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다’ 곧다, 밝다는 의미다. 그런데 곧고 밝은 게 무엇일까? 다른 질문이 아니다. 간단히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우리 사회의 최대 화두이기도 하다. 문제는 간단한데, 답은 쉽지 않다. 누구는 이 질문에 책을 한 권 썼다. 곧고 밝은 것, 자연 현상이라면 쉽지만 사람의 일이라 설명이 쉽지 않다. 사람의 일 가운데 무엇이 곧고 밝은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곧고 밝은 걸 아는가? 역시 책 한 권은 나올 질문이다 싶다. 그런데 갑골문의 해설은 쉽다. 간결하고 명료하다. 갑골문에서 바를 정(正)은 어느 점을 향해 나아간 발의 모습이다. 점이 보이고 아래 발이 보인다. 간결한 선으로 너무도 분명히 발을 표현했다. 왜 발일까? 축구 선수나 농구 선수를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두 선수 모두 경기에서 앞으로 나가는 것을 속여야 할 때가 있다. 이 때 몸을 틀기도 하고, 시선을 돌려 보는 시늉으로 상대방에게 나아갈 바, 나아갈 곳을 속인다. 하지만 정말 속이지 못하는 게 있다. 발이다. 발은 앞으로 향하면 그 곳이 앞이다. 뒷걸음질을 하지 않는 한, 발은 사람이 나아가는 방향이 어딘지 정확히 보여준다. 발이 마주 보는 곳이 앞이다. 정면(正面)이다. 몸을 비틀
약하디 약한 게 물이다. 둥근 바가지에 담그면 둥근 그대로, 각진 바가지에 담그면 각진 그대로. 그렇게 순응하며 사는 게 물이다. 한 바가지 물은 아차, 실수로 바닥에 흘리기만 해도 순식간에 조각나 흩어져 땅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설사 고였다 해도 순식간에 바닥에 붙어서 다시는 쓸 수 없게 된다. 물은 그렇게 약하디 약하기만 하다. 그렇게 약한 물은 더러움을 가리지 않는다. 촛불이 자신을 태워 어둠을 밝히듯 약하디 약한 물은 자신을 더럽혀 더러움을 정화시킨다. 물은 아래를 먼저 채운다. 아래로 아래로 흘러 맨 아래를 먼저 채운다. 아래로 흐를 때 물은 접하는 모든 빈 웅덩이를 채운다. 다 채워야 다시 흐른다. 아래로 흐를 때 물은 그 웅덩이의 크기를 가리지 않는다. 크건 작건 물은 웅덩이를 채워야 아래로 흐른다. 그렇게 아래로 흐른 물은 개울을 만들고 지류를 만들고 호수를 만들고 장강을 만들어 마침내 저 거대한 바다를 만는다. 바다는 흘러든 물을 개울이라고, 장강이라고, 차별하지 않는다. 바다가 된 물은 이제 더 이상 약하지 않다. 거대한 파도는 순식간에 저 63빌딩 높이로 치솟아 인간이 감탄하며 만든 거대한 배를, 심지어 땅 위의 거대한 건축물을 삼키어
‘道外無物’ (도외무물: 도 밖에 사물이 없다.) 도가가 전한 진리다. 간단히 ‘道中萬物’ (도중만물: 만물이 도 속에 있다) 이라는 의미다. 도가 있어야 만물이 있다는 뜻이다. 말은 쉬운데, 뜻은 어렵다. 그럼 도란 무엇인가? 사물을 담았다 하니, 도란 사물의 존재, 그 존재의 현존이다. 사물이 도요, 도가 사물이다. 사물을 알면 도를 아는 것이요, 역으로 도를 알면 사물을, 그 존재의 현존을 안다. 하지만 존재란 무엇인가? 다시 그 존재를 가능하게 한, 존재를 현존케 한 도란 도대체 무엇인가? 꼬리를 물며 질문에 질문만 남는다. 도란 인간에게 주어진 난제다. 그 난제의 총체인지도 모른다. 저잣거리 만물이 북적이듯 도란 그런 혼돈 카오스의 법칙인지 모른다. 복잡한 개념이지만 정작 한자의 원형은 쉽다. 도(道)는 금문에서 보인다. 손에 고기를 들고 큰 거리를 걷는 모습이다. 마치 제사장이 제례 행렬을 이끌고 제사를 지내러 가는 듯싶다. 길은 큰 길이요, 행렬은 장엄하다. 고대 전쟁을 앞두고 점을 쳐 승패를 가늠했고 실제 승리를 하면 감사의 제(祭), 승리의 제를 지냈다. 제사장이 제물의 고기를 들고 큰 길을 또박또박 걸으면 우리 편은 환호를 하며 길을 열고
위만 보는가? 불행의 시작이다. 위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아래만 보는가? 착각의 시작이다. 아래 역시 끝이 없는 탓이다. 위만 보고, 아래만 보는 것. 바로 삶이 속이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그저 위만 보고 그저 아래만 보라한다. 그래서 위만 보고 달려 지쳐, 스스로 못났다 자괴하고 아래만 보고 머물러 혼자만 잘 났다 오만하게 한다. 진정한 삶은 위를 이해하고 아래를 아는 그 곳에서 출발을 한다. 바로 기준이다. 하나의 선이다. ‘공자(孔子)의 일(一)’이다. 위를 알고 싶은가? 그럼 기준을 보라. 아래를 알고 싶은가? 그럼 기준을 보라. 상(上)과 하(下)는 이런 진리를 일러준다. 복잡한 탓에 상 자는 갑골문이 아니라, 금문에서 등장을 한다. 대표적인 지사(指事)자다. 생각을 글자로 만든 게 지사다. 하 역시 마찬가지다. 금문에서 나온다. 기준 위의 점이 위 상(上)이요. 기준 아래 점이 아래 하(下)다. 위를 알고 싶으면 위의 맨 아래를 보라하고, 아래를 알고 싶으면 아래의 맨 위를 보라한다. 기준을 알면 손쉽게 위로 아래로 간다. 기준에 살면서 조금만 힘쓰면 위가 되고 조금만 쉬면 아래가 된다. 그래서 상하 기준을 제대로 알면 삶이 여유로워 진다.
하나 되는 둘이다. 연인의 키스요, 새끼에게 먹이를 주는 어미의 입이다. 한자 합(合)의 이야기다. 쉽지만 어려운 이야기다. 하나와 하나가 더해져 다시 하나가 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연 속에 인간만이 쉽게 한다. 한자 합은 그런 합일(合一)의 깨우침을 담고 있다. 합은 아주 오래된 한자다. 한자 초기에 갑골문이 있다. 글자의 모양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위의 크게 벌린 입이 아래 입을 감싸는 모양이다. 간단히 입과 입이 만나는 모습이다. 키스다. 키스는 인간사 남녀 간의 일이다. 남녀가 하나 되는 첫 순간이다. 셰익스피어는 키스를 '수줍어 붉어진 두 순례자의 입술'이라고 찬미했다. '유쾌한 숨바꼭질'이라 표현한 작가도 있다. 클림트의 키스는 금빛 황홀경이고, 뭉크의 키스는 뭔가 불안하기만 하다. 샤갈의 키스는 꿈 속 키스이고, 피카소의 키스는 핑크빛 초현실주의다. 어떤 키스는 너무나 현실적이며 어떤 키스는 너무나 단순하기만 하다. 키스는 인간의 첫 생산의 시작이다. 키스로 하나 되고 그 하나는 다시 셋이 된다. 합이란 한자는 이 기묘한 인간만의 방정식 부호다. 일에 일을 더해 하나가 됐다가 다시 삼이 되는 인간사 덧셈, 시너지다. 가장 에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게 있다. 삶에서 우리가 놓치는 것들이다. 현명이라 함은 별다른 게 아니다. 눈으로만 보지 말며, 귀로만 듣지 않을 때 그래서 보는 것이 다가 아님을, 듣을 것이 다가 아님을 깨닫는 것이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을 보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것이다. 바람 풍(風) 자가 전하는 지혜다. 바람 풍은 본래 상형자다. 상형자란 모양을 본 딴 글자다. 그런데 바람에 모양이 있던가? 도대체 선인은 무엇을 보고 바람 풍이라 했는가? 사실 이 질문 때문에서 바람 풍을 형성자라는 주장도 있다. 이해도 되고 일리도 있다. 본래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본 것만이 다이고 들은 것만이 다라는 주장도 있다. 틀리지만 않다. 다른 것이다. 세상을 보는 시각의 길이가 다른 것이다. 보는 이는 길고, 보지 못하는 이는 짧을 뿐이다. 장자의 봉황과 참새처럼 그렇게 둘은 세상을 살아간다. 보는 게 다르다고 세상 자체가 달라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본다. 바람 풍의 글자를 처음 쓴 누군가도 귀로 들을 것을, 얼굴에 스치는 감각을
“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 此中有眞意 欲辯已忘言” (산기일석가 비조상여환 차중유진의 욕변이망언” “산 노을 지면, 둥지로 돌아가는 저 새들 그게 참 뜻이거늘 …. 순간 말을 잊노라” (도연명) 삶과 죽음, 그리고 진실 이 세 단어는 사실 하나다. 보이는 면이 다를 뿐이다. 진실은 생과 사를 관통하는 시작점과 마침표다. 생은 다만 죽음에서 나와 삶의 시작이요 사는 다만 인생에서 나와 삶의 끝일 뿐이다. 태어나 아무 것도 몰라 진실하고 죽어 더 이상 거짓을 할 수 없어 진실하다. 이 두 진실의 순간, 생(生)과 사(死)를 이어주는 게 바로 삶이다. 삶에서 인간은 진실을 추구할 뿐 진실할 수는 없다. 유일한 진실한 순간은 바로 생사의 순간이다. 나고 죽는 그 순간 인간은 순수하게 된다. 삶이 그대를 속이는 탓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삶은 진실을 배반하게 만든다. 인간은 그저 삶 속에서 진실하려 노력할 뿐이다. 마치 하늘의 도리가 ‘항’(恒:항상 그런 것)이요, 땅 위 인간의 도리가 ‘항지(恒之:항상 그럴려고 그런 것)이듯 인간의 삶 속에서 진실되려 노력하는 것이다. 그게 삶의 도리다. 태어남의 진실의 순간에서 인생의 또 다른 진실의 순간 삶의 마지막 죽음의 순간으
하늘을 보라. 구름이 보이는가? 해와 달은 보이는가? 다시 묻자. 보이는 하늘은 공간인가? 시간인가? 하늘에서 무엇을 보는가. 여기에 가장 근본적인 지혜가 삶의 근원적 질문과 답이 담겨져 있다. 수천 년 한자가 담아 전하는 선인의 지혜다. 다시 묻자. 하늘은 공간인가? 시간인가? 한자 천(天)은 공간인가? 시간인가? 이 질문의 답이 인류가 문명을 일구는 단초다. 그래서 하늘 천(天)은 일찍이 갑골자에 나온다. 묘한 게 하늘 천(天)은 하늘이 아니다. 모양을 본 뜬 상형자인데, 하늘을 본 뜬 게 아니라 사람을 본 떴다. 하늘 천(天)이 가르키는 건 하늘이 아니라 사람이다. 하늘을 보는 큰 사람이다. 큰 사람, 하늘을 보는 큰 사람이다. 더 정확히 하늘 천(天)은 하늘의 해가 큰 사람의 머리 위를 지나 동편에서 서편으로 가는 한 장면을 담고 있다. 멈춘 공간이 아니라 움직이는 공간, 하늘이 담은 시간이다. 그래서 아직도 중국에선 천을 하늘 천이라 하지 않고 하루 천이라 한다. 하루를 담은 하늘 그게 진정한 하늘이다. 인류는 태어나면서 천을 봤다. 공간을 봤고, 그 공간의 변화를, 시간을 봤다. 최초의 인류는 하늘에서 해를 보고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게 됐고 달을
복은 바라는 게 아니다. 감사하는 것이다. 조상에게 이웃에게 내 가족에게 내 친구에게 이렇게 조금씩 범위를 넓혀가며 감사하는 것이다. 고마워하는 것이다. 복은 그렇게 오는 것이다. 먼저 감사를 보내야 오는 게 바로 복이다. 어느 시기 복을 바라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복이란 개념은 오래 전, 인류가 의식을 깨 생활을 시작한 이래 바로 그 순간부터 인류의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갑골문에서 복은 제사를 지내는 모습이다. 술 항아리를 든 두 손이 너무도 명확해 다른 이견이 없다. 사실 제사는 별개 아니다. 그저 감사를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한 해의 고생의 결실을 보는 추수의 순간에 곁에 없는 혈육에 가족에, 친구에게 이웃에게 동족에게 감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는 이들이 ‘나도 이렇게 기억되겠구나’는 사실을 공감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는 이들이 자신을 기억해주는 이들을 소중해하고, 아끼어 그렇게 연대하고, 하나로 일치하도록 하는 게 바로 복이다. 복은 바라는 게 아니다. 가족에 감사하는 것이고, 이웃을 아끼는 것이며 동족과 하나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순간 내가 복 됐구나 느끼며 복을 누리는 것이다. 서로 감사하고 서로 아끼며
시간은 공간의 변화다. 공간이 있어 시간은 시작된다. 공간이 시간이며 시간이 공간이다. 한 공간의 변화, 공간 한 부분의 변화가 바로 시간이며 일이다. 일의 단위다. 일은 하나의 변화이다. 변화가 시간이니, 결국 일은 시간이다. 시간은 모두 세 종류가 있다. 하늘의 시간 땅의 시간 사람의 시간이다. 하늘의 시간은 항상 그렇다. 해는 항상 하루 만에 떠서 지고 달은 항상 한 달에 차고 기운다. 땅의 시간은 반대다. 항상 그렇지 않다. 하루살이는 하루를 일생으로 살고 일년생 풀은 열두 달을 일생으로 산다. 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이는 50세를 못넘기고 어떤 이는 90세를 누린다. 같은 나무라도 어느 나무는 수십년을 살고 어느 나무는 수백년을 산다. 땅의 모든 것의 한 생은 제각기지만, 각기 누군가가 정하여준 듯 그렇게 각자의 일생을 산다. 운명이라고 부른다. 한 나무는 한 나무의 운명을 따르고, 한 사슴은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다. 다만 이 땅의 모든 시간 이 땅 모든 객체의 운명은 하늘의 시간에 하늘의 운명에 수렴한다. 하늘의 따라 결국 하늘의 시간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옛 선인들은 하늘의 시간을 항상 그렇다고 해 항(恒)이라고 하고 땅의 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