둥의 주도에 단 한 명을 빼고는 그 누구도 반발을 하지 못한 회의였다. 하지만 본래 마오쩌둥과 류샤오치의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둘을 가장 가까운 전우였다. 지난 1922년 마오쩌둥과 류샤오치는 안위안루 탄광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특히 둘은 왕밍의 좌경 교조주의 통치 시절 우파로 몰리는 고초를 함께 치르기도 했다. 무엇보다 중국 공산당의 무력 투쟁 노선에 대대적인 변화를 초래하는 쭌의회의에서 류샤오치는 마오쩌둥의 편을 들어 마오가 공산당의 중심인물이 되도록 힘쓴 공이 있다. 좌경 교조주의에 맞서 류샤오치와 마오쩌둥은 생사를 함께한 동지였던 것이다. 류샤오치는 이 때 ‘공산당원 수양을 논하다’, ‘당내 투쟁을 논하다’ 등의 저작을 내놓으며 공산당의 좌경 교조주의를 비판했다. 마오쩌둥은 이런 류샤오치를 인정했다. 한 번은 보이보에게 마오쩌둥이 류샤오치에
1. 중국 현대사에 가장 이상한 당중앙 전체회의...운명의 제8기 12중전회 1968년 10월 13일 중국 베이징에서는 열린 중국 공산당 제 8기 중앙위원회 12차 전체회의는 중국 건국 이래 가장 독특한 회의로 꼽힌다. 전체 인원의 반수도 참석하지 못한 역대 가장 적은 수의 중앙위원, 후보위원들의 회의였기 때문이다. 당대 12중전회에 참석 대상인 중국 공산당 제 8기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수는 총 87명이었다. 본래 97명이었으나 10명이 사망했다. 후보위원 수는 98명이었다. 그런데 8기 12중전회 참석 중앙위원수는 40명, 후보위원은 더 적은 19명에 불과했다. 어찌 보면 초라할 정도의 회의였다. 하지만 이 회의는 중국 현대사에 가장 중요한, 어쩌면 가장 불행한 정치적 결정을 하는 회의였다. 중국 중앙위원회 위원과 후보위원들은 이 회의에서 자신들 손으로 뽑았던 국가주석인 류샤오치(1898. 11. 24~1969. 11. 12)에 대한 탄핵을 의결한다. 정족수도 못채운 이 회의에서 중국 현대사의 가장 불행한 사건이 결정 되는 것이다. 류샤오치가 국가 주석이 된 사연을 알면, 무슨 말인지 안다. 먼저 중국 1대 주석인 마오쩌둥이 국가주석직을 내려놓는 원인을 알
저우언라이(周恩来)를 향한 장칭(江青)의 공격은 집요했다. 저우언라이는 겨우 피할 수 있었지만, 그의 비서들은 줄줄이 낙마를 해야 했다. 첫 공격에 쓰러진 인물은 쉬밍(许明)이었다. 쉬밍은 1919년생이다. 본래 이름은 주위쥔(朱玉筠), 주핑(竹苹)이란 이름을 쓰기도 했다. 1936년 공산당에 가입한 뒤 주로 저우언라이의 비서를 맡아왔다. 그녀는 성격이 활달하고 입바른 소리를 잘했다. 평소 모두가 좋아하는 밝은 성격이었지만, 모든 게 뒤바뀐 '문화대혁명'의 시기 바로 그 성격 때문에 장칭 일파의 분노를 사 사지로 몰리고 만다. 둘의 악연은 영화 '우쉰좐(武训传)'에서 시작된다. 문화대혁명 발발 직전 당시 장칭은 당 선전부 영화처 처장 직을 맡고 있었다. 중국의 모든 영화 등을 검열하는 직책이다. 쉬밍은 국무원 몫으로 가끔씩 영화 심의에 참여를 했다. '우쉰좐'이란 영화도 그 영화의 주인공처럼 운명이 박복했다. 그 주인공은 청말의 실제 인물이다. 글을 못 배워 지주들에게 사기를 당하기만 했던 청년이다. 그게 한이 된 청년은 20년이 넘는 세월 온갖 고생을 하며 돈을 모은다. 그 모은 돈을 들고 당대 가장 유명한 학자를 찾아가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을 위한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