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歲月)을 낚는다. 내 살을 깎는다.” 한 생이다, 살아서 죽은 것. 생은 수많은 반복이다. 반복의 한 고리를 세(歲)라고 한다. 세는 하늘의 별, 목성의 이름이다. 밤하늘 가장 밝은 별이다. 더 밝은 별, 금성, 샛별이 새벽을 밝힐 때까지 목성이 밤하늘을 지킨다. 월도 하늘의 별, 달의 이름이다. 달은 별이라 하기에 크고 밝다. 태양의 빛을 보듬어 밤 대지를 비춘다. 급은 다르지만, 둘은 우리 생의 한 변화의 고리, 하루와 한 달을 상징한다. 목성의 빛에 샛별에 가리기 시작하면 새벽이 되고, 해에 가르면 낮이 된다. 밤하늘 ‘하루’의 증거가 바로 세(歲)다. 월은 밤마다 나타나 몸으로 한 달의 변화를 보여준다. 만월은 한 달의 끝,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본래 세(歲)는 시간의 의미는 아니었다. 갑골자에서 세(歲)는 과(戈)라는 무기로 살을 도려내는 이미지를 형상화한 글자였다. 다리에서 다리를 떼어낸 모습이다. 잔혹한 형(刑)이다. 상나라 때 자형부터 보이는 것으로 보아, 고대 동양에서 부족들 사이에 널리 쓰였던 형벌로 보인다. 다만 세(歲)는 주나라 예기에서 이미 시간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일찌감치 목성을 의미하며, 시간의 의미를 지니게 된 것으
우리는 모두 졸(卒), 시작과 고통, 예정된 죽음이다. 한자 (卒)은 묘하다. 삶과 죽음. 그 두 개의 뜻이 함께 있다. 먼저 삶의 의미다. 졸은 사회 한 계층의 사람들을 의미한다. 가장 평범한 사람들, 삶이 고달픈 이들이다. 선배 사(士)의 아래가 바로 졸(卒)이다. 군에서 사병을 의미했고, 옛날 농사를 지며 군역을 담당했던 계층을 의미했다. 오늘로 치면 평민이다. 우리 모두가 평민인 오늘날, 우리는 모두가 졸(卒)이다. 그 옛날 한자 졸은 그런 이들을 가리켰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옛날 졸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는 오늘날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졸은 갑골자에 등장하는 오래된 한자다. 하지만 자형은 분명히 전해지는 데 그 의미를 짐작하기는 어렵다. 모양이 묘하다. 다음은 죽음이다. 졸은 죽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한 글자가 삶과 죽음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진 채 쓰인다. 역시 묘한 한자다. 한자의 자형에 그 비밀이 있다 싶다. 앞서 이야기 했듯 갑골 문자에 등장할 정도로 오래된 글자가 바로 졸이다. 졸의 모양은 보듯 그 뜻을 짐작하기 어렵다. 갑골자를 연구한 많은 이들이 졸의 의미를 해석하려 매달렸다. 두 가지 해석이 유력하다. 우선 농사 행위의 하나로 보
절반만 죽자. 목숨 값이 얼마인지 누가 싶게 결정할 수 있을까? 그래서 예로부터 목숨을 거는 최선의 일로나라를 위한 일을 꼽았다. 여기서 나라하니까, 추상적이지 간단히 보면 많은 남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다. 본래 나라라는 게 그 속의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을 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땅이 아무리 넓어도 그 땅위에 사는 이들의 수가 적으면 작은 나라요,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수가 많으면 큰 나라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은 인구 5000만 명의 적지 않은 나라다. 북한을 합치면 잘 하면 인구 1억 명에 달하는 나름 대국이 될 조건도 갖추고 있다. 다시 목숨 값이 이야기다. 옛날 돈만 아는 자린고비가 있었다. 돈이라면 무엇이든 하는 인물로 소문이 났다. 하루는 그 소문을 이웃에 사는 부옹(富翁)이 듣게 됐다. 부옹은 한자 그대로 돈 많은 노인이란 뜻이다. 오늘날 재벌 오너가라 생각하면 된다. 이 부옹이 소문을 듣고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웃 자린고비를 찾아 제안을 했다.; “자네 내가 황금 1000냥을 그냥 주지. 하지만 반년뒤에는 내가 자네를 두둘켜 패 죽인다면 그 황금 1000냥을 받겠는가?” 부옹의 말을 들은 자린고비가 짐짓 심각한 듯 반나
소원을 들어줄게, 돈 빌려달라는 소리만 빼고. 돈이 전부인 세상이다. 인류가 돈이란 걸 만들어내고 세상은 그렇게 변했다. 세상에 최초 돈이 등장한 이래 그랬던 듯싶다. 친구사이가 좋아 어떤 말도 못할 말이 없고, 들어주지 못할 사항이 없다고 해도 돈은 다른 문제다. 그런데 돈이란 게 무엇인가? 허상이요, 인간이 만든 제도일 뿐이다. 돈이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돈과 바꿀 수 있는 물건들이 가치 있는 것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돈이 생긴 이래 돈으로 바꿀 실물은 보지 못하고 돈만 본다. 진정한 자본주의는 가치의 척도로만 돈을 보는 태도다. 돈을 갖는 것은 실물을 갖는 권리만을 가질 뿐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옛날 한 마을에 두 자린고비가 절친으로 살았다. 하루는 두 친구 중 한 명이 병이 났다. 소식을 들은 친구가 병문안을 했다. 친구를 찾아보니 얼굴에 수심이 그득했다. 병 문안을 온 친구가 황급히 물었다: “아니 무슨 근심이 이리 병이 깊게 들도록 했는가? 무슨 일인지 말해주시게 내가 뭐든 해보겠네.” 아픈 친구가 힘없이 답했다: “아니 무슨 일이 있겠는가. 돈이 문제지. 내가 급히 쓸 일이 있는데 1000냥이 없다네. 혹 자네가 빌려준다면 일 처리가 끝
돈이 귀중한 게 아니라, 그 것과 바꾸는 대상이 귀중한 법이다. 돈이란 게 참 그렇다. 사람들이 가치를 정하기 위한 약속인데, 사람들이 그 약속에 목을 맨다. 돈을 위해서 뭐든 하려고 든다. 때론 실제 목숨도 돈과 바꾸려한다. 옛날 한 자린고비가 비가 오는 날 급히 도랑을 건너다 동전을 빠뜨렸다. 놀라 돌아보니 동전은 돌다리 사이에 떨어져있었고 저 멀리에서는 비에 강물이 갈수록 불어나고 있었다. 몸을 돌려 다시 돌다리로 가기에는 불어난 물에 휩쓸릴 위험이 컸다. 하지만 자린고비 눈에 돈이 먼저 보였다. 자린고비가 생각하길, ‘머뭇거리다가 자칫 물이 더불어나 동전을 찾을 수 없겠어!’ 모든 사람이 위험을 볼 때 자린고비는 기회를 본 것이다. 결국 자린고비가 몸을 날려, 돌다리 사이로 뛰어들었다. 손으로 동전을 잡는 순간, 거대한 물덩어리가 자린고비를 덮쳤다. 물 소용돌이에 휩쓸린 자린고비가 서너번 허덕이다 물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며칠 뒤 자린고비는 강 아래 나무통 위에 걸친 채 발견됐다. 이미 숨은 끊어진 채였지만 주먹을 꽉 쥔 손에는 동전 한 닢이 있었다. 사람들이 말했다. “아 이 사람 정말 동전 한 닢에 목숨을 바꿨구먼.” 돈은 결국 바꾼 것에 대한
생이 참 묘하다. 고해(苦海)엔 데 그 속에 있는 행복이 달콤하기만 하다. 그래서 살고 있고, 살아가려 한다. 그래 필요한 게 술이다. 술은 고해를 잠시 잊게 하고, 잠시의 행복 속에 머물게 도와준다. 그 속에 현실을 잊고, 자신도 잊어버린다. ‘몰아지경’(沒我之境) “艰难苦恨繁霜鬓, 潦倒新停浊酒杯。” (간난고한번상반, 요도신정탁주배) “귓가에 핀 백발가락, 술잔만 들고 멍하니.” 두보의 시 ‘등고’(登高)의 한 구절이다. 술을 마시려 하지만, 늙고 병 들어 술 잔만 들고 더 이상 마시지 못하는 늙은 나그네의 심정을 그렸다. 이처럼 처량한 인생이 있으랴. 인생의 고해 속에 담금질 된 술꾼에게는 둘도 없는 형벌이다. 술 향이라고 맡기 위해 잔을 따르는 심정, ‘빈잔 들고 취해야 하는’ 심정은 당해보지 않은 이는 알 길이 없다. 술이 가져오는 경지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속에서 자신을 잊게는 게 아니라 잃고 만다는 게 문제다. 그게 ‘취(醉)’의 묘미다. 자신을 잊어도 그렇지만, 자신을 잃으면 술이 연장해준 행복의 기억은 남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술을 찾게 된다. 마약쟁이가 마약을 찾듯…. 인생의 묘미(妙味)인 술은 인류의 생이 시작한 순간, 같이 시작됐고 인
얼굴 초상화를 그리면서 반만 그린다. 그럼 초상화라 할 수 있을까? 얼굴 반만 보이는 초상화는 초상화라 할 수 없다. 그렇다. 하나의 기준이다. 반쪽으로는 아무리 해도 하나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때론 반쪽은 누가 뭐래도 하나는 아니다. 물론 조금 모자랄 수도 있다. 실은 세상의 일이라는 게 그렇다. 완벽한 하나란 없다. 대부분 조금씩 모자라다. 하지만 그렇다고 반은 아니다. 반이 모자란 것은 절대 하나가 될 수 없다. 아무리 하나인척해도 하나는 아닌 것이다. 옛날 중국 시골마을에 자린고비 영감이 살았다. 하루는 초상화를 그리고 싶어서 화가를 청했다. 하지만 초상화를 그리는 돈이 아까웠다. 그래서 화가에게 말했다. “화가 선생, 보통 초상화 하나를 그리려면 얼마면 되요?” 화가가 말했다. “그게 잘 그리는 정도에 달렸지요. 상급이면 금화 10량, 중급이면 금화 5량, 하급이면 은화 10량이면 됩니다.” 말을 들은 자리고비 영감이 놀라 생각했다. ‘아니 무슨 초상화가 그리 비싸냐.’ 그리고 말했다. “음. 내가 실은 은화 5량밖에 없어서...그래서 말이요.” 그리고 잠시 말을 멈췄다. 말을 듣던 화가가 자리고비 영감의 뜻을 알아채고 말을 잘랐다. “
본래 준만큼 받는 게다. 투자한 만큼 버는 게다. 적게 주고 많이 받으려 하면 그게 도적놈 심보다. 주지도 않고 받으려 하면 그 건 뺏는 것이다. 강도 심보다. 옛날 동양의 한 마을에 자린고비 부자가 있었다. 하루는 천지인 삼신(三神)에게 복을 비는 제를 지내고자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음식이 아까웠다. 소도 잡고, 돼지도 잡고 닭도 잡는데, 정작 신이 먹는지는 불투명했고, 집안의 종복들이나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다 먹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를 의뢰하는 도사에게 슬쩍 물었다. “음... 이게 꼭 온갖 음식을 다해야만 하는가? 그러지 않고 제를 지낼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눈치 빠른 도사는 자린고비 부자가 무슨 심보로 그렇게 말하는지 금방 알아챘다. 그리고 말을 했다. “아이고 그럼요. 물로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도사는 제를 지내는 보수만 받으면 된다는 식으로 말했다. 말을 들은 자린고비 부자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아 그럼 바로 지내도록 하지.” 그리고 제삿날이 됐다. 도사 제상 가득 물을 받아놓고 기원을 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사상의 음식을 신께 바치는 의식을 시작했다. 도사가 말했다. “아 삼신이시여,
“斜阳照墟落,怅然吟式微。”(사양조허락, 창연음식미) “석양 온 촌락 물들일 때 입가엔 노랫가락 맴돌고” 석양은 자연이 만든 ‘인생이란 극의 막’이다. 하루의 막이 내리면, 붉은 빛이 빛나며 저 멀리 마을부터 조금씩 어둠에 잠기게 된다. 시작은 거창하지만 짧은 오언절구의 시다. 왕유의 위천전가(渭川田家)다. 강변 농가 마을의 전경을 읊었다. 소개한 구절은 중간 모두를 생략하고 시의 첫구와 마지막 구만을 적었다. 사실 시 자체가 그렇다고 느낀 때문이다. 왕유의 시는 강가 전원마을에 저녁 풍경을 그렸지만, 사실은 그 속에 생략된 시인의 인생 전반에 대한 소회를 읊었다는 게 필자의 감상이다. 다시 왕유의 시다. 시는 석양 낀 마을의 평온함을 지켜보는 마음이다. 평온함이 너무나도 포근하게 다가온다. 석양은 사실 ‘순화’(順化)의 상징이다. 어둠의 두려움에 대한 순화다. 어둠을 담대하게 맞는 마음이다. 그 어둠 아래 마지막 빛이 바로 석양이다. 하루의 삶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가끔 산 위에서 바다가 언덕에서 석양을 보면 그 아래 검은 장막의 끝자락 붉은 빛 아래 움직이는 수많은 군상들이 눈에 들어온다. 모두가 하루를 마치고 의식하지 못한 채 너무도 익숙하게 어둠을
“请留盘石上, 垂钓将已矣。” “우리, 이 강변에 낚시나 드리울까?” 세월을 낚는다는 건 동양 선비들의 오랜 ‘노년몽’이다. 나이 들어 여유자적하게 ‘강가에 낚시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는다.’ 세월은 해 세(歲), 달 월(月)의 합자다. 1년, 혹은 사람의 한 생을 의미한다. 당시인 왕유의 시, 청계의 한 구절이다. 산시성 사람인 왕유는 시불(詩佛)이라 불리는 음유시인이다. 서정성에서는 시대를 초월하는 자신만의 경지를 구축했다. 역대 중국 왕조에서, 필자 개인적으로는 동서양을 막론해 그의 경지에 이른 이가 드물다고 생각한다. 청계는 저(沮) 강의 지류다. 시인은 이 녹림 속에 다양한 곡절로 흐르는 청계의 아름다움을 그리며 세속의 번잡함과 그를 관조하는 주변의 여유를 대비해 보여준다. 강은 흐르는 세월이요, 주변의 깊고 푸른 숲은 그 흐름을 담는 우주다. 세월은 동양 시의 고전적 주제다. 세나 월이나 둘 모두가 별이다. 세는 목성, 쥬피터이며, 월은 달, 문이다. 목성은 밤 하늘 가장 밝은 별이다. 밝기는 금성이 더 밝지만, 새벽에만 보인다. 밤을 밝히는 것은 목성과 달이다. 세월은 밤하늘인 셈이다. 그 옛날 밤하늘을 보고 시간의, 세월의 흐름을 알았으니 세와 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