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공간의 변화다. 공간이 있어 시간은 시작된다. 공간이 시간이며 시간이 공간이다. 한 공간의 변화, 공간 한 부분의 변화가 바로 시간이며 일이다. 일의 단위다. 일은 하나의 변화이다. 변화가 시간이니, 결국 일은 시간이다. 시간은 모두 세 종류가 있다. 하늘의 시간 땅의 시간 사람의 시간이다. 하늘의 시간은 항상 그렇다. 해는 항상 하루 만에 떠서 지고 달은 항상 한 달에 차고 기운다. 땅의 시간은 반대다. 항상 그렇지 않다. 하루살이는 하루를 일생으로 살고 일년생 풀은 열두 달을 일생으로 산다. 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이는 50세를 못넘기고 어떤 이는 90세를 누린다. 같은 나무라도 어느 나무는 수십년을 살고 어느 나무는 수백년을 산다. 땅의 모든 것의 한 생은 제각기지만, 각기 누군가가 정하여준 듯 그렇게 각자의 일생을 산다. 운명이라고 부른다. 한 나무는 한 나무의 운명을 따르고, 한 사슴은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다. 다만 이 땅의 모든 시간 이 땅 모든 객체의 운명은 하늘의 시간에 하늘의 운명에 수렴한다. 하늘의 따라 결국 하늘의 시간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옛 선인들은 하늘의 시간을 항상 그렇다고 해 항(恒)이라고 하고 땅의 시간을
대로 양변을 가득 채운 군중이 환호를 한다. 왕정시대에는 왕의 행차가 그 사이를 걸었고 전쟁에 나가 승리한 군대가 나라에 큰 공을 세운 관료가 그 사이를 걸으며 대로 양변 가득한 군중의 환호를 받았다. 요즘도 건국기념일의 군 열병식이, 국제무대에서 공을 세운 운동선수의 퍼레이드가 가끔씩 열려 대로 양변 가득한 군중의 환호를 받는다. 환호와 함께 하늘에선 바람결에 종이꽃이 흩날린다. 군중의 환호는 군중의 칭찬이다. 온 나라의 칭찬이다. 바로 덕(德)이다. 덕은 별다른 게 아니다. 모두가 칭찬하는 일을 하는 게 덕이다. 공부를 잘한 학생이 선생의 칭찬을 듣고 효를 다한 자녀가 부모의 칭찬을 받는 그런 개인적인 칭찬이 아니라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런 큰 칭찬이다. 모두를 이끌어가는 칭찬, 그게 바로 덕이다. 그래서 덕은 고대에 더욱 중요했다. 일찌감치 갑골문에서 등장한다. 갑골문의 덕은 사거리의 행(行)과 장식을 단 눈(目)의 결합이다. 어떤 이는 장식을 단 눈을 직(直)으로 보기도 한다. 금문에 오면서 마음 심(心)이 더해졌다. 그런 칭찬을 듣는 마음일까, 아니면 그런 칭찬이 사로잡는 군중의 마음일까. 사실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마음 심(心)이 더해지면서
천지(天地)간에 사람이 유별난 이유다. 사람만이 동(同)할 수 있다. 동(同)할 수 있기에 천지간 사람이 유일한 것이다. 맹수도 여럿이 무리지어 사냥을 하고 양떼도 무리지어 서로를 보살피지만 오직 천지간 사람만이 무리짓기를 넘어 동(同)할 수 있다. 동(同)이란 구령에 맞춰 노를 젓는 것이다. 배(舟) 아래 있는 입(口)이 동이다. 일찌감치 갑골자에 나온다. 초기 갑골자 중에는 배의 노를 젓는 손 모습이 나온다. 사람이 그리도 일찍 손과 손을 합쳐 배를 저었던 것이다. 일찌감치 손과 손을 합쳐 구령에 맞춰 논밭을 일구고 건물을 짓고 산을 개간하며 바다를 간척해 세상에 없던 새것을 만들었던 것이다. 우공이산(愚公移山:바보 노인이 산을 옮기다)의 고사도 동(同)의 의미에 담겨 있다. 4명의 손이 모여 배를 움직이며 40명의 손들이 모이면 들의 바위를 옮기고 400, 4000명의 손들은 물줄기를 바꾸며 4만, 4억 명의 손들은 산 하나를 옮기는 것이다. 동(同)의 조건은 하나의 구령을 따르는 것이다. 하나의 구령만 있고 나머지 모두는 손이어야 한다. 그래야 동(同)은 결실을 맺는다. 구령이 멈추면 손들은 다툴 수밖에 없다. 서로 먼저 내밀려 혹 서로 감추려 혹 각
마음에 담는다. 잊지 않겠다는 말인데, 이 말처럼 무서우면서도 다감한 말이 있을까? 좋은 일을 잊지 않겠다고 하면 반드시 감사하겠다는 뜻이지만 반대로 나쁜 일을 잊지 않겠다고 하면 반드시 보복을 하겠다는 의미가 된다. 마음이란 말은 그만큼 의미가 깊다. 마음에 무엇을 담느냐에 그 사람의 성향도 달라진다. 주로 좋은 일을 담으면 그 사람은 선한 사람이 되고, 주로 나쁜 일을 담으면 독한 사람이 된다. 그래서 마음에 무엇을 담을지 신중하게 노력할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어느 사람이 좋은 일만 마음에 담고 살고, 나쁜 일만 마음에 담고 살까. 누구나 조금씩 좋은 일을 담고, 나쁜 일도 담고 그러고 산다. 다만 스스로를 수양해 다스려 노력할 뿐이다. 한자의 마음 심(心)에는 이 같은 이치가 담겨 있다. 마음 심(心)은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정밀한 상형문자다. 사람의 심장을 실물에 맞게 가장 잘 추상화했다. 두 개의 심방과 두 개의 심실 모습이 보인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심장의 핏줄이 3개라는 점이다. 심(心)자 속의 3개의 점은 마치 이 핏줄마저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가끔 글자를 만들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심장을 직접 봤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섬뜩함마
스스로 있기에 남과 다르고, 달라서 새 합이 되는 것이다. 소리가 다르기에 화음이 되고 노래가 되는 것이다. 본래 자연(自然)이란 무엇인가? 스스로 자(自), 그럴 연(然)이 자연이다. 스스로 같은 게 각자의 존재가 가장 자연스러운 게 바로 자연인 것이다. 산이 산 같으며 강이 강과 같고 하늘이 하늘 같은 것이다. 돌은 돌이요, 나무가 나무이며, 새는 새요, 풀은 풀인 게 자연인 것이다. 내가 나 같고, 너가 너 같은 게 바로 자연인 것이다. 그런 스스로인 존재 하나하나의 모임이, 합(合)이 바로 자연인 것이다. 합은 다른 두 입의 ‘키스’다. 자연이 존재의 ‘키스’인 셈이다. 다르기에 어울리는 게 자연이다. 자연은 사물의 어울림이요, 화(和)는 소리의 어울림이다. 화(和)는 사람이 낸 첫 소리다. 벼를 수확해 먹고 난 뒤 입에 문 벼의 줄기를 불어 낸 소리다. 농경이 뿌리를 내린 금문시대, 주나라 이후 중요한 단어가 된다. 가장 원초적인 배고픔을 해결한 뒤 가장 원초적인 만족의 상태에서 불어낸 첫 풀피리다. 만족의, 행복의 소리다. 나도, 너도 만족한 뒤, 불어내는 ‘만족의 소리’다. 만족의 양, 만족의 기준은 서로 달라도 모두가 만족해 부는 풀피리 소리다
승(勝)과 패(敗) 이긴다는 것과 진다는 것 둘 가운데 무엇이 더 중요할까? 이기는 것? 지는 것? 전쟁의 신이라는 손자(孫子)는 정말 엉뚱한 것을 꼽았다. ‘지지 않는 것’ 손자가 꼽은 것은 ‘지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는 손자병법에 설명이 나온다. 간단히 정말 이기기 위해서다. 왜 지는 지 어떻게 지는지를 알아 지지 않을 수 있는 때문이다. 그래서 이기는 것보다 지는 게 더 중요하다. 실제 한자 세계에는 승보다 패가 앞서 존재를 했다. 패는 기원전 1500년 전 은나라 갑골문자가 있지만, 승은 그 뒤 1000전 뒤인 춘추전국 시대 금문 대전부터 나온다. 물론 승의 갑골자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최소한 패는 단순하지만 이기는 승은 복잡하다. 패는 돈, 이익을 상징하는 조개가 둘로 쪼개지는, 부서지는 모습이지만 승은 소전과 대전의 글자가 완전히 다르다. 소전은 고기가 자라는 것. 돼지 등 가축이 살이 오르는 것이지만 금문대전은 배를 조정하는 모습이다. 배 모양 옆에서 조정대를 잡은 여러 손이 보인다. 배를 가도록 하는 손 이긴다느 승의 본래 모습이다. 중국 해석은 큰일을 맡아 이뤄내는 것이라고 풀이를 한다. 대전의 글자가 번자의 승(勝)이 됐고
“무엇이 좋은가?” 참 묘한 질문이다. 단순한 질문인데, 대부분 즉답(卽答)없이 머뭇거린다. 묘한 질문이 또 있다. “내게 어울려?” 자신이 입을 옷인데 친구에게, 가족에게 묻는다. 가장 가까운 이에게 묻는다. “‘품위’(品位) 있다.” 흔히 성품(性品)이 고아(古雅)한 사람을 이른다. 한 사람만 “그렇다”하면 동의하는 사람이 적을 수도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그렇다”하면 동의하는 사람이 는다. 세 사람이 “그렇다”하면 대부분이 동의를 한다. 거짓말도 마찬가지다. 삼인성호(三人成虎)의 고사가 있다. 한 명이 “호랑이가 나타났다”하면 믿는 이가 적지만 두 명이 “호랑이가 나타났다”하면 믿는 이가 늘고 세 명이 “호랑이가 나타났다”하면 대부분이 믿는다는 말이다. 한비자와 전국책에 나온다. 증삼살인(曾參殺人)의 고사도 있다. 공자의 제자 증삼은 인품이 고결(高潔)하기로 유명했다. 모두가 “품위 있다”고 인정을 했다. 그의 모친은 그런 아들을 믿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사람 와 “증삼이 살인을 했다”고 했다. 모친은 코웃음도 치지 않고 무시한 채 베틀을 짰다. 또 한 사람이 와 “증삼이 사람을 죽였다”고 했다. 모친은 애써 무시를 하고
참 묘한 게 정(情)이다. 미움이라 알았는데, 마음 깊이 남은 게 사랑이라 알았는데, 열정 끝에 남은 게 바로 정(情)이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 속 희망처럼 마음의 바닥에 농축되고 응집돼 내 마음의 끝에 남은 게 떠나지 않고 머무는 게 바로 정(情)이다. 정(情)이란 게 그렇다. 그래서 “사랑해” 보다 깊고, “미워해” 보다 애틋하다. 그래서 “사랑해”를 “미워해”와 같은 뜻으로 만들기도 한다. 정이란 게 그렇다. 사랑과 미움이 오랜 교차로 농축된 감성이다. 푸른 마음이다. 맑은 마음이다. 마음, 심(心)이 푸른(靑) 게 바로 정(情)이다. 마음, 심이 맑은 게 바로 정이다. 푸른 마음, 맑은 마음이 바로 정이다. 복잡한 개념이라 갑골문엔 없고 금문도 금문 대전에서 나온다. 푸른 나무를 비추는 우물 옆의 마음이다. 마음이 나무와 같이 맑은 우물에 비취는 게 정이다. 정은 사랑과 미움, 그 극한 두 감정의 정화요, 그 극한 두 감정을 세월로 농축한 진액이다. 그래서 사랑보다 애틋한 게 다정(多情)이요, 미움보다 무서운 게 무정(無情)이다. 그래서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정이고 미움의 반대가 사랑이 아니라 다정이다. 이별이 그리 슬픈 건 사랑해서 미워해서
오분전 편집장: 아 ‘개기자’ 어째 그랴? 뭔 일이여? 개기자: 멍멍. 멍멍멍! 으르릉! 오분전 편집장: 아이 참, 천천히 말혀야 알아듣지. “멍, 아 미안혀유. 이게 흥분이 돼서” 첫 뉴스 고상하게 시작혔는디, 참 미안혀유. 중국 정말 개판이네요. 이 사진 한번 보셔유. 아니 이게 사람이유, 동물이유? 목에 쇠고랑차고 사람이 사람에게 어찌 이런데유? 우리 개도 개끼리는 안그려유. 사람이 사람에게 이래도 되는감유? 이건 아니쥬? 아니쥬? 이게 중국에서 나온 사건이래유? ‘장쑤성 여덟 아이 엄마’ 사연이네유. 아니, 그냥 여성도 아니고 여덟 아이 엄마해유. 음. 그런디 어찌 여덟 아이나 낳았을까? 중국에서는 불과 1년 전만해도 한 자녀 이상 낳지를 못혔는디 말이쥬. 사연이 많아 보이쥬. 그려유. 이게 참 눈물 없이 들을 수가 없슈. 개도 그런데 인간이 안 그러면 ‘개만도 못한 거유’, 아시쥬? 나 아주 화난거유. 정말 할 말이 없슈. 본래 이 이야기는 미담이었슈. 지난 1월말 장쑤성 펑셴현 산골 농가에서 여덟 아이를 키우는 아빠의 사연을 한 온라인 매체가 찍은거유. 그런데 이 동영상에서 위 사진의 장면이 등장한거유. 사진 옆에 손만 보이는 사람 보이쥬? 이 사
<소개> 일찌감치 미국에서 태어나 중국에 입양됐던 도그 드 보르도(Dogue de Bordeaux) 애완견 ‘독고’의 종횡무진 취재입니다. 인간을 향한 ‘견성(犬聲) 일성’을 담았습니다. 독고는 세계 최강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태어났습니다. 미국 국적의 애완견입니다. 그러나 인생(人生)이 예측불가인데, 견생(犬生)은 오죽할까요. 독고는 어쩌다 미국에서 노동을 하던 중국 중산층 가정에 입양됐습니다.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고 태어나 사회주의 가정에서 길러진 것입니다. 독고는 주인 가족과 중국으로 돌아가 중국의 ‘실수’(중국의 굴기, 경제적 성공을 서방 차원에서 일컫는 말)를 몸소 체험합니다. 그런데 독고가 지금 한국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운명이란 게 묘해서 서울 유학을 하게 된 중국 주인집 자녀를 따라 한국에 왔는데, 코로나19 팬데믹 사태 속에 그만 유기견으로 홀로 남게 된 것입니다. 어린 주인이 중국 가족을 만나러 간 사이 그만 코로나19가 만연했고,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면서 독고는 유기견 신세가 되고만 것입니다. 한국에서 노숙생활을 하면서 한국식 자본주의의 바닥도 경험했습니다. ‘낭중지추’(囊中之錐:재주는 반드시 드러난다)라 누가 그랬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