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이징대학 학장을 역임했던 중국의 교육가 후스( 胡适) 는 중국인들에게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의식을 갖도록 문학운동과 계몽운동에 노력한 사람으로 알려져있다.
1989년생인 그는 미국유학을 마치고 1914년에 돌아와 베이징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그가 1919년에 잡지 신생활 제 2권 (新生活 第二期) 에 발표한 차부뚜어선생 전( 差不多先生 传) 이란 단편수필은, 당시 중국의 비과학적인 의식을 아주 재밋는 비유로 통렬하게 풍자한 글로, 당시 많은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 현재까지 그 내용이 많이 회자되고 있다.
제목이 차부뚜어 선생 전 이라해서, 차 부뚜어 (差 不多)라는 이름의 유명인사가 있는 것아 아닌데, 후스는 이 수필의 첫 머리에서, 중국에는 ' 이 차부뚜어 선생이 가장 많고 유명하다' 고 시작한다. 왕씨성을 가진 왕선생도 아닌데 말이다.
이 주인공의 이름으로 쓰인, 차 부뚜어 [chà‧ buduō] 란 말은, ' 차(差) 차이가 부뚜어 (不多) 많치 않다 크지않다' 는 뜻의 말로, 어떤 일이 대강 이루어지거나 거의 비슷하게 이루어졌을 경우에,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는 상투어이다.
다 됐나? 다 끝났나? 는 물음에,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 거의 대강 다 됐다는 대답으로 혹은 물음으로 주로 쓴다.
이제 후스가 중국에 가장 많고 유명하다고 소개한 차부뚜어 선생을 풍자한 수필의 내용의 골자를 옮겨본다.
" 소위 아주 작은 차이가 커다란 오류와 착오를 가져온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중국에서 제일 유명한 그가 누구인 줄 아시는가?
그 사람 성은 차 [差 chà ] 씨 이고 이름은 부뚜어 [ 不多 buduō] 이다.
이 사람은 중국의 각성과 각 마을 어디에도 있으니 당신은 반드시, 그 사람을 본적이 있거나, 사람들이 그 사람을 얘기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누구나 다 잘 알고 있고 그 소문이 자자한 이 사람 이름은, 매일 전국 어디에서나 중국인들의 입에 오르내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바로 중국인의 대표격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 생김새는 당신이나 나와 비슷하게 생겨, 눈은 두개 인데 보는 게 시원챦고, 귀도 두개인데 듣는 게 불분명하다.
그리고 코도 입도 달렸는데 감각이 말씨가 정확하거나 사려깊지 못하고, 머리속 뇌도 작은 게 아닌데 기억력이 떡어지고 생각도 명민하지 못하다.
그런 그가 항상 하는 말이 있는데, " 모든 게 대충이면 족한 것 아닌가? 뭘 굳이 그리 정확하게 하려구 하나? " 라는 말이다.
그는 어렸을 적 어머니가 빨간색 사탕을 사오라 시키면 하얀색을 사오곤 했는데, 그 어머니가 잘못했다고 혼을 내면, 빨간색이나 하얀색이나 비슷한 사탕아닌가라며, "차부뚜어 아냐? 不是差不多吗?" 라고 중얼거렸다 했다
학교다닐 때도, 1,2,3,4 성의 성조가 비슷한 말을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대강 발음한다고 꾸지람을 많이 들었어도, 그 발음이나 저 발음이나 "차 부뚜어 아냐? 不是差不多吗?" 라고 갸우뚱거렸다.
이 사람은 나중 상점의 회계를 맡았을 때도, 열 십 (十) 자와 일천 천 (千) 자가 삐침하나 밖에 차이가 없으니 열 십(十) 자를 쓸 때와 일천 천( 千)자를 쓸 때를 구분하지 않고 내키는대로 썼다가, 셈이 맞지 않은다고 질책을 받자, " 두 글자가 차부뚜어 아냐? 不是差不多吗?" 라며 주인을 원망했다 한다.
차 부뚜어 선생은 어느 날 상하이행 8시 30분 기차를 타려고 역에 나갔는데 2분이 늦어 기차가 저 만치 연기를 뿜으며 가는 것을 보고, " 30분이나 32분이나 차부뚜어 아냐? 不是差不多吗?" 라며, 굳이 시각에 맞춰 운행하는 기차회사가 야박하다고 투정을 늘어 놓았다.
그렇게 살던 차 부뚜어선생은 늙어 병이 났는데, 가족이 동쪽에 사는 왕의사 (汪医生) 를 찾지 못해 서쪽에 사는 수의사(소를 치료하는) 왕의사 (王大夫) 를 데려왔다.
汪 [ wāng ] 의사와 王 [ wáng ]의사는 같은 왕이지만 성조가 다르고, 또 찾아온 의사는 소를 보는 수의사였다.
이를 본 차 부뚜어선생은, 통증이 심해 더 기다릴 수 없었던지 " 汪 [ wāng ] 의사나 王 [ wáng ]의사나 차부뚜어 아냐? 不是差不多吗?한 번 해보라고 해" 라며 치료를 맡겼고, 소를 보는 왕의사는 소를 고치는 방법대로 치료를 했으나 한 시간이 채 안 돼 목숨이 끊어질 지경이 되었다.
그러자 차부뚜어 선생은 거의 (차 부뚜어) 하게 죽게 되자, " 아 산 사람이 거의 , 차 부뚜어하게 죽게 생겼구나, 모든 게 대강 대충 차부뚜어 하면 좋은 것 아닌가? 뭘 그리 꼭 그래야되는 것으로 따지고 그러나 ? " 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이렇게 차 부뚜어 선생이 사망한 후에, 많은 이들이 차 부뚜어선생이야 말로 세상이치를 다 꿰뚫고 생각이 융통성이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모두 다 입을 모아 곧이곧대로 하지도 않고 일일이 따지지 않고 덕행(德行)을 쌓다가 간 , 위엔 통 따스 (圆通 大师 [yuántōng dàshī ] ) 라는 호를 붙혀 기념했다. 즉 두루두루 원만하고 융통성이 많은 훌륭하신 분으로 추앙해왔다.
이 분의 명성은 후세에도 널리 오랫동안 알려졌고, 많은 후세인들이 모두 그를 모범으로 삼아 다 차부뚜어선생 (差不多先生)이 되었고, 그리하여 중국은 결국 게으름뱅이 국가 ( 懒人国) 가 되어 버렸다 "
후스는 이 글 이외에도, 중국인들을 과학적 실용주의로 계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