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만 죽자. 목숨 값이 얼마인지 누가 싶게 결정할 수 있을까? 그래서 예로부터 목숨을 거는 최선의 일로나라를 위한 일을 꼽았다. 여기서 나라하니까, 추상적이지 간단히 보면 많은 남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다. 본래 나라라는 게 그 속의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을 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땅이 아무리 넓어도 그 땅위에 사는 이들의 수가 적으면 작은 나라요,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수가 많으면 큰 나라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은 인구 5000만 명의 적지 않은 나라다. 북한을 합치면 잘 하면 인구 1억 명에 달하는 나름 대국이 될 조건도 갖추고 있다. 다시 목숨 값이 이야기다. 옛날 돈만 아는 자린고비가 있었다. 돈이라면 무엇이든 하는 인물로 소문이 났다. 하루는 그 소문을 이웃에 사는 부옹(富翁)이 듣게 됐다. 부옹은 한자 그대로 돈 많은 노인이란 뜻이다. 오늘날 재벌 오너가라 생각하면 된다. 이 부옹이 소문을 듣고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웃 자린고비를 찾아 제안을 했다.; “자네 내가 황금 1000냥을 그냥 주지. 하지만 반년뒤에는 내가 자네를 두둘켜 패 죽인다면 그 황금 1000냥을 받겠는가?” 부옹의 말을 들은 자린고비가 짐짓 심각한 듯 반나
소원을 들어줄게, 돈 빌려달라는 소리만 빼고. 돈이 전부인 세상이다. 인류가 돈이란 걸 만들어내고 세상은 그렇게 변했다. 세상에 최초 돈이 등장한 이래 그랬던 듯싶다. 친구사이가 좋아 어떤 말도 못할 말이 없고, 들어주지 못할 사항이 없다고 해도 돈은 다른 문제다. 그런데 돈이란 게 무엇인가? 허상이요, 인간이 만든 제도일 뿐이다. 돈이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돈과 바꿀 수 있는 물건들이 가치 있는 것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돈이 생긴 이래 돈으로 바꿀 실물은 보지 못하고 돈만 본다. 진정한 자본주의는 가치의 척도로만 돈을 보는 태도다. 돈을 갖는 것은 실물을 갖는 권리만을 가질 뿐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옛날 한 마을에 두 자린고비가 절친으로 살았다. 하루는 두 친구 중 한 명이 병이 났다. 소식을 들은 친구가 병문안을 했다. 친구를 찾아보니 얼굴에 수심이 그득했다. 병 문안을 온 친구가 황급히 물었다: “아니 무슨 근심이 이리 병이 깊게 들도록 했는가? 무슨 일인지 말해주시게 내가 뭐든 해보겠네.” 아픈 친구가 힘없이 답했다: “아니 무슨 일이 있겠는가. 돈이 문제지. 내가 급히 쓸 일이 있는데 1000냥이 없다네. 혹 자네가 빌려준다면 일 처리가 끝
돈이 귀중한 게 아니라, 그 것과 바꾸는 대상이 귀중한 법이다. 돈이란 게 참 그렇다. 사람들이 가치를 정하기 위한 약속인데, 사람들이 그 약속에 목을 맨다. 돈을 위해서 뭐든 하려고 든다. 때론 실제 목숨도 돈과 바꾸려한다. 옛날 한 자린고비가 비가 오는 날 급히 도랑을 건너다 동전을 빠뜨렸다. 놀라 돌아보니 동전은 돌다리 사이에 떨어져있었고 저 멀리에서는 비에 강물이 갈수록 불어나고 있었다. 몸을 돌려 다시 돌다리로 가기에는 불어난 물에 휩쓸릴 위험이 컸다. 하지만 자린고비 눈에 돈이 먼저 보였다. 자린고비가 생각하길, ‘머뭇거리다가 자칫 물이 더불어나 동전을 찾을 수 없겠어!’ 모든 사람이 위험을 볼 때 자린고비는 기회를 본 것이다. 결국 자린고비가 몸을 날려, 돌다리 사이로 뛰어들었다. 손으로 동전을 잡는 순간, 거대한 물덩어리가 자린고비를 덮쳤다. 물 소용돌이에 휩쓸린 자린고비가 서너번 허덕이다 물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며칠 뒤 자린고비는 강 아래 나무통 위에 걸친 채 발견됐다. 이미 숨은 끊어진 채였지만 주먹을 꽉 쥔 손에는 동전 한 닢이 있었다. 사람들이 말했다. “아 이 사람 정말 동전 한 닢에 목숨을 바꿨구먼.” 돈은 결국 바꾼 것에 대한
얼굴 초상화를 그리면서 반만 그린다. 그럼 초상화라 할 수 있을까? 얼굴 반만 보이는 초상화는 초상화라 할 수 없다. 그렇다. 하나의 기준이다. 반쪽으로는 아무리 해도 하나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때론 반쪽은 누가 뭐래도 하나는 아니다. 물론 조금 모자랄 수도 있다. 실은 세상의 일이라는 게 그렇다. 완벽한 하나란 없다. 대부분 조금씩 모자라다. 하지만 그렇다고 반은 아니다. 반이 모자란 것은 절대 하나가 될 수 없다. 아무리 하나인척해도 하나는 아닌 것이다. 옛날 중국 시골마을에 자린고비 영감이 살았다. 하루는 초상화를 그리고 싶어서 화가를 청했다. 하지만 초상화를 그리는 돈이 아까웠다. 그래서 화가에게 말했다. “화가 선생, 보통 초상화 하나를 그리려면 얼마면 되요?” 화가가 말했다. “그게 잘 그리는 정도에 달렸지요. 상급이면 금화 10량, 중급이면 금화 5량, 하급이면 은화 10량이면 됩니다.” 말을 들은 자리고비 영감이 놀라 생각했다. ‘아니 무슨 초상화가 그리 비싸냐.’ 그리고 말했다. “음. 내가 실은 은화 5량밖에 없어서...그래서 말이요.” 그리고 잠시 말을 멈췄다. 말을 듣던 화가가 자리고비 영감의 뜻을 알아채고 말을 잘랐다. “
본래 준만큼 받는 게다. 투자한 만큼 버는 게다. 적게 주고 많이 받으려 하면 그게 도적놈 심보다. 주지도 않고 받으려 하면 그 건 뺏는 것이다. 강도 심보다. 옛날 동양의 한 마을에 자린고비 부자가 있었다. 하루는 천지인 삼신(三神)에게 복을 비는 제를 지내고자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음식이 아까웠다. 소도 잡고, 돼지도 잡고 닭도 잡는데, 정작 신이 먹는지는 불투명했고, 집안의 종복들이나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다 먹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를 의뢰하는 도사에게 슬쩍 물었다. “음... 이게 꼭 온갖 음식을 다해야만 하는가? 그러지 않고 제를 지낼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눈치 빠른 도사는 자린고비 부자가 무슨 심보로 그렇게 말하는지 금방 알아챘다. 그리고 말을 했다. “아이고 그럼요. 물로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도사는 제를 지내는 보수만 받으면 된다는 식으로 말했다. 말을 들은 자린고비 부자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아 그럼 바로 지내도록 하지.” 그리고 제삿날이 됐다. 도사 제상 가득 물을 받아놓고 기원을 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사상의 음식을 신께 바치는 의식을 시작했다. 도사가 말했다. “아 삼신이시여,
내게 필요 없는 걸 줘서 남을 기쁘게 한다. 이것만큼 좋은 관계경영의 좋은 전략이 없다. 뭐 언제나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대체로 이렇게 좋은 전략을 구사할 조건이 마뜩치 않은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 내게 필요 없는 경우는 남에게도 필요 없는 경우가 많은 때문이다. 자신이 없다고 남에게 필요없는 걸 주면 최악의 경우가 생길 수 있다. 흔히 쓰임이 다한 것을 ‘쓰레기’라고 하는데, 이 쓰레기를 스스로 치워야 하는 것인데, 그 것을 남에게 주면 청소의 부담을 떠넘기는 게 되기 때문이다. 옛날 한 자린고비가 이런 실수를 했다. 설을 맞아 한 자리고비가 평소 신세를 진 이웃집 선비를 찾아 인사를 했다. 자린고비는 빈손으로 가기 뭐하다며 화려한 장식이 된 달력을 선물로 가지고 길을 나섰다. 달력은 고급스러운 재질의 종이로 만들어져 있었고, 유명 화가의 그림이 장식된 것이었다. 문제는 지난 1년간 이 자린고비 서재에 걸려있었다는 점이다. 간단히 철이 지난 달력이었다. 길을 나서는 데 자린고비의 종복이 이를 이상히 여겨 물었다. “어르신, 들고 가시는 달력은 고급이긴 한데, 이미 지난해 것입니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그걸 선물하시면 안되지 않을까요
돈은 사실 허상이다. 사회적 약속이다. 진정한 재물은 돈이 아니라, 실물이다. 밥이요, 그 밥을 먹는 밥상이며, 의자가 재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돈만 본다. 돈이면 밥도 사고, 밥상도, 의자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것은 제도적 보장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다. 제도적 보장이 없다면 지폐는 종이에 불과하고, 동전은 구리 등 광물 조각에 불과한 것이다. 옛날 중국에 한 자리고비 노인이 살았다. 어느 날 비가 쏟아지는 여름에 노인이 개울을 건너다 그만 동전 하나를 빠뜨리고 말았다. 놀란 노인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얼른 개울물로 들어가 동전을 건지려 했다. 하지만 아뿔싸 그 순간 산 위에서 갑자기 불어난 물이 쏟아져 내려왔다. 동전을 집으려던 노인은 그만 개울물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말았다. 이틀 뒤 노인은 싸늘한 주검이 돼 발견됐다. 떠내려가다 나무 가지에 끼인 채 개울물이 빠지자 다시 떠오른 것이다. 차가운 손엔 그가 떨어뜨렸던 동전 하나가 꼭 쥐인 채였다. 사람들이 혀 끝을 차며 말했다. “아 이 양반, 정말 재물은 목숨처럼 아꼈구나!”
어디까지 탐할 것인가? 삶에서 가장 큰 고민이다. 어디까지가 욕심이고, 어디까지가 당당한 대가인가? 고전은 대단히 쉬운 답을 준다. “먼저 잃을 것을 살펴라!” 얻을 것에 현혹되지 말고, 잃을 것을 살펴서 잃을 것이 감당이 된다면, 그럼 욕심이 아니고 정당한 대가를 바라는 것이니, 일을 진행하라는 것이다. 옛날 한 돈에 눈이 번 부자가 있었다. 돈이라면 사죽을 못쓰는 것으로 천하에 소문이 났다. 하루는 소문을 듣고 수도의 귀족이 찾아와 거금을 내놓으며 부탁을 했다. “내 죄를 뒤집어 써주면 이 돈을 줄테니 어떤가?” 눈앞에서 수백만량의 황금에 벌써 눈이 돌아간 부자가 물었다. “어떤 죄요?” “중죄지.” 귀족이 답했다. 놀란 부자가 물었다. “아니 그럼 죽을 수도 있겠소?” 귀족 짐짓 태연한 듯 웃으며 말했다.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건 아니고 아닐 가능성도 있다네. 그리고 돈을 보게 이 돈으로 로비를 하면 목숨은 건지겠지. 그리고도 남을 돈이지 않은가?” 이미 돈에 눈이 먼 부자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좋소. 내 당신 죄를 사겠소.” 그리고 부자는 황금을 가지고 와 식구들과 함께 흥청망청 쓰기 시작했다. 소식을 들은 친구가 찾아왔다.
“바랄 걸 바래라.” 한자로 주어진 이상을 꿈꾸는 것을 기유(觊觎)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은 참 거시기하다. 시각에 따라 기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관계에서 대표적으로 이 기유가 나온다. 주는 사람 입장에서 “바랄 걸 바랄 일”인데,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당연히 받을 것을 바라는 것”일 수 있다. 또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옛날 중국에 인색하기로 유명한 마님이 있었다. 대략 10명의 시녀들을 데리고 살았는데, 얼마나 인색한지 시녀들에게 밥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시녀들을 항상 고픈 배를 안고 일을 해야겠다. 하루는 맏언니 격인 시녀가 꾀를 냈다. 퍼포먼스를 해서 자신들이 얼마나 충성을 하며, 얼마나 배고픈지를 알리자고 했다. 그래서 하루는 시녀들이 아침에 서북쪽 하늘을 보고 일렬로 입을 벌리고 섰다. 마님이 그 것을 보고 물었다. “아니 무슨 일인가?” 맏언니 시녀가 답했다. “안녕하십니까? 마님. 다른 게 아니고 옛속담에 ‘서북풍을 먹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저희가 서북풍을 마시는 법을 연습 중입니다. 그래서 배가 부를 수 있다면 밥을 축내지 않고 얼마나 좋겠습니까?” 중국 속담에 ‘서북풍을 먹다’는 말은 가난이 찌들었다
악덕 기업주에 속는 건 그의 말 때문만이 아니다. 그가 가진 재산, 휘황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고 희한한 게 너무 뻔한 일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속는다는 것이다. 마치 속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처럼 엉뚱한 사람의 말을 그대로 듣고, 그대로 따른다. 사실 그 말이 맞다. 속기로 마음먹은 탓이다. 모두가 나쁜 사람이라고 욕을 해도 믿고 따르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그가 가진 재산, 배경의 휘황함에 취한 탓이다. 옛날 악덕 자린고비가 있었다. 먼 길을 가는 준비를 하며 잔뜩 배부르게 식사를 했다. 남은 음식을 노비에게 주는 데 반만 그 것도 아까워 반만 먹도록 했다. 노비가 울며 사정했다. “아니 먼 길을 가는 데 배가 고프면 어떻게 마차를 끌겠습니까. 좀만 더 먹게 해주세요.” 악덕 자린고비가 나무 쇄기와 밧줄을 주면서 말했다. “아 걱정 말게. 이 두 가지만 있으면 배고플 일이 없네.” 결국 그렇게 노비는 고픈 배를 안고 길을 나서야 했다. 악덕 자린고비가 말했다. “그런데 자네 길을 가다 배고프면 ‘배고프다’하지 말고, ‘배가 아프다’하게.” 노비가 “왜 그러시냐? 물었다. 자린고비가 말하길: “아 다른 게 아니라, 그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