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耻下问 < bù chǐ xià wèn > 부 츠 시아 원 : 아랫사람에게도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시게 ! 공자 < B.C. 551 ~ B.C. 479> 가 한 말이다. " 정의가 행해지는 나라에 살면서 가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불의가 통하는 나라에서 부자라든지 지위가 높다든지 하는 것은 더욱 부끄러운 일이다." < 논어 태백 (泰伯)편 > 제자중 누군가가 물었다고 한다. ' 지금 00 나라에서 잘 나가는 00은 , 유명한 학당을 나와서 지식이 높거나 동창들이 짱짱한 것도 아니고, 대단한 뒷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이도 적지 않은데 왜 일 잘처리하고 똑똑하다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아요? ' 공자가 이렇게 대답했다 한다. ' 그 사람은 자기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에게도 항상 이것 저것 물어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쪽팔리는 것보다 모르는 것을 수치스럽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궁금한 것이나 모르는 게 있으면 주위에 나이를 불문하고 물어서 깨우쳐 실천하고, 항상 남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 말만 하는데, 어찌 사람들이 칭송하지 않겠느냐 ? ' 나이가 좀 많다고, 학년이 좀 높다고, 회사에 먼저 들어온 선배
코로나19의 판데믹상황하에서 대부분 언론의 관심은 확진자수와 사망자 수였다. 유사증상에 대한 검사를 받고, 또 감염자가 생명을 구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경제적 부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었다. 생명앞에서 돈 문제를 얘기하기가 멋적기도 했음직 하다. 그런나 현실은 가혹하다. 미국과 유럽 그리고 남미의 전염성이 높고 사망자가 많은 것도 사실은 검사와 치료관련 비용과 무관하지 않다. 그동안 국내언론을 종합하면, 미국의 검사비와 보통 수준의 치료비가 5-6백만원이상이라고 전해진다. 미국의 코로나 초기 중국에 업무차 갔다가 자택이 있는 마이애미로 돌아온 한 직장인은 나중에 독감으로 밝혀졌지만, 잭슨메모리얼 병원에서 받은 검사비와 독감바이러스 치료에 3,200달러, 약 400백만원을 청구받았다고 마이애미헤럴드가 전하기도 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SCMP)과 중국병원저널등에 따르면, 중국의 코로나19 검사비용은 400위안 (한화 약 6만 5천원) 내외이고 , 경증환자의 치료비 평균은 2,300~5,600위안 (한화로 최대 약 96만원)이지만, 관련비용은 거의 모두 중국정부가 부담할 것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중증이거나 생명이 경각에 달린 치명적인 환자에게는,
중국의 유명한 고사중 '자오삐 토우꽝' (凿壁借光 záo bì tōu guāng 착벽차광 ) 의 뜻은 이렇다. 가세가 빈곤하여 저녁에 불이 없어 책을 볼 수 없기에, 옆집과의 벽에 구멍을 내어, 그 사이로 들어오는 촛불의 희미한 빛으로 밤새 책을 읽고 면학에 힘쓴다"는 뜻이다. 한서( 汉书)인 시징자지( 西京杂记)에 나온 중국고사로, 기원전 200년 경 서한 ( 西汉) 의 대학자 쾅헝(匡衡) 이 어렸을 때 그렇게 공부해 뜻을 이루었다는 사자고사로, 90% 이상의 중국인들이 모두 다 아는 매우 익숙한 고사성어이다. 그런데 2천 년전 '벽에 구멍을 내어, 새어 나오는 빛으로 공부했다'는 이 고사가, 2020년 코로나 19가 엄습했던 중국 후베이성의 한 마을에서 '이웃의 와이파이를 빌어 공부한다'는 현대식 고사로 다시 태어나, 많은 중국인들사이에서 감동속에 회자되고 있어 소개한다. 후베이성의 대표신문, 후베이르빠오 (湖北日报)는, 올해 소학교 6학년인 12살 양징리학생의 감동실화를 사진과 함께 지난 5월 세상에 알렸다. 감동실화의 주인공인 양징리 학생은, 부모의 이혼후 69세인 할머니하고 단 둘이 벽촌에서 비록 가난하지만 성실근면하게 살고 있었는데, 코로나 19로
인민일보 몽고전문판이 초여름을 맞아, 세상에서 처음보는 내몽고자치구의 빠단지린(巴丹吉林) 사막가운데 보석같은 호수사진들을 게재했다. 위 사진들은 그 네이멍구의 자리잡은 빠단지린 (巴丹吉林) 사막 한가운데서 하늘을 담은 청정호수 누어얼투(诺尔图)호수의 모습을 인민일보가 촬영한 사진이다. 네이멍구자치구는 중국서북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데, 동쪽에서 서쪽끝까지의 직선거리가 약 2,400 km에 이른다. 이 네이멍구의 서쪽에 위치한 빠단지린 (巴丹吉林) 사막은 중국 8개사막가운데 하나로, 면적이 49,200㎢ (평방킬로미터)에 이른다. 서울과 인천 경기도를 합친 면적 11,850 ㎢ 의 약 다섯 배에 이르는 광대한 모래지대인 것이다. 이 빠단지린 사막의 일년 평균 강수량은 40mm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이하게도, 광대한 사막지대 안에 호수가 100개 이상이 존재한다. 위 사진의 사막봉우리 앞에도 큰 호수가 놓여있다. 이 호수는 앞에서 본 누에얼투 호수와는 또 다른 호수이다. 빠단지린 사막은 평균 해발고도 1,200m 이상의 고원에 위치하는데, 인민일보가 촬영한 이 모래봉우리의 이름은 비루투( Bilutu)봉 . 빠단지린 사막의 중심부에 위치하는 이 비루
의(意), 뜻이다. 마음 위에 있는 소리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소리다. 끝없이 들리는 마음의 소리다. 내 마음 속의 소리가 들리면, 수없이 끊임없이 들린다. 저절로 행하게 된다. 마음의 소리가 없어질 때까지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것, 그치지 않는 마음의 소리, 그 것이 바로 뜻이다. 의지(意志)다. 한자 의지는 다른 것이 아니다. 마음의 소리가 끊임없는 게 의(意)이고, 그 마음의 소리가 변치 않는 게 지(志)다. 의지란 마음 속 수많은 소리의 파편들이 하나가 되고, 그 것이 머물러 변치 않을 때 의지가 되는것이다. 순 우리말 그대로, 앞의 의도 뜻이요, 뒤의 지도 뜻이다. 의지란 그런 것이다. 마음 속 소리의 파편들이 하나로 형체를 이루고 머무는 것이다. 그 의지는 오래될수록 빛이 난다. 세월의 풍파와 마연(磨硏)으로 만들어지는 빛이다. 그런 의지는 사람과 동물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기억의 억(億)은 그런 생각을 담았다. 억은 소전(小篆)에 그 모습이 보인다. 개인적으로 봐도 갑골문에서 보이기에는 뜻이 너무 섬세하다. 사람 인 옆에 뜻 의가 있는 모양이다. 지금의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사람 인의 모양과 뜻 의의 모양이 현대화 됐을 뿐이다.
한자 명상이 던지는 난센스 퀴즈다. 세상에서 가장 긴 글자는 무엇일까? "생각 사(思)다." 어렵다면 어렵고, 엉뚱하다면 엉뚱하다. 말 그대로 생각하기 나름이다. 생각이란 게 본래 그렇다. 생각은 마음의 소리를 내기 전에 생기는 것들이다. 작은 물방울의 수를 세기 어렵듯 생각 역시 셀 수 없다. 작은 물방울이 그렇듯 홀연히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에서 불현 듯 솟아난다. 생각이다. 생각은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이다. 고 신윤복 선생의 평이다. 생각은 이성적 머리와 감성적 가슴 사이를 채우는 것인데, 그 둘 사이 차이가 그리 넓고 크다는 것이다. 사실 생각 사(思) 본래의 뜻이 머리와 가슴이다. 생각이라는 한자는 금문도 없고 전서에서 등장을 한다. 전국시대 들어 생각이라는 한자가 만들어져 쓰였다는 의미다. 마음의 소리인 뜻 의(意)자 있어, 생각이라는 뜻으로도 쓰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 뒤 마음의 소리가 의지의 뜻으로 쓰이면서 다른 마음의 잡음들을 뜻하는 한자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오해를 사지 않으려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게 있다. 필자는 학자가 아니어서 학문적 검증을 통해 주장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저 자료를 통해 얻은 생각들을 공유하고자 이글을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形, 高下相盈, 音聲相和, 前後相隨, 恒也 (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형, 고하상영, 음성상화, 전후상수, 항야) 노자의 가르침이다. 세상은 조화다. 차가움이 있기에 따뜻함이 있음을 우리가 안다. 생명은 물체지만 아무것도 없는 빈 곳에서 나온다. 이룸이란 쉽고 어려움이 뒤섞인 것이다. 한 가지 높이, 한 가지 색으로만 모양을 만들 수 없다. 낮은 게 있어 높은 게 돋보인다. 바탕이 있어 위에 놓이는 색이 도드라지는 것이다. 값이 정해진 소리만으로 노래가 나오지 않는다. 음과 음을 이어가는 소리, 때론 떨림의 소리가 있어 노래가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내가 뒤에 서지 않으면 내 앞에 서는 이도 없다. 네가 내 뒤를 따르지 않으면 내가 앞에서는 일도 없다. 따름이란 누군가가 앞서기에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누구가가 따르기에 전후가 있는 것이다. 조화가 바로 아름다움이다. 영원한 것이다. 반대로 유나 무만 있으면 생명이 없고, 쉬움이나 어려움만 있으면 이룸이란 있을 수 없다. 긴 것만 있고 짧은 것만 있으면 모양이 나오지 않는다. 높음만 있고, 낮음만 있으면 어찌 충일이 나오겠는가? 음만 있고, 바이브레이션만 있으면 노래가 아
一片丹心 한 사람이 평생을 산을 좋아했다. 정상에 오르면 돌을 하나씩 쌓았다. 작은 기도와 함께 그렇게 돌에 돌을 하나씩 얹었다. ‘오늘도 이렇게 산을 오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게 해주세요.’ 작고 평범한 기도였다. 때론 행복을, 때론 건강을, 때론 자신을, 때론 가족을, 지인을 위한 것이었다. 작은 돌은 그렇게 또 다른 작은 돌 위에 쌓였다. 쓰러지지 않게 조심스레 놓았을 뿐이다. 일 년이 지나 돌은 돌 위에 조금씩 자라 키가 커졌다. 탑이 됐다. 탑 모양이 되자 탑은 저절로 자라기 시작했다. 산이 좋아 산에 오른 사람들이 탑을 보고 하나둘씩 돌을 얹기 시작한 것이다. 돌탑은 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았다. 허술해 보이는 수많은 작은 구멍 덕이었다. 구멍 덕에 돌탑은 바람에 저항하지 않을 수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그대로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수십 년이 지나 처음 돌을 얹은 이는 이제 더 이상 산을 오르지 못했다. 그런데도 탑은 더 자랐다. 탑 옆에 아들, 딸 탑도 생겼다. 탑 가족이 됐다. 산이 좋아 오른 이들의 작은 마음 한 조각이 그렇게 돌로 탑이 됐고, 탑의 가족이 됐다. ‘누구의 뜻이 이리 간곡한가.’ 매번 산행에서
"블루, 레드, 화이트" 1994년 나온 프랑스 영화다. 자유(블루), 박애(레드), 평등(화이트)을 주제로 했다는 뭔가 철학적인 수수께끼 같은 영화였다. 사실 영화 내용을 보면서 왜 자유이고, 박애이며, 평등이 주제였는지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오래돼 내용도 잊었지만, 사색적인 도전을 던진 탓에 영화의 편린들이 아주 오래 남았다. 무엇보다 세 영화 중 백미는 첫 개봉된 블루다 싶다. 영화 전반적인 색감과 음악적 감성, 누가보다도 예술적이다 싶은 몽환이 서려있다. 특히 이지적인 줄리엣 비노슈의 고급 진 매력이 풀풀 넘친다. 동양의 우아함의 서구적 표현이다. 세 영화는 독특한 인생을 경험하는 이들의 이야기로 각기의 주제를 풀어간다. 그러면서도 영화 속 인물들은 한 시대를 살아 한 영화 속에서 모두가 동시에 등장하기도 한다. 더욱 재미있는 게 영화 속에 등장하는 ‘병을 버리는 노인’이다. 영화를 보다 그냥 스쳐 지나가기 딱 좋은 아주 짧은 순간에 등장한다. 안 그래도 작은데 허리가 굽어 더욱 작아 보이는 노인이 어렵게 손을 뻗어 병을 분리 수거통에 버린다. 정확히 버리기 위해 허리 굽은 노인은 한동안 애를 쓴다. 겨우 병이 버려지는 순간 장면은 바뀐다. 주인공들
저 고산 절벽에 자란 고송(孤松)은 아름답다. 직각의 가파른 절벽에 붙어 뿌리를 내리고 조금이라도 더 빛을 받으려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자란 ‘기형의 몸’이지만 아름답다. 살려했고, 살아남아 있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살아남아 그 어떤 키 큰 소나무보다 더 멀리 보고, 더 태양과 가깝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살고자 하는 뜻을 이뤘기에, 매일의 일출이, 석양이 새로운 것이다. 살고자 하는 뜻을 이뤘기에, 기형의 몸이 저 아래 평범한 언덕 위에서 하늘로 쭉쭉 벋은 자태를 자랑하는 어떤 소나무보다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 뜻이 드물기에 귀한 것이다. 뜻 지(志)는 이렇게 마음이 그쳐 머무는 것을 말한다. 지금은 선비 사(士) 아래 마음 심(心)을 쓰지만 본래 뜻 지는 그칠지(止) 아래 마음 심을 썼다. 마음이 그친 곳이 바로 뜻인 것이다. 마음이 그쳐 변치 않는 곳이 바로 뜻인 것이다. 그런데 묘한 게 마음이란 존재다. 내 것인데, 내 마음대로 안 된다. 내 맘인데 남의 뜻만 따른다.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게 마음인데, 주머니 돌보다 가볍게 주어지는 게 맘이다. 또 이미 줬다 싶은 데 다시 돌아와 있는 것도 맘이다. 그래서 이백은 아무리 정숙한 여인이라도 봄바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