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이 경제 사회의 최소 단위라는 것은 묘하게 서양의 사고와 닮아있다. 영어 'Family'의 어원을 따져 보면, 그 이유를 안다. 묘하게 인류 각 언어들은 그 어원, 근본적 의미에서 상통하는 면이 있다.
영어 Family는 원래 하인이나 노예를 뜻하는 famulus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후 한 집안을 의미하는 라틴어 familia, 중세 영어 familie를 거쳐 지금의 Family가 됐다는 것이다. 돼지와 노예라니, 묘한 공통점이 느껴진다. 모두 재력, 생산력의 기본을 의미하는 것이다. 가족은 그렇게 한 생산 단위로 부양되는 한 무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 집에 살면서 생산한 것을 함께 나누는 단위가 바로 집의 개념인 것이다.
자연스럽게 족(族)이란 한자에 왜 화살이 포함돼 있는지 알게 된다. 생산된 물건을 같이 지키는 이들이라는 의미다. 먹을 것을 같이 만들고, 지키는 무리가 바로 가족인 것이다.
가족은 혈연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남과 남이 만나 자식을 낳아 한 가족 단위를 이룬다. 그 가족은 함께 먹을 만들고, 생존을 위해 서로 무한하게 의지한다. 가족이어서 무한한 사랑이 가능하고, 무한한 책임이 가능하고, 무한한 권한도 가능한 것이다.
가족이 함께 먹을 것을 만들고, 지키는 의무와 권한은 자연스럽게 국가의 그것과 밀접하게 맞물리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주목되는 보고서가 하나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김희삼 연구원의 '노후보장을 위한 가족, 정부, 사회의 역할'이란 분석 보고서(2015. 4.)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 사회 구성원의 부양 책임이 과거 전통사회의 가족에서 사회, 정부로 이관되고 있다는 사실이 수치상 분명히 증명된다.
이에 혹자는 미래 가족이란 개념이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공상과학 영화에서 인간은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는다. 사회의 한 기능이 아이를 배아하고, 인큐베이팅 한다. 또 다른 기능은 그 아이를 기르고 교육해 사회 한 구성원으로 만든다.
과연 그런 사회가 올까?
그 사회가 온다면 그전 세대를 살고 있는 내가 행운아다 싶다. 누군가에게 무한한 책임을 느낀다는 게 행복하다는 것, 아이를 갖고 나서 알게 된 느낌이다. 아이를 위해, 아내를 위해, 가족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게 그저 행복하다. 본 필자만의 생각일까?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