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을 봤다는 것은 누군가 죽었다는 것이다. 아니면 어쩜 이렇게 똑같을까. 분명히 봤다는 것이다. 누굴까. 누가 죽어 처음으로 자신의 심장을 남에게 보여줬을까….” 마음심(心) 자를보면 섬뜩한 전율이 인다. 산 사람의 심장은 지금도 보기 힘들다. 분명히 죽어야 보여주는 게 심장이다. 마음이다.그런 심장을 정말 너무 단순히, 너무 정확히 표현을 했다. 마음 심 心의 이야기다. 모양을 본 딴 상형자다. 심실, 심방 구조를 정확히 표현했다. 참 선인들의 인간에 대한 이해가 간단치 않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인문학적 생태만 본 게 아니라 해부학적 요소까지 담겨 있는 게 한자다. 심장은 사람 생명의 근원이요, 중심이다. 갑골자를 만든 선조들은 일찌감치 그것을 알았다.사실 사람을 상징한 신체 구조는 많다. 예컨대 스스로 자 自는 코 모양이다. 코는 내 얼굴을 남과 구분해주는 중심이다. 그 코가 남과 구분해 스스로를 보여준다고 생각해 '스스로'라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성기도 생명의 근원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로 인한 새로운 생명의 근원이지, 내 생명의 근원은 아니다. 그래 없어도 사는 신체 기구다. 하지만 심장은 없으면 누구도 살 수 없다. 물론
“배움은 체득을 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깨닫고 몸으로 얻는 것이다. 몸으로 얻은 진리는 절로 행해진다. 진리를 체득하는 유일한 길이 학습이다. 학습은 바로 코칭을 받고 혼자 노력하는 길이다.” 무엇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는 배워야 안다. 그래서 배움이 어떻게 사느냐를 결정한다. '무엇을 배웠느냐'라는 것은 '무엇으로 살 것이냐'와 같은 질문이다. '어떤 수준까지 배웠느냐'라는 것은 결국 '어떤 수준의 삶을 살 것이냐'라는 것이다.그리 중요한 게 배운다는 것, 바로 학습学习이다. 그럼 학습은 어떻게 하는가? 역시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질문이다. 동양에서는 체득体得이 학습의 마지막 단계다. 체득, 바로 몸으로 얻는 것이다. 체득을 위해 하는 것이 학이요, 습이다.학은 코치를 받는것이고,습은스스로 익히는 것을 말한다.이 도리는 습의 옛 글자, 갑골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갑골문자에서 보듯 습은 어린 새의 날갯짓이다. 지도 받은 뒤 고쳐진 것을 스스로 노력해 몸이 익숙하게 하는 게 바로 학습이다. 그 최종 목적은 체득에 있다. 체득은 그래서 습득이라고도 한다. 습득, 어린 새가 지속적인 날갯짓을 해 얻는 것, 날 게 되는 것을 말한다. 날개 어깨뼈가 튼튼
“배워 아는 것은 맞다. 그러나 아는 것이 배움의 전부는 아니다. 배움은 알아가는 것보다 끊임없이 아는 것을 익혀가는 것이다.” 질문이 하나 있다. "코치는 선수를 가르치는 사람인가?"그렇다고 한다면 또 묻자. "그럼 모든 코치는 선수보다 잘 하겠네? 그럼 왜 선수가 경기를 뛰지 코치가 안 뛰고?"이쯤 되면 무슨 말인지 안다.코치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다. 코칭은 가르치는 게 아니고 잘하도록 지켜봐 주는 것이다.한국이 나은 세계 최고의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만 봐도 쉽게 안다. 세상의 그 어떤 코치도 김연아보다 높은 점수를 내지 못한다. 그런데 그 김연아는 또 코치가 없으면 자기 점수를 갱신하지 못한다. 코치는 그런 것이다. 김연아를 항상 지금의 김연아보다 나을 수 있도록 만드는 사람이 바로 코치다.그게 바로 배울 학이다. 학은 실은 코칭 할 학이다. 갑골문에 그 의미가 잘 나타난다. 갑골자에서 현재 간자까지 배울 학의 변형이다. 사실 학은 교로도 읽는다. 배울 학이고 가르칠 교다. 아쉽게도 점차 배울 학을 절반의 뜻만으로 쓴다. 서양의 코칭은 코치의 관점에서 나온 단어다. 코칭 한다고 하고, 코칭 받았다고 한다.그런데 갑골문에서는 배우고 가
“평은 앞 숨과 뒤 숨이 달라지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숨이 고르면 평한 것이다. 천리를 달리면서도 숨이 고르면 평온한 것이다. 숨을 평온하게 쉬면 절로 마음과 몸도 평온해지는 것이다. 몸의 평온은 체력이 필요하고, 마음의 평온은 정력이 필요하다.” 금문에서 출현한 평平자는 일찌감치 여러 뜻으로 두루 쓰였다.한자의 고문에서 쓰임을 정리한 '고대한어사전'(상무인서관 1998)에 따르면 평 자는 무려 10가지의 뜻의 쓰임이 나타난다.우선 가장 초보적인 땅이 평평하다는 뜻이다.맹자에 "然后人得平土而居之"(그 뒷사람이 평지를 찾아 거주하기 시작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형용 용법 이외 동사로 쓰이기도 했는데, '~을 평평하게 하다'라는 타동사와 '마음의 안정을 찾다'라는 자동사 둘 모두의 쓰였다. 타동사는 실제 땅 등을 고르게 한다는 뜻에서 반란을 진압하다, 안정되게 하다는 뜻으로 발전해 쓰인다.공평하다는 뜻도 이미 춘추 전국시대의 문서에서 보인다. 진나라 변법을 주도했던 상앙의 사상을 집대성한 상군서商君书에는 "法平则吏无奸"(법이 공평해야 관리가 사악해지지 않는다.)이라는 말이 나온다. 동양의 법철학을 집대성한 말이다.이 말은 이어 법가에
“무엇이 평온平穩인가? 어떻게 해야 우리는 마음이 평온한 지 아는가? 무엇이 어떤지 알아야 얻을 것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게 평온의 삶이다. 그런데 정작 평온이 무엇인지 아는 이는 드물다. 무엇을, 어떤 상태를 우리는 평온이라 하는가? 최소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얻을 것이 아닌가?물론 우리는 평온이 무엇인지 막연히는 안다. 이게 말로 설명하기 힘들 뿐이다. 그냥 가만히 누워 있으면 평온하다. 저녁 번잡한 일자리를 떠나 가족과 함께 있는 순간 평온하다. 아, 아주 가끔은 그때부터 평온이 깨지는 가족이 있을 수 있다. 카페에 한가로이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부릴 때 우리는 평온하다.'평온'이라는 감정은 공감, 전파 능력이 강하다. 내가 평온하면, 주변 사람도 평온해지고, 평온한 사람을 보면 나 역시 평온해진다.그런데 이렇게 말고, 정말 평온이란 무엇인지,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는가?역시 정확히 부를 수 있어야 얻기도 쉬울 것 아닌가?아니면 평온이라는 게 본래 그리 어려운가? 그리 어려워 얻기가 힘든 것인가?언제나 이야기지만 이 순간 도움이 되는 게 한자다.한자를 만든 선인들의 지혜가 큰 도움이 된다.가장 글자의 원형에 가까운 갑골문자에서 평(平
“만족滿足은 발로하는 것이다. 욕망을 그치도록 하는 것이다. 실천하는 것이다.” '만족하는 삶'은 예부터 인간의 최대 고민거리 중 하나다.살아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욕망이고 삶이 바로 그 욕망을 채워가는 과정이 아니던가.무엇을 어떻게 욕망하느냐는 문제나,어떻게만족하느냐는 문제의 답을 찾는 과정이 바로 삶이다.사실 욕망이 있고서야 만족이 있으니, 둘은 분명 동전의 양면이다.하지만 다르기 때문에 동전의 앞뒤가 되듯 욕망과 만족, 둘 사이 차이도 분명히 있다.만족의 가장 쉬운 방법은 욕망을 조절하는 것이다.욕망의 총량을 줄이는 것이다.자학(?) 형방법이다. 성인聖人들이 취한가장 확실한 방법은 면벽이다.보지 않고 듣지 않는 것이다.보지도 않은 샤넬 백을 사고 싶은 여자는 없다.말은 제일 쉬운 데 실천하기에 가장 어렵다. 그래서 역대'성인'이 그리 적지 않나 싶다.한자의 세계 사고방식은 다른다. 한자는 인간적이다. 한자는 "사는 것은 욕망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만족은 발로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만족을 발로 한다니? 좀 표현이 이상하다. 그러나 배고프면 참고 굶는 것이 아니라 먹어 배를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면 쉽다.그럼 욕망 층위의 변화는 어떤가?맛에 대
“침 튀며 사는 게 열심히 사는 거다. 욕망에 충실한 거다. 그럼 언제 좀 쉬어야 할까? 바로 만족할 때다. 그럼 언제 어느 순간 만족할 수 있을까?” 참 어려운 이야기다. 모든 욕망이 문제가 되는 순간이 필요한 것을 넘어서는 순간이다. 만족을 하지 못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아예 욕망을 억누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만족할 순간을 알면 인생사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된다.참 말이 쉽지 결코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랬으면 진작에 세상이 천국이 됐다.순수했던 선인들, 한자를 만든 선인들의 생각은 이때 항상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족은 한자로 '滿足'다. 발이 가득한 게 만족이라는 의미다. 물론 여기서 족은 명사로 발을 뜻하지만, 형용사로 충만하다, 채우다는 뜻이다.언제 발족은 이렇게 명사와 형용사의 뜻이 달랐을까?고대 발 족 자가 의미하던 것을 알면 의문이 풀린다.다음은 갑골문자의 발 족과 그 후의 변화다. 어린아이 그림 같은 글자를 보면 절로 웃음이 난다.아이에게 로봇이 앉아 있다고 설명을 해주면 금방 알아듣는다.그렇게 쉽다. 그런데 혹 기억하는 이가 있다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정면의 정, 바를 정 자와 갑골문의 형태가 같기 때문
“침 튀며 살 활(活) 자는 언제부터 쓰였을까? 비교적 오래된 사례가 노자의 도덕경이다. 노자는 죽일 살(殺)의 반대의 뜻으로 살 활 자를 쓰고 있다. 감히 하지 않는 데 용기를 내는 이가 살 것이라고 했다.” “勇于敢則殺, 勇于不敢則活 yǒng yú gǎn zé shā , yǒng yú bú gǎn zé huó” '감히 하는 것' 보다 용감하면 죽을 것이고, '감히 아무 것도 못하는 것'보다 용감하면 살 것이다. 노자 도덕경 73장에 나오는 말이다. 于는 ~ 하는 데 있어서 또는 ~하는 것 보다 등의 뜻이다. 쉽게 말해 '용감'하면 죽기 쉽상이고, '용무감'하면 산다는 의미다. 용감과 부용감이 아니라 용감과 용부감이라는 데 주의할 필요가 있다. 먼저 용감을 보자 용감은 흔히 쓰듯 겁 없이 나선다는 뜻이다. 그럼 용부감이란 무엇일까? 부용감은 용감하지 않다는 의미다. 겁쟁이라는 말이다. 용부감은 이와 다르다. 부감하는 용기가 있다는 뜻이다. 겁쟁이라는 의미와 달리 감히 하지 않는 용기를 낸다는 의미다. 참 묘한 말이다. 절로 무릎을 치게 한다. 본래 감히 하는 것보다 감히 하지 않는 게 더 어려운 법이기 때문이다. 살면서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 모험을 해야 하
“침 튀며 살아라, 삶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 욕망 없는 삶이란 없다. 욕망하지 않는 것은 죽음뿐이다. 심지어 욕망하지 않는 삶조차 욕망해야 얻을 수 있다.” 본래 혀 설舌자도 생물에 물기에 묻은 모양이다. 여기에 다시 삼 수 변을 붙인 글자가 바로 활기찰 활活 자다. 침이 튀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 강조했던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입에 침이 도는 것이다. 맛있는 것을 보면 입에 침이 돌아야 건강한 것이다. 침이 안 돌면 입맛을 잃은 것이고, 몸 어딘가 불편하다는 징조다.실제한방에서 침은 건강의 이상을 알리는 주요한 신호다. 중국 저우춘차이(周春材)가 지은 한의방약에 따르면 "혀 설(舌)은 집(舍)"이라며 "심장의 싹이며 심장의 기운이 머무는 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역시 혀 설의 갑골문에 대한 설명과 일치한다. 혀 설은 식물의 싹이 자라며 물기를 머물고 있는 모습이다.심장의 기운이 모은 곳이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이 있다. 침이 많이 고인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 한방에서 침이 많이 고이면 위에 열이 있다는 의미이고 식욕이 과해지고 방귀 냄새도 독해진다고 한다.반대로 침이 마르는 지나친 갈증
“세상의 모든 수양이 욕망에 맞서 억제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한자만 다르다. 욕망에 진정으로 충실하라고 가르친다. 욕망에 충실해야 인간이고, 욕망에 충실해야 그 욕망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물에 들어가지 않고 수영을 배울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욕망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욕망이라는 게 무엇일까? 이 질문은 삶이란 무엇일까?에 가장 닿아 있는 것이다. “삶이란 정말 무엇인가” 이처럼 오래됐지만 항상 새로운 화두도 없다.“어떻게,무엇을 위해 살아가야하는가?"라는것은 종교,철학의 가장 근본적 고민이었다.동양의 공자,맹자 등은 물론이고 서양의 플라톤,소크라테스 이래 종교,철학자들 고민의 중심에는'삶이란 무엇이냐'의 문제가 존재했다.역사에 이름을 남긴 많은 사람들이 각자 특색 있는 답을 남겼다.일부의 답은 두고두고 후인들의 존경을 받기도 했다.그러나 그 수많은 고민과 답들의 공통점은 인간적 욕망에 대한 극적인 제약이다. 대부분 종교가 성직자들에게 인간적 생을 포기하도록 하듯 말이다. 그러나 한자에서 삶에 대한 해답은 그 출발은 역시 욕망이지만 방향은 완전히 상반된다. 다른 모든 한자가 그렇듯 참 단순 명쾌하고 인간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