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효 멍~. 기운이 없시유. 개도 할 말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게 참. 거 뭐라 해야 허나. 참 거시기 해유. 뭔 이야기유? 한국 정치 이야기지유. 뭔 얘기겄어유. 웃지못할 코메디지유. 콧 방귀나 뀌지유. 세상은 참 넓고 할 일도 많은 데, 한국 정치권 꼬라지를 보셔유. 매일 서로 헐뜯는데 시간을 보내지유. 매일 황당한 기록을 세우는 한국 국회여유. 현재 국회 본회의 문턱을 넘은 법안은 6개에 불과해유. 이마저도 여야 합의 처리가 아니지유. 해병대원 특검법과 방송4법, 민생위기특별법이 본회의 문턱을 넘어슈. 그냥 넘은 게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단독으로 밀어붙였구먼유. 그런데, 해병대원 특검법은 재표결 끝에 폐기됐고, 방송4법과 민생위기특별법도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가 유력해유. 이 누무 국회는 야당은 의석수를 무기로 역점 법안을 밀어붙이고,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해 무력화하는 행태가 특허여, 특허. 아주 ‘도돌이 국회’라고 불려유. 역사에 기록될겨. 도돌이 국회 이름도 참 잘 졌구먼유. 그런데 이러는 사이 우리 자영업자는 어쩌유. 당장 전세값을 오르고, 장사는 안돼 문을 닫는 자영업자 수가 역대 최대치여. 최대치. 이 누무 경제는 부익부 빈익빈
배 고픔과 마찬가지다. 배 부름이 있어야, 배 고품이 있는 것이다. 선과 악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선하더냐? 악을 알아야 비로소 선을 아는 것이다. 선해려는 것은 결국 악을 알고, 그것을 고치려는 노력이다. 내 악을 알아야 내가 선해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악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내가 비로소 선해질 수 있는 것이다. 노자의 진리다. 결국 선하려 하는 것은 이미 악하기 때문인 것이다. 내가 추함을 알아야 고쳐서 예뻐질 수 있는 것이다. 감춰서 예뻐질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존재에 이 원칙은 예외가 없다. 노자에 있어, 도란 존재를 완성시키는 유일의 원칙이다. 유한의 존재도, 무한의 존재도, 모두 도의 품에 있는 것이다. 있음 유(有)과 없음 무(無) 둘이 있어야 비로소 존재가 완성되는 것이다. 있고서 비로소 없을 수 있고, 없고서 비로소 있을 수 있으니, 진정한 존재란 없어지는 있음이요, 있어지는 없음이다. 배 고프냐? 이제 배 부를 수 있겠구나! 배 고품의 시작이 배 부름이요, 배 부름의 시작이 배 고품인 것이다. 노자의 진리다. 세상의 쉽고 너무도 당연한 것들이다.
“배 고프냐? 이제 배부를 있겠구나.” 노자의 말이다. 무슨 말인가 싶다. 배 고프다는데, 그럼 이제 배부를 수 있다니? 하지만 생각해보라. 배 부른 이가 어찌 배 부를 수 있겠는가? 배 고픈 이가 어찌 배 고플 수 있겠는가? 배가 부르려면, 먼저 배가 고파야 하고, 배가 고프려면, 먼저 배가 불러야 하는 법이다. 이제 생각하니 너무 당연한 말이다. 노자의 진리다. 세상의 쉽고 너무도 당연한 것들이 바로 노자의 진리들이다. 도덕경 2장의 이야기를 위한 몸풀기다.. “天下皆知美之为美,斯恶已;皆知善之为善,斯不善已。”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개지선지위선, 사부선이.) “천하가 안다. 아름다워지려는 것은 아름다움이 추하기 때문이며, 착해지려 하는 것은 악하기 때문이다.” 착해지려는 게 악해서 그렇다니? 마치 착해지려 애쓰지 말라는 소리로 들린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배 고픔과 배 부름을 생각하면 답이 있다.
자본을 쌓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게 '자린고비' 정신이다. 무엇이든 아껴서 모아야, 그게 쌓이면 자본이 되는 것이다. 굳이 자본주의가 아니더라도, 재물을 쌓는 원리는 유교의 경전 가운데 하나인 '대학'에서도 나온다. '대학'은 나라가 부국이 되는 길을 하나로 제시하고 있다. "生之者众,食之者寡“ (생지자중, 식지자과: 생산하는 이가 많고, 소비자가 적으면 재물이 쌓인다.) 하지만 재물의 도리는 버는 도리만 있는 게 아니다. 아끼는 것도 도리가 있다. 이 도리를 모르면 아끼는 게 고통스럽기만 할 뿐이요, 아낀다고 자본이 쌓이는 것이 아니다. 중국 옛 이야기는 배거(裴璩)라는 자리고비면서 악독한 관리가 나온다. 이 관리는 보기 좋은 가구만 보면 탐을 내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매번 좋은 가구만 보면 사들였다. 하지만 한 번 산 가구는 아까워서 쓰지를 못했다. 매번 제대로 포장을 뜯지도 않았고 집 한귀퉁이에 쌓아 놓기만 했다. 그러다가 꼭 가구를 써야할 순간이 오면, 그 때는 어땠을까? 이 관리는 그래도 가구를 쓰지 못했다. 권력을 활용해 주변의 중고품을 빌려서 쓰곤 했다. 자신의 새 가구는 아까워서 쓰지 못하고 남이 쓰던 것을 쓴 것이다. 하지만 이 관료가 모르는
“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无,名天地之始;有,名万物之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무, 명천지지시; 유, 명만물지모) “도를 네가 정의하면 비상의 도요; 이름을 붙이는 순간 비상의 이름이 된다. 없음은 천지 시작의 이름이요, 있음은 만물 시작의 이름이다.” 묘한 말이다. 알려주고 싶지 않은 듯싶다. 마치 이리 말하는 듯싶다. “왜 알려고 하는가? 말하면 알아듣기는 하는가? 그럼 한 번 들어는 봐라.” 그리고 입을 땐다. “도를 네가 정의하는 순간, 그 도는 상(常)도가 아닌, 비상(非常)의 도다. 마치 인간들 사이의 네가 네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다른 인간과 구분돼 네가 되는 것과 같다. 이름이 있는 너는 너이지, 일반의 인간이 아니다. 하물며 그 것은 인간의 말일뿐이다. 보라, 인간에게 산은 산은데, 새에게도 산은 산이던가? 인간에게 강은 강인데, 물고기에게도 강은 강일까? 만물을 존재케한 게 만물의 도인데, 왜 너만 부르려 하는가. 네가 정의한 도는 너만의 도이지, 모두의 도가 아니다. 비상의 도인 것이다.” 천지만물 속에 인간이 있고, 인간 속에 나와 네가 있다. 유(有)와 무(無)도 마찬가지다. 나 아(我)와 비아(非我)가 그렇다.
"草木本有心,何求美人折。" (초목본유심, 하구미인절) "잡초라고 원하는 게 없을까? 어찌 굳이 미인만 기다릴까?" 장구령의 감우 1수다. 감우는 느낌 감, 만날 우를 합친 단어다. 감성을 만나다로 읽어도 좋고, 만나 느낀 감성이라 해도 좋다. 둘 다 시인의 시의에 부합한다. 소개한 싯구는 당 시인 장구령의 감우 1수 가운데 마지막 구절이다. 시인은 생활 속에 만난 작은 사물을 보며 느낀 자신의 감성을 엮어서 시로 만들었다. 당시 300수의 수작 중 수작이다. 장구령(張九齡, 678년 - 740년)은 중국 광둥성 소주 출신으로 중국 당나라 중기의 유명한 시인이자 정치가다. 당 현종 치세에서 정치적으로도, 문학적으로도 큰 업적을 쌓았다. 오늘날 총리격인 중서령을 역임했다.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蘭葉春葳蕤,桂華秋皎潔。" (난엽춘위유, 규화추교결) "난초 잎은 봄에 풍성하고 계화 꽃은 가을에 맑은 법" 봄의 아름다움과 가을의 수려함을 이야기하는 것을 시는 시작한다. 봄과 가을은 흔히 한 해다. 한 해 계절을 보라, 어느 한 계절 아름답지 않은 날이 있던가? 시인 장구령은 위의 말을 이렇게 썼다. "欣欣此生意,自爾爲佳節。" (흔흔차생의, 자이위가절) "모두가 무럭
편집자 주: 본 시리즈 '노자심득'은 노자의 도덕경에 대한 이야기다. 노자는 유가의 공자도, 도가의 장자도 스승으로 여겼던 이다. 세상에 딱 한 권의 책 도덕경을 남겼다. 5000자의 도덕경은 총 81개의 장으로, 37장까지를 도경, 44장을 덕경이라고 한다. 노자는 이 도덕경을 통해 모든 것을 주관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음을 제시하고, 그 원리를 따르라 권한다. 원리를 따르면 흥하고 따르지 않으면 망한다 한다. 하지만 묘한 게 그 원리가 도대체 무엇인지, 노자는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것을 네가 안다 하는 순간, 그 도는 무엇인가 변질된 도라고 한다. 묘한 말이지만,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노자의 생각에 공감을 하게 된다. 노자가 말하는 원칙 앞에서 스스로를 숙이게 되고, 순응하게 된다. 이에 수천년 장구한 동양의 역사에서 도덕경은 이 원칙, 천지창조의 진리로 인도하는 비서(秘籍)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 난해한 문구 탓에 아쉽게도 오늘날, 특히 한국에서 노자는 잊혀가는 인물, 도덕경은 잊혀져 가는 책이 됐다. 많은 이들이 도덕경을 읽은 현인이 남긴 말에는 감탄하면서 정작 노자의 말은 읽지 않는다. 이번 시리즈는 이에 노자의 생각, 노자에 대한 집필자의 생각
강함은 남을 이겨야 비로소 안다. 권위 수준은 내 말을 듣는 남의 태도에 달려 있다. 그럼 총명함은 어찌 아는가? 남의 우둔함을 보고 비로서 안다. 남의 잘못이 보이고 고칠 수 있을 때 비로소 총명함을 안다. 그럼 다시 부유함은 어찌 아는가? 마찬가지다. 남의 재산을 보고 안다. 남보다 많으면 스스로 부유하다 한다. 하지만 이 것들이 정답인가? 정말 아는 것인가? 정말 강한 것인가? 정말 총명한가? 정말 부유한가? 남을 통해야 비로서 아는 게 정말 아는 것인가? 맞을 수 있다. 하지만 비교의 남이 바뀌면, 답도 바뀌는 게 정말 정답인 것인가? 그럼 왜? 내가 강한데, 나보다 더 강한 사람이 있고, 내가 총명한데 왜? 나보다 더 총명한 사람이 있는가. 또 그럼 왜 내가 부유한데 항상 나 보다 더 부유한 사람이 있가. 그 앞에 왜 나는 항상 모자라기만 한 것인가? 도대체 어찌해야, 진정 강함을 알고, 어찌해야, 진정 총명함을 알고, 어찌해야, 진정 뜻이 있음을 알까? 또 어찌해야, 내가 진정 부유함을 알까? 동방의 성인 노자는 ‘내 자신에서 알라’ 했다. 남을 이기는 자는 그저 힘이 있는 자요, 진정한 강함은 스스로를 이기는 데 있다 했다. 남을 아는 이는 지혜
의(意), 뜻이다. 마음 위에 있는 소리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소리다. 끝없이 들리는 마음의 소리다. 내 마음 속의 소리가 들리면, 수없이 끊임없이 들린다. 저절로 행하게 된다. 마음의 소리가 없어질 때까지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것, 그치지 않는 마음의 소리, 그 것이 바로 뜻이다. 의지(意志)다. 한자 의지는 다른 것이 아니다. 마음의 소리가 끊임없는 게 의(意)이고, 그 마음의 소리가 변치 않는 게 지(志)다. 의지란 마음 속 수많은 소리의 파편들이 하나가 되고, 그 것이 머물러 변치 않을 때 의지가 되는것이다. 순 우리말 그대로, 앞의 의도 뜻이요, 뒤의 지도 뜻이다. 의지란 그런 것이다. 마음 속 소리의 파편들이 하나로 형체를 이루고 머무는 것이다. 그 의지는 오래될수록 빛이 난다. 세월의 풍파와 마연(磨硏)으로 만들어지는 빛이다. 그런 의지는 사람과 동물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기억의 억(億)은 그런 생각을 담았다. 억은 소전(小篆)에 그 모습이 보인다. 개인적으로 봐도 갑골문에서 보이기에는 뜻이 너무 섬세하다. 사람 인 옆에 뜻 의가 있는 모양이다. 지금의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사람 인의 모양과 뜻 의의 모양이 현대화 됐을 뿐이다.
한자 명상이 던지는 난센스 퀴즈다. 세상에서 가장 긴 글자는 무엇일까? "생각 사(思)다." 어렵다면 어렵고, 엉뚱하다면 엉뚱하다. 말 그대로 생각하기 나름이다. 생각이란 게 본래 그렇다. 생각은 마음의 소리를 내기 전에 생기는 것들이다. 작은 물방울의 수를 세기 어렵듯 생각 역시 셀 수 없다. 작은 물방울이 그렇듯 홀연히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에서 불현 듯 솟아난다. 생각이다. 생각은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이다. 고 신윤복 선생의 평이다. 생각은 이성적 머리와 감성적 가슴 사이를 채우는 것인데, 그 둘 사이 차이가 그리 넓고 크다는 것이다. 사실 생각 사(思) 본래의 뜻이 머리와 가슴이다. 생각이라는 한자는 금문도 없고 전서에서 등장을 한다. 전국시대 들어 생각이라는 한자가 만들어져 쓰였다는 의미다. 마음의 소리인 뜻 의(意)자 있어, 생각이라는 뜻으로도 쓰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 뒤 마음의 소리가 의지의 뜻으로 쓰이면서 다른 마음의 잡음들을 뜻하는 한자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오해를 사지 않으려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게 있다. 필자는 학자가 아니어서 학문적 검증을 통해 주장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저 자료를 통해 얻은 생각들을 공유하고자 이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