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电影江前落,雷声峡外长。霁云无处所,台馆晓苍苍。” (전영강전락, 뇌성협외장, 제운무처소, 태관소창창) “강 앞 친 벼락, 우레는 협곡을 뒤흔들고 갑자기 구름 걷히니 산 위 정자 뒤로 창창히 갠 맑은 하늘” 비온 뒤 하늘이 가장 맑습니다. 짙은 먹구름, 갑자기 쏟아지는 장대비 강 위로 벼락이 치고 저 멀리 협곡을 뒤흔드는 우렛소리가 강가까지 들립니다. 그런데 역시 갑자기 비는 그치고 구름이 갠 맑은 하늘이 산 위 정자 뒤로 창창히 펼쳐집니다. 중국 당나라 때 시인 심전기(沈佺期, 656~714)의 '무산(巫山)'이라는 5언율시의 한 구절입니다. 심전기의 자는 운경(雲卿), 허난성 상저우(相州) 네이황(內黃) 사람으로 측천무후 시대 송지문과 함께 궁정시인으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긴 불황 끝에 경기 부진이 이어지면서 서민들의 삶이 팍팍하기만 합니다. 대기업은 그나마 돈을 벌지만, 소상공인들의 상가에는 대출 이자를 걱정하는 한숨이 무산의 우렛소리처럼 시장 골목 밖에서도 들리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치지 않는 비가 어디 있겠습니까. "무종우(無終雨, 그치지 않는 비가 없다)"라는 노자(老子)의 말처럼 비는 반드시 그치고, 먹구름은 흩어지게 돼 있습니다.
晴川历历汉阳树, 芳草萋萋鹦鹉洲。 日暮乡关何处是? 烟波江上使人愁。 맑은 날 강가에는 한양의 나무들이 즐비하고 앵무주에는 향기로운 풀들이 무성하네. 해는 지는데 고향 집은 어디인가? 강에 핀 물안개에 내 맘도 시름에 젖네. 시는 당나라 때 관료이자 시인이었던 최호(崔颢, 704~754)가 쓴 '황학루(黄鹤楼)'의 뒷부분이다. 최호는 19세 때 진사에 급제해 벼슬 길에 올랐으나 글을 많이 남기지는 못했다. 평생 40여 편의 시를 남겼으며 바둑과 술을 즐겼다고 한다. '황학루'는 중국 역사상 최고 시인으로 꼽히는 이백이 읽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고 알려져 있다. 황학루를 찾은 이백이 절경을 보고 시를 읊으려다 최호의 시를 읽고 "이보다 나은 시를 쓸 수 없다"라며 붓을 내려놓았다고 한다. 황학루는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汉)의 창장(長江) 기슭에 있다. 악양루, 등왕각과 함께 강남 3대 누각으로 알려져 있다. 신선이 학을 타고 놀았다는 전설과 벽에 그린 학이 실제 날아갔다는 전설이 있다. 시 '황학루' 역시 전설을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昔人已乘黄鹤去, 此地空余黄鹤楼 日暮鄉關何處是, 煙波江上使人愁 옛 선인은 이미 학을 타고 떠났고 이곳엔 텅 빈 황학루만 남았네. 황학
何处秋风至? 萧萧送雁群。 秋朝来入庭树,孤客最先闻。 hé chù qiū fēng zhì ?xiāo xiāo sòng yàn qún 。 qiū cháo lái rù tíng shù ,gū kè zuì xiān wén 。 가을바람 머문 그곳, 외기러기 날아드는 곳, 아침마당 나무에 가을바람 머무니, 누굴까? 누가 올까? 외로운 객이 가장 먼저 안다네. 슬픔이 슬픔을 안다. 외로움이 외로움을 안다. 그래서 슬픔만이 진정 슬픔을 위로하고, 외로움만이 외로움을 달랜다. 슬픔을 알고 외로움을 알 때 그제야 비로소 한 줄기 가을바람 머문 곳을 찾는 기러기 마음을 안다. 당나라 시인 유우석(刘禹锡, 772-842)의 '가을바람의 노래'다. 유우석의 자는 몽득이다. 낙양사람으로 유종원과 함께 정치 혁신을 하려다, 20년간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시는 남방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지었다고 한다. 시상은 단순하기만 하다. 가을 녘 외로움이 한줄기 바람과 기러기 떼, 그리고 떨어지는 나뭇잎 등에 녹아 있다. 하지만 그 단순함이 바로 이 시의 매력이다. 복잡하고 애잔한 감성이 담담하게 서술된다. '萧萧' 의성어 활용도 좋다. 읽으면 읽을수록 입에 마음에 착 달라붙는다. 유몽득
百里奚,五羊皮, bǎi lǐ xī ,wǔ yáng pí , 忆别时,烹伏雌,炊扊扅, yì bié shí ,pēng fú cí ,chuī yǎn yí , 今日富贵忘我为? jīn rì fù guì wàng wǒ wéi? 춘추전국시대 진나라 대부 백리해(百里奚)의 고사와 연관된 시다. 그는 본래 우나라 사람인데 누구에게도 천거받지 못하자 가족과 고국을 등지고 타국으로 떠난다. 이후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결국 진(秦)나라 목공에 의해 발탁돼 진의 부국강병을 일궈낸다. 진 목공이 다른 나라에 포로로 잡혀 있던 백리해를 오고양피(五羖羊皮, 검은 양 다섯 마리의 가죽)을 주고 데려왔다고 해서 '오양피(五羊皮)'의 별호를 얻었다. 시는 단번에 귀족 백리해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다음은 그의 별명을 부른다. "오양피야!" 자연히 시를 들은 백리해와 그 주변 인물들의 관심을 끈다. 그 다음 묻는다. "우리 작별할 때 기억나는가?" 노래가 이어진다. "내가 암닭을 푹 삶아줬지. (너무 가난해 불을 피울 장작조차 없어) 문짝을 뜯어내 요리를 한거야. 그런데 당신 이제 부귀하게 됐다고 어찌 나를 잊었는가?" 시를 듣던 백리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것은 우나라를 떠
径万里兮度沙漠,为君将兮奋匈奴。 jìng wàn lǐ xī dù shā mò ,wéi jun1 jiāng xī fèn xiōng nú 。 路穷绝兮矢刃摧,士众灭兮名已隤。 lù qióng jué xī shǐ rèn cuī ,shì zhòng miè xī míng yǐ tuí 。 老母已死,虽欲报恩将安归? lǎo mǔ yǐ sǐ ,suī yù bào ēn jiāng ān guī ? 아, 돌아보니 만리 길, 사막을 건넜구나. 큰 칼 차고, 흉노를 쫓아온 이 길 갈수록 흉한데 활은 떨어지고, 죽어 이름도 못남긴 병사들이여. 고향 늙은 어미마저 그대들 곁으로, 아 어디로 가야 은혜를 갚을까? 이국만리 타향 전쟁터에서 받아든 어머니의 사망 소식, 어찌 이런 비통함이 있으랴. 바로 한나라 장수 이릉(李陵 BC134 ~ BC74)이 남긴 시 별가(别歌)다. 이릉은 한 무제의 명을 받고 흉노 토벌에 나섰다가 적의 작전에 휘말려 악전고투 끝에 포로가 되고 만다. 아쉽게도 이 패배가 이릉에게는 진정한 불행의 시작이었다. 누군가 한 무제에게 이릉이 변절해 흉노군을 훈련시키고 있다고 모함을 해 분노한 한 무제가 이릉의 가족 모두를 몰살시켰다. 이 때 이릉은 한나라에 대한 충성을 굽히지
楼观沧海日 门对浙江潮 lóu guān cāng hǎi rì mén duì zhè jiāng cháo 누각 저 멀리 푸른 바다 해 보이고 문 너머 저장의 파도소리 들리네. 당나라 시인 송지문(宋之問, 656~710)의 시 '영은사(灵隐寺)'의 한 구절이다. 번역을 하면 맛이 떨어진다 싶을 정도로 한자의 쓰임이 절묘하다. 눈에 보이는 해의 경치와 들리는 파도 소리를 절묘하게 대비시켰다. 그런데 보는 것도 관(觀)이며 그 대비가 들리는 문(聞)이나 아니라 대응해 오는 대(對)이다. 소리를 마치 보는 듯 표현해 의미적 대비를 살리면서 성조의 대비로 운율도 살렸다. 읽으면 읽을수록 맛나는 구절이다. 이 시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당대 두 천재 시인이 동시에 등장한다. 송지문과 낙빈왕(骆宾王, 626~687)이 두 주인공이다. 영은사는 한 고승이 저장성 항저우 북서쪽에 있는 한 산을 두고 "아 언제 천축의 산이 이리 날아왔던가? 부처의 영이 숨겨진 곳이로구나"라고 평가해 이를 기념해 지어진 절이다. 한마디로 경치가 매우 빼어나다는 의미다. 어느날 송지문이 영은사에 머물며 시를 지었는데 첫 구절이 "높은 봉우리 수풀 우거지고, 문 닫힌 용궁은 적막하기만 하네(鹫岭郁岧
“前不见古人 qián bú jiàn gǔ rén 后不见来者 hòu bú jiàn lái zhě 念天地之悠悠 niàn tiān dì zhī yōu yōu 独怆然而涕下 dú chuàng rán ér tì xià” 내 앞에도 옛사람 보이지 않고 내 뒤에도 오는 사람이 없구나! 막막한 천지 나 홀로 둘러보고 돌연히 떨어지는 한 줄기 눈물. 당나라 초기 시인 진자앙(陈子昂, 659~700)의 '등유주대가(登幽州台歌)'이다. 진자앙의 자는 백옥(伯玉)이며 광택(光宅) 원년(684년)에 과거에 급제했다. 광택은 측천무후가 실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던 시기의 연호여서 '무후연호'라고도 한다. 진자앙은 이때 진사가 돼 측천무후의 아낌을 받았으나 무후의 교만 방탕함에 실망해 그를 시에서 수없이 풍자한다. 이 시는 진자앙이 무유의(武攸宜)의 작전 참모로 있던 시절 썼다고 한다. 토벌 작전에 선봉장이 되길 간청했으나 거절당하자 비분강개해 썼다는 설이 있다. 진자앙의 성격이 그랬던 것 같다. 옳다고 판단한 일은 앞에 끌어주는 이 없어도 매진을 하고, 뒤따르는 이 없어도 포기하지 않았으리라. 등유주대가(登幽州台歌)에서도 그의 성품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짧게, 이렇게 단순히 세상의
翻手作云覆手雨, 纷纷轻薄何须数。 fān shǒu zuò yún fù shǒu yǔ, fēn fēn qīng báo hé xū shù 。 君不见管鲍贫时交, 此道今人弃如土。 jun1 bú jiàn guǎn bào pín shí jiāo, cǐ dào jīn rén qì rú tǔ 。” 구름처럼 모였다 비처럼 흩어지듯 사람들 얼마나 경박한가 그대, 관중과 포숙아의 가난할 때 사귐을 아는가? 지금 사람들은 그 사귐을 흙처럼 버리는구나 당나라 시성 두보(杜甫, 712~770)의 시 '빈교행(贫交行)'이다. 가난할 때의 사귐. 시 제목만으로 이미 풍기는 분위기가 범상치 않다. 번역을 더 자세히 하면 시감이 깨진다. 한문의 축약과 운율의 효과를 최대한 살렸다. 좀 더 길어지면 시가 아니라 산문이 됐을거다. 관포지교는 춘추시대 제(齐)나라의 관중(管仲)과 포숙아(鲍叔牙)의 이야기다. 어린 시절 서로를 잘 알고 친했던 관중과 포숙아가 서로 다른 이를 보필해 제나라 군주 자리를 놓고 다퉜다. 마침내 포숙아가 모시던 이가 제나라 군주가 된다. 바로 환공(桓公)이다. 권력투쟁에서 패해 관중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포숙아는 환공에게 간청을 한다. "한 나라의 군주에 만족하신다면
七月七日长生殿, 夜半无人私语时。 qī yuè qī rì zhǎng shēng diàn, yè bàn wú rén sī yǔ shí 。 在天愿作比翼鸟, 在地愿为连理枝。 zài tiān yuàn zuò bǐ yì niǎo, zài dì yuàn wéi lián lǐ zhī 。 天长地久有时尽, 此恨绵绵无绝期。 tiān zhǎng dì jiǔ yǒu shí jìn, cǐ hèn mián mián wú jué qī 。 칠월 칠석 서로의 품에서 그날 밤 우린 속삭였지요. 하늘에선 비익조 되고, 땅에선 연리지 되리라. 이 하늘과 땅이 먼지 될지언정, 우리 한恨만은 끊이질 않네요. 아 사랑하는 님아, 우리 한 몸이 돼 하늘에서 비익조가 되고, 저 땅에선 연리지가 되자. 그래서 이 하늘, 이 땅이 먼지 되는 그 순간까지, 하나로 날고, 하나로 자라자. 사실 너무 유명해서 설명이 필요 없는 장한가(长恨歌)의 마지막 구절이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장한가'는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사시로 꼽힌다. 백거이는 자가 낙천(乐天)이다. 호는 취음(醉吟)선생, 향산(香山)거사다. 호에서 보이듯 술을 좋아했다.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我昔未生时,冥冥无所知。 wǒ xī wèi shēng shí ,míng míng wú suǒ zhī 。 天公强生我,生我复何为? tiān gōng qiáng shēng wǒ ,shēng wǒ fù hé wéi ? 无衣使我寒,无食使我饥。 wú yī shǐ wǒ hán ,wú shí shǐ wǒ jī 。 还你天公我,还我未生时。 hái nǐ tiān gōng wǒ ,hái wǒ wèi shēng shí 。 나 아직 태어나기 전 그 때, 깜깜한 어둠 속에서 아무 것도 몰랐네 하늘이 나를 태어나게 했지, 하늘은 도대체 왜 나를 낳았을까? 옷이 없어 추위에 떨고, 음식도 없어 배만 주리는데 하늘이시여! 나를 돌려줄테니 태어나기 전 그 때로 돌아가게 해주길. 수나라 말기에서 당나라 초기에 활동한 왕범지(王梵志, 590~660 추정)의 시다. 짧고 간결한 문장이다. 간단히 사는 게 힘든데, 도대체 삶이 무엇인지 묻는다. 고고함을 추구하는 시인들과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 요즘 말하는 구어체로 쓰인 시다. 그래서 의미를 한 번 더 생각하는 맛은 없다. 그러나 순수하게 삶의 어려움과 삶의 목적에 대한 고민을 써내려간 게 느껴진다. 가다듬은 감성에서 나오는 절제된 울림은 한시의 기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