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는 사람의 글자다. 수천 년 사람의 지혜를 담은 수백 기가의 저장 장치다. 살아있는 한자는 참 매력적이다. 예를 들어 한자는 듣는 것도 볼 수 있고, 보는 것도 들을 수 있다. 한자 속에서 사람의 의식은 무한하게 감응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다. 예컨대 향기 신(馨) 자는 들을 청을 글에 포함하고 있다. 글자의 뜻을 분해해보면서 향기를 듣는다는 의미가 된다. 의련(漪漣)은 잔잔한 물결의 파문이라는 뜻인데, 그 발음이 아름다운 게 파문을 보는 게 아니라 마치 물결 파문이 이는 소리를 듣는 듯하다. 그래서 한시는 보는 것을 듣는 듯 표현했고, 냄새를 보는 듯 표현했다. 모두 한자의 관념성 때문에 나온 현상이다. 그런 매력을 가진 대표적인 한자가 하늘 천이다. 먼저 어떻게 움직이는 시공의 하늘을 이렇게 하나의 문자로 잘 표현했는지 경이로울 지경이다. 그것은 단 한 명의 천재가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 천년 수천만 명의 학자들이 힘을 보태 만든 게 한자다. 한자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한자는 천재가 만들었어도 인간들이 선택해 쓰지 않으면 보존이 안됐다. 역사 속에 얼마나 많은 천재들이 한자를 만들었고, 사라졌을까? 중국이 낳은 최고의 여걸 측천무후(
전쟁의 경우의 수를 아는 것을 '지피지기'(知彼知己)라고 하고, 지지 않는 법을 고안하는 게 '백전불태'(白戰不殆)다. 가장 경제적 승리는 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손자가 "지피지기"(知彼知己; 적을 알고 나를 알면)면 "백전불태"(白戰不殆;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라 하지 '백전백승'이라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백 번 싸워 다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백 번 싸워 다 지지 않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기는 것보다 지지 않는 게 더 쉽다. 또 지지 않고 버티면 반드시 승리한다. 손자는 그 것을 위해 승리가 아니라 내가 들고 있는 카드가 패일 경우만 대책을 강구한다. 그것도 우리 카드가 패이면서 적의 카드가 승일 경우, 전쟁은 반드시 패하는 데 이때 대책이 있으면 되는 것이다. 손자의 답은 바로 역(易)이다. 시간이다. 손자는 무조건 지키며 시간을 끌어야 한다고 답을 내놓는다. 보통 우리 카드가 패인 경우 공격을 받는 쪽이 우리다. 패의 카드를 들고 승의 카드를 든 적을 공격하는 바보는 없다. 손자는 이때 지킬 수만 있다면 하늘의 시간은 반드시 방어하는 쪽의 편이라고 지적한다. 만리타향 원정 길이 먹을 음식을 바리바리 싸 들고 노래 부르며
진정한 시간은 나무의 나이테 속에 있다. 수 만년, 수 천 년의 세월을 견딘 바위 속에 있다. 그 시간이 주역의 역(易)의 본질이다. 역은 변화다. 문제를 보는 각기 다른 각도인 것이다. 주역이 만사의 최고인 이유는 변화의 순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변화의 순서를 고려하면 문제 해결 가능성, 다양한 답이 나온다. 현실엔 어떻게 적용이 될까? 시간의 변화를 고려해 답을 찾는 방법을 적은 대표적인 책이 손자병법이다. 손자병법은 한마디로 승패(勝敗)의 가능성을 다양화하고 가장 어려운 문제, 지금 답이 없는 문제의 답을 시간을 통해 찾아내고 있다. 먼저 한자의 논리적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승의 반대는 패다. 하지만 한자를 아는 사람에게 승의 반대는 불승이다. 이기지 못하는 것이지 지는 게 아니다. 손자를 이렇게 승을 승과 불승(不勝)으로 나눴다. 이기는 것과 그 반대로 이기지 못하는 게 있는 것이다. 이기지 못하는 게 패를 포함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지는 것, 패가 아니다. 손자는 패도 패와 불패(不敗)로 나눴다. 지는 것과 그 반대에 지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이다. 지지 않는 것 역시 승리를 포함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이기는 것만 의미하지는 않
路遥知马力, 日久见人心 lùyáozhīmǎlì, rìjiǔjiànrénxīn 길이 멀면 말의 힘을 알고, 오래 겪어보면 사람의 마음을 안다. 참 애매한 게 사람 마음이다. 알겠다 싶으면 모르겠고, 모르겠다 싶으면 알 것 같다. 안다고 하기에 사람의 마음은 너무 깊다. 이런가 하면 저렇고, 저런가 하면 이렇다. 모른다고 하기에 사람 마음은 또 종이쪽만 같다. 그리 쉽게 유혹에 넘어가더니, 때론 모진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위 같다. 참 모르겠는 게 사람 마음이다. 대체로 분명한 건 낯선 사람일수록 좋다는 것이다. 초면에 예의를 차리고, 가까워지면 무례해진다. 그래서 사람은 가까울수록 악취를 느낀다 했다. 정말 좋은 사람은 난초처럼 그 은은한 향이 오래오래간다 했다. 정말 친해진다는 게 무엇일까? 옛사람들은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알았을까? 역시 한자 속에 그 답이 있다. 친할 친 親의 갑골자는 없다. 그러나 금문에서 그 자형의 모습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친 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금문에서 보이는 친 자는 칼로 형刑을 당한 사람을 찾아와 보는 모습이다. 왼쪽 부호가 형을 가하는 날카로운 도구를 의미하고 오른쪽 부호가 찾아오 보는 이의 눈을 크게 강조한
시(時)는 햇볕을 받아 만물이 나는 것이다. 우리네 신문에서 가장 쉽게 접하는 말이 "시급을 다툰다.", "절실하다."라는 등의 말이다. 문제가 있으니 당장 답을 찾으라는 말이다. 신기하게도 우리 슈퍼맨 정치인들은 그때 그때 답을 내놓는다. 물론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관련 기사가 신문에 나오면, 빠지지 않는 지적이 "'땜 빵' 처방이었다"라는 말이다. 본래 우리 삶 속에 문제란 당장 보기 싫은 것을 말한다. 그러니 답이 시급한 게 인지상정이다. 개인적으로도 청소년 시절 문제를 만나 답을 찾지 못하고 괴로워할 때 가장 듣기 싫은 말이 있었다. "슬퍼하지 마 시간이 약이야." 혹은 "걱정하지 마, 시간이 지나면 좋아져."라는 위로였다. '참 누군 모르나...', '지금 불이 났는데, 10리 밖에 우물이 무슨 소용이냐?' '遠水不救近火;먼 물은 가까운 불을 끄지 못한다.'라고 반발했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정말 모르는 게 맞았다. 무엇보다 문제를 제대로 볼 줄 몰랐다. 답이 중요한 게 아니다. 답보다 중요한 게 문제다. 문제 속에 답이 있다. 문제를 제대로 보기만 해도 답이 절로 나온다. 흔히 하는 이야기처럼 특히 인생의 문제는 수학처럼 정답이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다는 게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스스로 능력 있는, 완성된 사람이 될 것인가? 어려운 질문이다. 평생의 숙제다. 다행스러운 게 우리의 선조의 선조 역시 이런 고민을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숙제를 풀 단초도 남겼다. 바로 한자다. 한자에는 사람이 "할 수 있다"라는 것은 둘로 나누고 있다. 능能과 회会다. 능은 사람으로 태어나 할 수 있는 것이다. 회는 배워서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 말을 할 수 있고, 영어 등 외국어를 배워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 때가 되면 걸을 수 있고, 배워서 겨울 스키도 타고, 자전거도 타는 것이다. 혹자는 이 말에 "에~이"할 수도 있겠다. 이런 구분이 뭐가 중요한가? 둘의 차이를 좀 더 근본적으로 알 필요가 있다. 본래 글자의 원형을 살펴보면 무슨 뜻인지 안다. 갑골자에서 능은 '나무를 타는 곰', '큰 입과 큰 손, 큰 발을 가진 곰'을 의미했다. 바로 곰의 남다른 능력을 보여준다. 힘이 세고, 나무를 타며, 큰 손으로 적을 위협하고, 큰 입으로 먹이를 단박에 물어뜯는다. 이 앞에서 다른 동물은 그 능력에 탄복할밖에 다른 게 없다. 꼬리를 감추고 숨어야 한다. 이 능에 힘 력力을 더하면
시간은 모든 것을 증명한다. 시험지에 적힌 문제가 아니라 살면서 부딪치는 모든 문제는 결국 시간이 지나면 어떤 식이든 결과가 나온다. 인생의 답은 시간인 셈이다. 그럼 시간은 어디 있는가? 항상 같은 시간은 하늘에 있고, 항상 같지 않은 시간이 땅에 있다. 그래서 하늘의 같은 시간을 사는 땅의 모든 것은 서로 다른 결과는 내놓는다. 땅에서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늘 天이 시간과 공간의 동시적 개념임을 이해하면 이제 시간에 대해 좀 더 정확히 알아야 한다. 시간은 하늘 天에서 보여주듯 하늘에 상응해 변화하는 땅, 공간의 모습이다. 고대 한자 시(時)의 본의는 이런 시간의 의미를 잘 알려준다. 하루를 의미하는 해 위에 날 생(生)가 있는 모양이다. 해가 생겼다는 의미며, 해로 인해 만물의 생김이 이뤄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시는 시대가 바뀌면서 그 모양을 바꾼다. 후세 사람들의 생각이 시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말이 생기면서 오해가 생겼다"라는 노자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한자는 후세 사람들의 생각이 더해지면서 의미가 분명해지지만, 그래서 더욱 복잡해져 결국 혼란스러워진다. 그래도 최소한 금문까지 보이는 시의 모습은 하늘의 시간에
하늘이 땅에 성(性)을 부여했다 天命之謂性 하늘의 도를 정성 성(誠)이요, 인간의 도는 그 정성 성을 정성스럽게 따르는 것(誠之)이니라! 성이란 무엇인가? 말(言)이 이루어진 것(成)이다. 태초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 것이 하늘의 도다. 그래서 하늘의 도는 시간과 역사가 보여 주는 것, 그 자체가 전부이지만 인간의 도는 그렇지 못하다. 과거 60년, 이제 좀 길어졌지만 그래 봐야 100년이다. 그 유한한 시간 속에 할 수 있는 것이란 하늘 시간에 맞춰 가는 것, 그리되려 노력할 뿐이다. 하늘의 도를 아는 게 지천명이다. 알고 그렇게 되려는 게 인간의 도이며, 지천명하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은 스스로의 도를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깨닫고 수긍하게 되는 게 천명사상의 핵심이다. 천명을 안다고 함은 사물이 자신의 성질을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봄에 뿌리를 내리고 여름에 자라 가을에 영글고, 겨울에 시들어 가는 게 이 땅이 기록한 시간이다. 다 같은 나무지만 어떤 나무는 열매가 무성하고, 어떤 나무는 잎이 무성하다. 하늘의 시간, 천명에 맞춰 이 땅의 나무들이 각자 자신의 성질을 달리 발현한 것이다. 그래서 선인들은 하늘의 도는 하나지만 성질은 만물이
시간은 항상 그런 것과 항상 그렇지 않은 것으로 이뤄져 있다. 선인들에게 하늘의 시간과 땅의 시간을 다른 것이었다. 하늘의 변화 맞춰 땅이 변화하지만, 하늘의 변화는 항상 같지만, 땅의 변화는 땅마다 달랐다. 땅은 하늘의 시간에 맞춰 변했으며 그 변화를 자신의 육(肉)을 통해 기록했다. 그게 바로 역(曆)이다. 미국 그랜드캐니언의 바위들과 나무들, 바로 이 땅에 사물들이 수 억년의 하늘의 역사 가운데 아주 사소한 일부를 기록한 별자리 변화의 흔적들이 바로 역이다. 태양과 별자리는 수 천년, 수 만년을 두고 일정한 주기를 되풀이하면 같은 변화를 보였고 이 땅의 사물들은 존재하는 한 그 시간이 준 변화를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그게 하늘의 시간이다. 땅의 시간은 또 그 하늘의 시간에 부응해 나타난다. 하늘의 수많은 별자리들은 각자의 움직임을 지키고 살고, 이 땅의 사물들은 그 움직임에 부응해 산다. 첨성대에서 알 수 있는 선인들은 하늘을 보고 그 시간을 읽었고, 땅의 기록을 살폈다. 하늘의 변화는 ‘항상’(恒常)이지만 이 땅의 사물은 그 위치에 따라, 그 사물에 따라 그 변화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인들은 하늘의 ‘항상’을 땅의 ‘비항상’(非恒常)과 비
하늘의 비밀을 여는 글자 ‘天’ 한자 하늘 천(天)은 모든 것을 주관하는 하늘에 대한 인간의 가장 소박한 해석을 담고 있다. 하늘 천으로 열리는 문을 찾는 것은 각자의 몫이지만 그 문 뒤의 세계에는 수천 년 동양의 한자 문명을 만들어 온 중국과 우리의 선조들의 축적된 '한문 사고'가 있다. 어떤 과정이든 겸허하게 된 인간은 우리의 삶이 개인의 의지와 무관한 어떤 힘에 결정되고 이끌려 간다는 사실을 수긍하게 된다. 수긍은 체념이 아니다. 하늘이 답이요, 모든 것의 열쇠임을 자인할 뿐이지, 불변의 운명론과는 다르다. "하늘의 뜻을 안다"(知天命), 바로 천명(天命) 사상이다. 정해 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운명론적 패배주의와 다르다. 천명이란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하늘 천의 자의(字意)를 제대로 아는 게 첫걸음이다. 천’(天)은 ‘땅 지’(地)와 함께 천자문의 첫 글자다. 한자를 처음 배울 때 반드시 배우는 자다. 한국인이라면 모르기 힘든 한자가 바로 천 자다. 하지만 하늘 천 자를 제대로 아는 이는 의외로 드물다. 우리가 외우는 “하늘 천”이라는 자의(字意)는 틀리지 않았지만 온전히 맞지도 않다. 사실 모르는 것보다 온전히 알지 못하는 게 더 심각한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