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물일까? 상선약수론에 따르면 물은 세상에 가장 약하지만, 가장 강하다. 가장 천하고 착하지만, 가장 고결하고 지고하다. 도대체 무엇이길래, 물은 어떻게 이렇게 극적으로 상반된 두 가치가 동시에 담기게 됐을까?
한자에서 그 생각의 단초를 찾을 수 있다. 한자 물 수(水)는 누가 봐도 상형자다. 그런데 잠깐, 이 부분에서 쉽게 넘어가기 어려운 점이 있다. 상형자는 본래 모양을 본 딴 것을 말하는, 상형자라니? 물이 모양이 있나?
당연히 물은 모양이 없다.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이고, 세모난 그릇에 담으면 세모다. 색도 없다. 파란색 그릇에 담으면 파랗고, 노란색 그릇에 담으면 노랗다. 동양의 선인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물 수(水)를 만들었을까? 물의 움직임이었다. 선인들이 본 것은 물의 성질이었던 것이다. 옛 글자일수록 그 특성이 잘 드러난다.
물 수와 같이 물의 흐름을 딴 글자가 내 천(川)다. 물 수가 도도한 강물을 그렸다면 내 천자가 좀 물살 빠른 강물을 그렸다고나 할까? 모든 문명이 그렇듯 강은 인류 문화의 발생지다. 물이 있어야 생명이 살고, 문화가 생긴다. 중국의 대표적인 강들은 모두 척박한 서쪽 산에서 시작해 때론 굵게 때론 미약하게 대륙을 굽이굽이 돌고 돌아 동해로 빠진다. 중국을 대표하는 강이 황하와 장강이다. 바로 상선약수론이 나오게 한 대표적인 물이라는 의미다.
두 강의 어떤 움직임에서 선인들은 상선약수론을 얻게 됐을까? 한자의 수(水)의 모양에서 보듯 두 강이 대표적인 운동은 수천 년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변의 작은 모든 강을 받아들여 바다로 간다는 것이다. 역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끊이지 않는다 게 물방울이 강물이 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산속의 이슬방울들이 땅에 떨어져, 다시 그 방울들이 모여 물길이 된다. 물 방울은 끊이지 않아 바위를 뚫고, 샘이 돼 개울을 이룬다. 샘은 그렇게 끊임없는 물 방울들의 모임인 것이다. 수많은 개울들은 다시 모여,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거꾸로는 바다는 모든 강을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여 바다가 되는 것이다.
“海纳百川
바다는 모든 강을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