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의 ‘증위팔처사’ “十觞亦不醉, 感子故意长. 明日隔山岳, 世事两茫茫.” (십상이부취, 감자고의장. 명일격산악, 세사량망망) “마셔도 마셔도 취하지 않는 건 그대와 우정이 깊고 깊은 때문. 친구여! 내일 우리 다시 각자 길을 가면 언제 다시 볼까 세파를 그 누가 알리요!” 어린 시절 친구를 20년이 지나 다시 만났다. 그리고 나눈 술 잔, 이 술이 도무지 취하지 않는다. 아니 취하지 않은 게 아니라 취해서 취한 줄 모르는지 모른다. 두보의 감성이다. 두보는 본래 ‘빈잔 술에 취하는’ 시인이다. 그의 감성은 이성 속에 있고, 차분함 속에 깊은 분노도, 격정도 감추고 있다. 제목은 ‘증위팔처사’(赠卫八处士:위팔처사에게 주다)다. 759년 당 숙종 건원 2년에 쓰였다. 두보가 화주 사공참군사로 강등돼 부임할 때다. 758년 겨울 두보는 상소를 잘못 올린 죄로 직을 강등당했다. 두보는 부임전에 낙양의 옛집을 찾는다. 759년 3월 구절도사의 군대가 업성에서 대패를 하면서 두보는 길을 돌아 부임지로 가게 된다. 당시 봉선현의 위팔처사의 집은 이 노정에 있었다. 그렇게 두보는 옛 친구를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위팔처사는 위씨 집안 여덟째라는 뜻이다. 처사는
“江碧鳥遊白(강벽조유백) 山靑花欲燃(산청화욕연)” “오늘 하얀 새가 더 하얀 건 저 강물이 더 푸르기 때문 산이 더 푸르니 이제 그 산 속 꽃도 더 피려나.” 당 시인 두보의 시다. 오언절구다. 두보는 이백과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양대 시인 중 한 명이다. 이백은 감성으로 썼고, 두보는 이성으로 시를 썼다. 이번 시는 그런 두보가 이백과 같은 감성으로 쓴 몇 안되는 시다. 시는 무르익는 봄을 느끼는 시인은 감성에서 시작된다. 고향을 그리며 매일 강가에 나가 저 하늘 저편의 고향을 그리던 시인의 눈에 갑자기 들어온 하얀 새가 그의 감성을 건드린다. 문득 그 새가 너무나 하얗게 느껴진 것이다. 저 새가 오늘 더 하얗다. 새는 어제 그 새인데, 오늘 그 새가 어찌 더 하얄까? 아 그 건 새가 바뀐 게 아니다. 강물이, 새가 날아다닌 저 강물이 더 푸르러진 탓이다. 강물이 푸르러 새도 더 하얘진 것이다. 저 꽃은 어쩔까? 오늘 저 산이 푸른데 저 푸른 산 속의 빛나는 꽃은 분명 더 빛날 것이다. 그래 봄이다. 봄이라 그렇다. 산은 푸르고 물은 파랗고 그래서 새는 더 하얗고 꽃은 더 빛난다. 그런데 이 봄이 가면, 겨울인데, 새도 꽃도 산도 저 강물도 그렇게 다시 원
시작이 있어 끝이 있고, 끝이 있어 시작이 있다. 끊을 절(絶) “끊는다.” “끝낸다.” 모두가 무엇인가에 마침표를 찍는다는 의미다. 진행되는 게 있어 가능한 일이다. “버린다.” “치운다.” 역시 무엇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있어야 없을 수 있고, 없어야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있도록 하는 법이며, 또 없도록 하는 법이기도 하다. 생이란 있고, 없고의 연속인 것이다. 한자 속에는 일찌감치 이 같은 삶의 진리가 담겨져 있다. 있다는 의미가 있고나서 비로소 끝내다는 의미가 있다. 갑골자 절(絶)에 담긴 생각이다. 묶인 끈을 칼로 끊어 내는 모습이다. 본래 묶인 끈은 거래 관계를 기록한 수다. 그 거래가 끝나 끈을 끊어 내는 게 바로 절이다. 절(絶)은 한 거래의 끝이며, 비로소 새로운 끈에 거래를 맺어야 함을, 새 거래가 시작됨을 의미한다. 마치는 게 나쁜 게 아니요. 새로운 시작이 두렵기만 한 거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끝내며 어떻게 시작하느냐다. 그래서 제일 높은 것을 절정(絶頂)이라 하고 가장 큰 것을 절대(絶大)라 했다. 가장 멋있는 것을 절경(絶景)이라 하고 당대 제일을 절세(絶世)라 했다. 하지만 희망의 끝을 절망(絶望)이라 했고
악덕 기업주에 속는 건 그의 말 때문만이 아니다. 그가 가진 재산, 휘황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고 희한한 게 너무 뻔한 일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속는다는 것이다. 마치 속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처럼 엉뚱한 사람의 말을 그대로 듣고, 그대로 따른다. 사실 그 말이 맞다. 속기로 마음먹은 탓이다. 모두가 나쁜 사람이라고 욕을 해도 믿고 따르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그가 가진 재산, 배경의 휘황함에 취한 탓이다. 옛날 악덕 자린고비가 있었다. 먼 길을 가는 준비를 하며 잔뜩 배부르게 식사를 했다. 남은 음식을 노비에게 주는 데 반만 그 것도 아까워 반만 먹도록 했다. 노비가 울며 사정했다. “아니 먼 길을 가는 데 배가 고프면 어떻게 마차를 끌겠습니까. 좀만 더 먹게 해주세요.” 악덕 자린고비가 나무 쇄기와 밧줄을 주면서 말했다. “아 걱정 말게. 이 두 가지만 있으면 배고플 일이 없네.” 결국 그렇게 노비는 고픈 배를 안고 길을 나서야 했다. 악덕 자린고비가 말했다. “그런데 자네 길을 가다 배고프면 ‘배고프다’하지 말고, ‘배가 아프다’하게.” 노비가 “왜 그러시냐? 물었다. 자린고비가 말하길: “아 다른 게 아니라, 그래도
빛난다는 것은 자신을 감추는 일이다. 빛은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언제가 밝은 빛 그 뒤에 숨어 빛이 닿는 모든 것을 비추어 드러내고 빛나도록 하는 것이다. 빛의 밝음은 언제나 그 빛이 닿는 곳에 있지, 그 빛이 나오는 곳에 있지 않다. 자신을 감추고 남을 드러내는 것 바로 빛의 본질이다. 한자를 만든 동양에서는 진작에 빛의 본질을 꿰뚫었다. 갑골자에 그 생각이 잘 드러난다. 광(光)자는 불을 쬐는 사람의 모습이다. 앉은 사람의 머리 위로 불길이 보인다. 따뜻함과 밝음이 동시에 느껴진다. 빛이 있고 사람이 있어 그제야 느껴지는 것이다. 빛나는 모든 것은 드러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비춰 드러나게 할뿐이다. 그래서 빛은 그 것을 느끼고 비춰져 빛나는 게 있어 비로소 빛의 존재가 빛나는 것이다. “毕竟西湖六月中,风光不与四时同。 接天莲叶无穷碧,映日荷花别样红。” (필경서호육월중, 풍광부여사시동. 접천연엽무궁벽, 영일하화별양홍.) “아 6월의 서호로구나, 그 빛이 남 다르다네. 하늘가 연잎 푸르기만 하고 비춰진 연꽃 붉디 붉구나“ 송 양만리의 시다. 빛은 비춰서 빛이 나게 하는 것이다.
능력은 말로 증명하는 게 아니다. 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능력이 있다는 것은 결국 진행된 과정과 결과가 이야기해주는 것이지 계획의 설계가 말해는 주는 게 아니다. 물론 당연히 계획의 설계가 좋아야 과정과 결과도 좋다. 하지만 어떤 계획도 실행할 수 없고 실행과정에서 생길 변수에 제대로 응할 수 없다면 그 결과가 좋을 수 없다. 결과없는 계획은 좋은 계획일 수 없는 것이다. 능의 이처럼 아주 실질적인 것이다. 능의 갑골문자가 그 의미를 보여준다. 능의 갑골자는 무서운 이빨과 날카로운 발톱을 가지고 나무를 잘 타는 거대한 동물이다. 바로 곰의 모습이다. 곰의 이빨은 장식이 아니고 발톱은 멋이 아니다. 이빨로 물어뜯으며 발톱은 찢어 낸다. 능력은 그런 곰의 힘이다. 물어뜯고 찢어 내는 그런 힘이다. 실행되지 않는 모든 계획은 그저 장식이고 멋일 뿐이다.
“一覽衆山小”(일람중산소) “저 뭇 산 내 한 번 굽어보리라!” 산에 올라 떠오는 해를 보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해가 산을 품는가 산이 해를 품는가 가슴이 밝아오는 하늘의 구름처럼 쿵쾅쿵쾅 뛰어오르면 나도 모르게 호기롭게 외친다. “나도 할 수 있다. 끝까지 버텨서 저 높은 곳에서 뭇 산을 한 번 굽어 보리라!” 두보의 시다. 두보는 이백과 함께 시성으로 불리는 당 시인이다. 이백이 순수한 천재성에 우러나는 재치를 보였다면, 두보는 인간적 고심 끝에 나온 짙은 고뇌가 보인다. 두 시인은 삶의 궤적에도 큰 차이가 있다. 이백이 금수저로서 평생을 아쉬운 게 없이 호방하게 살았다면 두보는 평생을 남의 눈치를 보며, 호방한 자유를 그리며 살아 했다. 하지만 두보의 천재성을 무시하는 이는 없다. 이백이나 두보나 그 전에도 없고, 이후에 없는 시의 거봉들이다. 망악은 두보의 시 가운데 호기를 보이는 몇 안 되는 시 중 하나다. 시상은 다음과 같이 흐른다. 높은 산봉우리 겨우 올라보니 그 푸르름이 남과 북으로 끝이 없구나. 이 봉우리 저 봉우리 가파른 절벽마다 새겨진 기암절수(奇巖絶樹) 신의 손길 느껴진다. 아 저 멀리 어둠을 뚫는 한 줄기 빛 층층구름처럼 내 가슴도 벅
많은 정책, 계획의 실패는 본연의 목적을 잃어버린 데서 나오기 일쑤다. 많은 이들이 단기적 목표에 얽매여 목적을 달성했지만 실패하는 오류에 빠진 곤한다. 가끔 옛 이야기들이 이런 오류를 일깨워주는 경종 역할을 한다. 옛날 한 자리고비 영감이 바지가 다 헤어져 새로 만들어야 하는 데 아무리 생각해도 옷감이 너무도 아까웠다. 그렇다고 입던 바지를 입자니, 이미 너덜너덜해져 바지라고 할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감춰야 할 곳도 제대로 감추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래도 이거 너무 아까운데 …’ 하루 웬종일 고민에 빠진 것을 본 이웃집 재봉사가 꾀를 냈다. “영감 그럼 내 계획을 한 번 믿어보시려우? 바지가 옷감이 많이 드는 것은 다리 두 개를 다 넣어야 하는 다리통이 두 개이기 때문이지요. 그걸 하나로 하면 옷감을 반은 절약하는 셈인데, 어쩌요? 해볼실려우?” 이야기를 들을 자린고비 영감이 무릎을 치며 좋아라 했다. “아이고 옷감만 아낀다면야! 어서 해주시게” 그렇게 재봉사는 옷감을 반만 들인 바지를 만들어 납품을 했다. 새 바지를 받은 자린고비 영감은 한시라도 빨리 새옷을 입고 나가 자랑하고 싶었다. 새 바지를 입고 나가려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조금만 걸어도
감출 습(襲) 정말 귀한 것은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면 귀한 것을 귀하게 쓸 수 있다. 귀한 것을 함부로 드러내서는 지키기도 힘들뿐이다. 노자의 생각이다. 꼭 필요할 때 내놓는 게 귀한 것을 귀하게 쓰는 방법이다. 사물도 그렇지만, 사람의 지혜가 특히 그렇다. 정말 좋은 지혜는 꼭 필요할 때 내놓는 것이다. 흔히 지혜로운 이를 ‘현명(賢明)하다’ 한다. 말 그대로 지혜가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현명해도 꼭 필요할 때 지혜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 지혜가 아무리 많은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진정한 지혜는 평소 지혜로운 게 아니라 꼭 필요할 때 제시되는 지혜다. 노자는 그런 지혜를 ‘습명’(襲明)이라 했다. 현명에 상대하는 게 바로 습명이다. 평소 감추고 있지만, 꼭 필요할 때 드러내고 쓰이는 지혜다. 쓰여진 습(襲)자의 본의를 알면 이해가 쉽다. 갑골자 습자는 사람 이 팔 뒤로 무기를 감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무기를 감췄다가 필요할 때 내려치는 게 바로 습(襲)이다. 갑골자 습에는 숨어서 공격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에 앞서 있는 게 쓸 무기를 감추고 있다는 뜻도 있다. 용(龍)아래 옷 의(衣)는 갑골자 모양이 이어지다 보니 만들어진 글자다.
다 갖추면 누가 봐도 좋다. 그게 현(賢)이다. 집안도 좋고, 타고난 재능도 좋고, 말 그대로 금수저가 바로 ‘현’(賢)이다. 역사 이래 모두가 그래서 ‘현’하기를 좋아한다. 갑골자 현은 글자가 만들어지는 그 순간부터 그렇게 좋은 뜻이었다. 노예, 손재주, 재물 모두를 갖춘 게 현이다. 갑골자 현에는 아직 재물은 없었다. 신하 신(臣)에 또 우(又)만 있었다. 여기서 우는 ‘장악’, ‘관장’(管掌)하다는 뜻으로 풀리고 있다. 그래서 신하를 관장하는 인사 업무 혹은 손의 뜻을 강조해 ‘재능’이란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신하와 재능을 갖춘 뜻을 ‘현’으로 보기도 한다. 훗날 금문에 와서 재물을 뜻하는 조개 패(貝)가 붙었다. 관리(官吏)를 뜻하는 현에 재물이 붙은 것은 참 묘하다. 돌이켜보면, 고래(古來)로 동서양에서 나랏일을 하는 관리는 부자였다. 왜 그럴까? 똑똑한 건 인정하는 데, 그래도 왜 관리가 부자인지는 역사적 의문이다. 고래로 동서양 어느 시대이든 관리의 녹봉이 부자가 될 정도로 많은 적이 드물기 때문이다. 다시 그래서 참 묘한 게 현이란 글자다. 모두가 현과 같은 관리를 싫어하지만, 모두가 현과 같은 상태를 좋아만 한다. 유일하게 현을 싫어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