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바라는 게 있다. 행복이요, 행운이다. 하지만 행복이 뭔지, 행운이 뭔지 정작 바라면서 그게 뭔지 모른다. 그러니 진정 행복이, 행운이 뭔지 사람들은 모른다. 그게 뭔지 모르니 와도 그게 뭔지 알 길이 없다. 모르니 왔다한들 붙잡을 길도 없다. 왔는지, 스쳐 지나쳤는지. 모르고 그저 바라는 게 행운이요, 행복이다. 왔는지, 갔는지 모를 행복, 행운을 한 없이 바라기만 하니 행운이 올 일이 없고 행복할 일은 더더욱 없다. 수천년 경험 속에 선인들이 남긴 진정한 행운, 행복을 얻는 비법이 있다. 비밀은 바로 행(幸)자에 있다. 갑골문 행(幸)은 상형자다. 어떤 물건을 본 딴 것이다. 진정한 행복의, 행운의 비밀을 담은 물건이다. 행 자가 본 딴 물건은 바로 수갑이다. 나무와 밧줄로 만든 고대의 수갑이다. 가운데 밧줄 부분에 손을 넣고 양쪽 막대 손잡이를 잡아 당기면 손이 묶여 움직이지 못하는 수갑이다. 수갑이 어떻게 행운이요, 행복일까? 학자들은 모양이 비슷한 수갑의 글자와 길하다는 뜻의 글자가 서로 혼용해 쓰인 결과라 한다. 하지만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런 혼용 덕에 행운에 대한 절묘한 철학적 가르침이 행운의 행(幸)에 깃들게 됐다. 돌이켜 보라. 행
“变”2号线 “Biàn ”2hào xiàn 2호선 지하철로 변해요 我想去前门,可是不知道怎么做地铁。... Wǒ xiǎng qù Qiánmén, kěshì bù zhīdào zěnme zuò dìtiě. 치엔먼에 가고 싶은데, 지하철을 어떻게 타야할지 모르겠어요. 我知道,你先坐13号线到西直门。 Wǒ zhīdào, nǐ xiān zuò 13hào xiàn dào Xīzhímén. 나 알아요. 먼저 13호선을 타고 시즈먼에 가서, 然后你在那变成2号线。 Ránhòu nǐ zài nà biànchéng 2hào xiàn. 2호선으로 변하면 되요. 家荣,你是魔术师吗? Jiāróng, nǐ shì móshùshī ma? 찌아롱, 마술사에요? *한국에서도 지하철을 갈아탄다고 말하듯이 중국에서도 지하철을 변경하다고 표현하지 않고 바꿔탄다고 말한다. ‘지하철 2호선으로 갈아타다 ‘는 중국어로 ‘换乘地铁2号线’으로, ‘变成’이 아닌 ‘换乘(huànchéng)’을 써야한다. >>맞는 문구: 然后你在那换乘2号线。 作者:刘志刚 画家:宋海东
혀를 바늘로 찌른 것, 그게 말이다. 그런 말을 사람이 하는 게 믿음이다. 생각은 내 것이지만 말은 내 것이 아니다. 어떤 생각도 말이 돼 입 밖에 나아가지 않는 한 언제든 변할 수 있다. 입 밖에 나온 말이 바뀌면 믿음이 있을 수 없다. 그런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다. 의미 없는 짐승의 소리다. 갑골자 언(言)은 입 위에 바늘이 있는 모습이다. 입을 바늘로 찔러 메모판 위에 고정해 놓은 듯 싶다. 마치 어느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 연인의 약속, 그 약속들이 가득히 적힌 메모 조각을 핀으로 꽂아 놓은 메모판 그런 메모판처럼 입이 내뱉은 말을 핀으로 ‘콕’ 고정한 모습이 바로 바로 말씀 언(言)이다. 중국에서는 언(言)이 입에서 혀가 위로 치솟아 음을 내는 것이라 풀이도 한다. 하지만 혀 설(舌)이 이미 있어 그 설명은 좀 구차해 보인다. 설은 입의 바닥을 찾는 모습이다. 말씀 언(言)과 같이 쓰였던 음(音)의 모습을 보변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음(音)은 입 구(口) 속의 점, 혀를 바늘로 찔러 고정시켰다. 한 말을 적은 메모지를 벽에 핀으로 고정한 게, 말하는 혀를 고정시켜 바꾸지 못하게 한 게 언(言)이요, 음(音)이다. 그런 말을 사람이 하는 게 믿
“变”名字 “Biàn” míngzi 이름을 변경해요 老师,你可以给我变名字吗? Lǎoshī, nǐ kěyǐ gěi wǒ biàn míngzi ma?... 선생님, 제 이름을 변경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变名字? “Biàn” míngzi? 이름을 변경하다니요? 是啊,我不喜欢我的中文名字,我要你帮我变名字。 Shì ā, wǒ bù xǐhuan wǒ de Zhōngwén míngzi, wǒ yào nǐ bāng wǒ biàn míngzi. 제 중국어 이름이 마음에 안 들어서요, 선생님이 변경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我真不会变啊! Wǒ zhēn búhuì biàn ā! 이름을 어떻게 변경할 수 있겠어요! *기존의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바꿀 때에는 ‘바꾸다’라는 뜻의 ‘换(huàn)’을 써야 한다. ‘变’은 ‘변경하다’라는 뜻이다. >>맞는 문구: 老师,你可以给我换个名字吗? 作者:刘志刚 画家:宋海东
‘욕망하라’ 그게 사는 게다. 그게 활(活)이다. 침 흘리는 게다. 하지만 사는 건 그게 다가 아니다. 욕망만 해서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욕망만 해서는 사는 게 텅 비워진다. 욕망은 비워지는 것이다. 배고픈 것이다. 욕망하되 채우는 것 그게 바로 사는 게다. 욕망으로 비워진 속을 채우는 것 고픈 배를 채우는 것 바로 삶이다. 욕망하고 채우는 것 그게 삶이다. 잘 욕망하고 잘 채우는 것 그게 잘 사는 길이다. 욕망을 채우는 것 바로 만족이다. 만족(滿足), 만 개의 다리다. 천수관음의 손 같은 만 개의 다리다. 천수관음의 손처럼 가득 채움의 또 다른 표현이다. 족(足)은 다리요, 채움이다. 족은 일찌감치 갑골자에 등장한다. 여러 모습이다. 하지만 모두 누가 봐도 다리다. 다리에서 ‘걷다’는 뜻이 나왔고, ‘채우다’는 뜻이 나왔다. 만족(滿足)이란 뜻의 족(足)은 노자에서 등장한다. 비움과 채움의 철학이 바로 노자의 철학이다. 만족의 등장은 너무 당연해 보인다. 노자는 “祸莫大于不知足”(화막대우부지족) “만족을 모르는 만큼 화가 온다” 했다. 만족과 그침을 같은 뜻으로 쓴 이가 바로 노자다. 장자는 족을 부유하다는 뜻까지 확장해 썼다. 그렇게 족은 욕망의
누가 처음에 마음을 봤을까? 호기심이었을까? 사이오패스의 살의(殺意)였을까? 누군가는 사람의 가슴을 갈랐고, 손을 집어넣어 마음이 있을 법한 곳의 장기를 꺼내 들었다. 가슴을 뛰게 하는 것, 삶의 시작이고 죽음의 시작인 곳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곳 그 곳에 있는 핏물 흐르는 장기 심장을 꺼내 들었다. 문자 마음 심(心)은 해부학이다. 추상의 실체를 보여준다. 심방과 심실을 마치 사진처럼 사실로 그렸다. 일본의 시라카와 시즈카 교수처럼 마음 심(心)자를 제물로 사람을 바치던 잔재라 보는 이들도 있다. 생각은 머리에 있고 느낌은 가슴에 있다 믿었던 시대 사람의 심장은 인간적 인식의 근원이었다. “머리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느끼라” 는 말은 이런 생각에서 나왔다. 마음은 하나요, 백이다. 하나같은 백요, 백 같은 하나다. 하나인 듯 백이고, 백인 듯 하나다. 그래서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 모든 게 마음에 달렸다.) ‘일이관지’(一以貫之: 하나로 꿰뚫는다.) 라 했고, 나아가 ‘관조’(觀照: 비춰봄)의 경지로 모아졌고 모든 게 마음에 달렸다. 양명의 심학(心學)으로 다시 풀어졌다. 인식되지 않는 세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모든 게 결국 마음에 달렸다.
사는 게 뭐냐 물으신다면, 시집의 제목이다. 누구누구 시인들이 비슷한 시를 썼다. 사는 게 뭐냐 물으신다면, 철학의 주제이다. 누구누구 철학자가 한 움큼 글을 썼다. 사는 게 뭐냐, 그리도 모두가 그리도 되묻는 질문이다. 도대체 사는 건 무엇일까. 사는 건 가장 저속하고 가장 더러운 사는 건 그런 저속하고 그렇게 더러운 것이며, 그런 것들과 함께 같이 하는 것인지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뱃속에 똥을 담고 산다. 아무리 몸을 닦아도 뱃속의 똥은 남는다. 살아 있다는 건, 그렇게 뱃속 가득 똥을 담고 있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신진대사를 한다는 것이고 뱃속에 똥이 더 만들어지지 않으면, 그래서 더럽지 않으면 산 게 아니다. 죽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가까이 할수록 냄새가 나고 더러운 게 보이는 법이다. 가까이 갈수록 못된 점이, 단점이 보이는 게 사람이다. 진정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건 바로 그런 똥 냄새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참고 견디다 그 냄새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초(醜)두부, 된장처럼 심지어 과일의 여왕이라는 두리안처럼 처음엔 고약한 냄새로 괴로워하다가 맛을 들여, 나중에는 냄새만 맡아도 침을 흘리는 게 바로 누구를 좋아하고 누
한자는 사람에게 “그저 살으라”라고만 한다.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가?’ 누군가 저 강의 달을 처음 본 뒤 강물처럼 흘러간 수많은 인간들이 던진 질문이다. ‘인간, 너는 누구냐?’ ‘인간, 나는 도대체 누구냐?’ 또 강물처럼 흘러간 수많은 인간들이 수많은 답을 남겼다. 남긴 답이 런던 국립도서관 철학 서고를 전부 채우고도 남는다. 아직도 그 답을 하는 책이 교보문고에 등장을 한다. 답에 대한 해설서도, 답에 대한 평가서도 줄줄이 나왔다. 보다 정교한 답을 위해 질문도 ‘인간의 사유란 무엇인가?’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가?’ … 등등으로 수없이 쪼개지고 나뉘어졌다. 그 답들도, 그 답에 대한 답들도 산을 이룬다. 사실 한자로 치면 사람 인(人)자보다 단순한 게 없다. 하나 일(一) 다음으로 쉽다. 둘 이(二)만큼 쉽다. 왼쪽, 오른쪽 단 두 획이면 인(人)자 하나가 써진다. 너무 쉬워서 수많은 서예가들을 곤란하게 한 게 바로 사람 인(人)자다. 예쁘게 쓰기 어렵고 크게 쓰기 어렵다. 잘 쓰기 어려운 것은 그 쉬운 글에 너무도 복잡한 사람 인(人)의 일생이 담긴 때문이다. 그래서 오른쪽 획은 인의 품(品)이요, 왼쪽 획은 인의 격(格)이라 했다. 일생일세, 평생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는 것 그래서 목마른 자를 기쁘게 하는 것 그게 바로 다스림이다. 세상이 목마른 자에게 필요한 것은 돈도 집도, 명예도 아니다. 바로 물이다. 갈증을 풀어줄 물이다. 그게 진정한 다스림이다. 한자 그대로의 의미다. 다스릴 치(治)는 갑골자는 없다. 금문에서야 등장한다. 흐르는 물가에 사람이 입을 열고 기뻐하는 모습이다. ‘厶’는 ‘스’ 또는 ‘모우’라 읽는다. 갑골자 기호다. 본래 여성의 은밀한 부위를 상징했다. 결혼해 부부만 나누는 것을 의미했다. 훗날 공동체 농사를 지어서 개인이 갖는 몫이란 의미가 더해졌다. 화(禾)를 더해 사(私)가 됐다. ‘厶’는 개인, 개인의 이익 개인의 즐거움이란 뜻이다. 그 아래 있는 게 입 구(口)다. 만족의 입, 웃음의 입이다. 물 가 옆의 태(台) 역시 금문에 등장한다. 금문에서 의미는 위의 풀이처럼 기쁘다는 뜻이다. 목마른 자가 물을 만났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갑골문의 요순(堯舜) 시대만 해도 평등의 사회였는지 모른다. 임금은 봉사자였지, 군림자(君臨者)가 아니었다. 곳간지기가 귀족이 되고 그 귀족이 왕이 됐다. 왕들 사이에 황제가 나왔다. 하지만 백성은 여전히 백성이고 목마른 자다. 귀족이
‘바르다’ 곧다, 밝다는 의미다. 그런데 곧고 밝은 게 무엇일까? 다른 질문이 아니다. 간단히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우리 사회의 최대 화두이기도 하다. 문제는 간단한데, 답은 쉽지 않다. 누구는 이 질문에 책을 한 권 썼다. 곧고 밝은 것, 자연 현상이라면 쉽지만 사람의 일이라 설명이 쉽지 않다. 사람의 일 가운데 무엇이 곧고 밝은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곧고 밝은 걸 아는가? 역시 책 한 권은 나올 질문이다 싶다. 그런데 갑골문의 해설은 쉽다. 간결하고 명료하다. 갑골문에서 바를 정(正)은 어느 점을 향해 나아간 발의 모습이다. 점이 보이고 아래 발이 보인다. 간결한 선으로 너무도 분명히 발을 표현했다. 왜 발일까? 축구 선수나 농구 선수를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두 선수 모두 경기에서 앞으로 나가는 것을 속여야 할 때가 있다. 이 때 몸을 틀기도 하고, 시선을 돌려 보는 시늉으로 상대방에게 나아갈 바, 나아갈 곳을 속인다. 하지만 정말 속이지 못하는 게 있다. 발이다. 발은 앞으로 향하면 그 곳이 앞이다. 뒷걸음질을 하지 않는 한, 발은 사람이 나아가는 방향이 어딘지 정확히 보여준다. 발이 마주 보는 곳이 앞이다. 정면(正面)이다. 몸을 비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