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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익힐 습 习

배움은 체득을 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깨닫고 몸으로 얻는 것이다. 몸으로 얻은 진리는 절로 행해진다. 진리를 체득하는 유일한 길이 학습이다. 학습은 바로 코칭을 받고 혼자 노력하는 길이다.”  

 

 

 

 

무엇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는 배워야 안다. 그래서 배움이 어떻게 사느냐를 결정한다. '무엇을 배웠느냐'라는 것은 '무엇으로 살 것이냐'와 같은 질문이다. '어떤 수준까지 배웠느냐'라는 것은 결국 '어떤 수준의 삶을 살 것이냐'라는 것이다.
그리 중요한 게 배운다는 것, 바로 학습学习이다. 그럼 학습은 어떻게 하는가? 역시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질문이다. 동양에서는 체득体得이 학습의 마지막 단계다. 체득, 바로 몸으로 얻는 것이다. 체득을 위해 하는 것이 학이요, 습이다. 학은 코치를 받는 것이고, 습은스스로 익히는 것을 말한다. 
이 도리는 습의 옛 글자, 갑골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갑골문자에서 보듯 습은 어린 새의 날갯짓이다. 지도 받은 뒤 고쳐진 것을 스스로 노력해 몸이 익숙하게 하는 게 바로 학습이다. 그 최종 목적은 체득에 있다. 체득은 그래서 습득이라고도 한다. 습득, 어린 새가 지속적인 날갯짓을 해 얻는 것, 날 게 되는 것을 말한다.  

 



 

날개 어깨뼈가 튼튼해진 것을 느낀 어린 새가 하는 시작하는 게 습이다. 어깨가 간지러워 참을 수 없어 자연히 하게 되는 게 습이다. 
본래 배움이란 게 그렇다. 좀 알게 되면 저절로 하고 싶어진다. 자전거나 자동차 운전이 그렇고 농구 배구 등 운동이 그렇다. 서예 등이 그렇고 당구 바둑 등 놀이가 그렇다. 악기와 노래를 배우면 절로 흥얼거리게 된다.
그러다가 자신감이 생기면 배운 것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다. 새가 날갯짓에 익숙해지면 과감히 둥지를 떠나는 이치다. 수없이 반복된 날갯짓에 자신감이 생긴 어린 새는 둥지 가장자리에 서서 힘껏 몸을 날린다. 둥지를 박차고 나선다. 생애 첫 번째 비행을 성공하고 난 새는 더 이상 어린 새가 아니다. 
학습한 새는 절로 난다. 그게 진리다. 진리를 학습해 체득하게 되면 진리로, 진리 속에 살게 된다. 그때 새는 자유를 얻는다. 둥지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아다닌다. 스스로 둥지를 지을 능력이 생긴다. 그렇게 스스로 집을 짓는 능력이 생긴 이를 우리는 일가一家 이뤘다고 하는 것이다. 

 

 

​“학습해 체득하고 세상에 나서면 이처럼 자유롭다. 이 시대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런 자유를 누리고 있고, 누릴 수 있을까?”  

 

 

다시 돌아 봐도 답은 역시 학습의 문제다. 그런데 우린 정말 그 학습의 중요성을, 체득의 중요성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인가?
하나의 반성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체득이 너무나 소홀히 여겨진다 싶다. 그보다는 깨침, 소위 심득心得을 중시하지 않나 싶다. 아니 솔직히 심득이라기 보다 그저 앎, 득지得知만을 중시하지 않나 싶다. 체득하지 않는 앎이 얼마나 허망한지 일찍이 공자가 명쾌하게 설명했다. 

 

 

 

​“学而不思则罔, 思而不学则殆
xué ér bú sī zé wǎng, sī ér bú xué zé dài” 

 

 

 

코치만 받고 생각이 없으면 깨우침이 없고,
생각만 있고 코치를 받지 않으면 위태롭다. 

 

 

 

생각이 뭔가? 생각해 얻는 것은 첫 단계가 앎, 득지이고, 그다음 단계가 심득이다. 마음으로 얻는 것이다. 
득지는 앞선 이들이 남긴 지혜, 선각자들의 심득을 이해하는 것이고, 심득은 기존에 없던 자신만의 새로운 경지를 여는 것이다. 공자의 경고처럼 코치를 받지 않고는 득지가 불가능하고, 심득이 있을 수 없다.
생각 자체가 코칭을 받은 뒤 홀로 연습을 하다 생기는 것이지, 코칭의 순간 생기는 게 아니다. 생각은 습을 하다 보면 홀연히 생기는 것이다. 그래 불가에서는 심득을 '돈오'頓悟라고도 한다. 홀연한 깨우침이라는 의미다.
심득은 정말 어렵고 어렵다. 오랜 역사 속에 과연 심득을 했다 인정받는 이는 몇 명인가? 단 4명뿐이다. 소위 4대 성인이라 불린다. 그 한 명이 공자다.
그 심득이 모든 교육의 목표라니? 이런 배움이 어찌 가능할까? 어찌 즐거울까? 
시험에서 80점 이상을 받으려면 꼭 알아야 할 것을 알면 된다. 그런데 90점 이상을 받으려면 그때부터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알아야 한다. 100점을 맞기 위해서는 몰라도 되는 것들 가운데 전혀 예상치 못한 것도 맞힐 수 있어야 한다. 매번 시험을 100점 받으려 하는 것은 알 필요 없는 것을 틀리지 않으려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다. 어찌 힘들지 않을까?
'시험'을 위한 공부에는 학습은 없고, 교육만 있게 된다. 교육은 가르쳐 기르는 것이다. 학습은 코칭을 해 스스로 연습하게 하는 것이다. 학습의 자리에 교육만 있게 되면서 배움의 근본적 목적도 사라진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배움은 즐거움이다. 삶을 즐겁고 윤택하게 하는 것이다.
90점 이상 점수를 받기 위해 많은 학생들은 체득하는 학습을 포기하게 된다. 같은 동작의 날갯짓을 반복하기 보다 새로운 모양의 날갯짓만 계속해서 배운다. 그래야 100점을 맞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래서 100점을 맞으면 정작 날지는 못하는 것이다.    
아는 것만 많은 이들, 제대로 하는 것은 없는 이들이 많은 이유다. 넓고 얕은 지식이 중시되고 깊이가 없어지는 게 당연시된다. 두루 알지만 어느 하나 제대로 아는 건 없다. 이런 지식은 실천할 수 없다. 날기 위한 날갯짓을 하지 않은 새가 어찌 날겠는가? 
할 줄 알아야 즐길 수 있다. 자신의 감성을 말로 표현할 수 있어야 가슴속 억울함을 푼다. 그러지 못하면 그저 울 뿐이다. 그 소리는 짐승과 다를 게 없다. 음과 박자를 학습해 체득하면 절로 노래를 부른다. 기쁨이나 슬픔도 울음보다 노래로 승화해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기타 등 악기만 다를 수 있어도 색다른 인생을 살 수 있다. 
서예도 그렇다. 용필법을 익히는 데 3년 이상은 투자해야 한다. 용필법을 알고 나면, 2자, 4자 글자를 써 선물하면 "고맙다"라는 소리를 듣는다. 붓을 잡고 10년이 지나 벽에 자신의 좋아하는 글귀를 써 걸 수 있으면 인생이 달라진다.  
참 아쉬운 게 우리 사회 영어 붐이다. 우리는 국민 10의 8은 영어를 공부한다. 왜 하는 지도 모르고 한다. 그래 잘하는 이가 드물다.
"무슨 소리, 우리 학생들은 전부 토익, 토플 고득점을 목표로 공부를 하는데?" 할 수도 있다. 정말 그렇게 공부를 해서 잘하는 이가 드물다.
시험을 위해 영국인,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쓰는 언어 용법을 입에 익도록 익히는 게 아니라, 가끔 쓰이는 용법을 시험 보는 순간까지 잊지 않으려 반복하기 때문이다. 최근 인기를 끄는 영어 회화 인터넷 강좌들이 있다. 그 공통된 특징은 딱 하나다. 쉬운 것을 반복해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 정말 미안하지만 새로운 게 아니라 수천 년 우리 동양에 내려온 학습의 개념이다.

 

 

 


 

 

하나를 배워 스스로 즐길 수준까지 학습을 하면 인생이 달라진다. 세상에서는 수만 가지 서로 다른 앎이 있지만, 그 앎에 정통한 이들이 깨달음에는 서로 상통함이 있다. 
동양 고전에는 지고한 권세의 황제가 소를 잡는 백정과 대화를 해 배우고, 마차를 끄는 마부와 대화를 해 배우는 장면이 등장한다. 모두 당대 황제에게 천한 기술이지만 그 속에는 천하를 다스리는 진리와 일맥 하는 교훈이 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일반 사람에겐 황당한 장면이 학문에 정통한 선인의 귀에는 진리로 들려, 기록으로 살아남게 된 것이다. 
여기서 진정한 지적 대화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진정한 지적 대화는 자신이 정통한 것에서 보고 느끼 것을 교류하는 것이다. 자신이 정통한 것을 나누는 대화인 것이다.
새로운 것을 아는 것, 득지, 새로운 경지를 깨달음, 심득은 학습의 목표가 아니다. 학습 과정에서 얻는 부가적 수확일 뿐이다. 학습의 목표는 체득이고, 체득해 즐기는 것이다. 모두가 김연아 선수처럼 되려고 스케이팅을 배우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스케이팅을 즐기려 배우는 것이다. 
소위 4대 성인 가운데 공자 가르침만 학습하기도 벅찬 게 범인의 수준이다. 굳이 성인의 가르침이 아니어도 수많은 선배 철학자, 과학자, 수학자들이 남긴 득지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시험에 들지 마라”  

 

 

굳이 성경 말씀이 아니어도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조건이다. 남이 낸 시험에 들면 인생은 그때부터 괴로움의 시작이다. 
한 가지를 배워 체득을 하면 삶을 즐길 수 있다. 재능이 있어 그렇게 즐기다 심득까지 하게 되면 그땐 일가를 이룰 수 있다. 체득을 하는 데 웬만한 사람은 10년 공부가 필요하다. 여기서 공부는 하나의 목표를 이루는 데 들어가는 개인적 시간을 의미한다. 10년 공부를 들인 게 하나면 인생이 즐겁고, 둘이면 인생이 남달라진다. 셋이면 세상에 뭔가를 남길 수 있다.
체득하는 학습에 시간을 쏟기에도 인생은 짧다. 하나를 10년을 배워 그것으로 인생을 즐기기도 시간이 짧다. 3개를 배우는 데 걸리는 게 30년이라면 굳이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우리는 시험공부를 위해 이런 체득하는 학습을 포기하고 있다. 매년 100점은 맞지도 못하면서 맞으려 힘쓰니 피곤만 하다. 또 100점을 맞아봐야 정작 중요한 체득을 한 게 없다. 삶이 얻은 것은 없고 피곤하기만 한 것이다.

 

 

 

글=청로(清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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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취안저우, 문화유산 보호와 관광객 유치 위한 투 트랙 전략 추진
중국 남동부 푸젠성에 위치한 취안저우(泉州)는 지난 202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역사도시다. 송나라, 원나라 시대 중국의 세계 해양무역 중심지였다. 푸젠성은 타이완을 마주 보고 있는 대륙 지역으로 중국에서 해양 산업이 가장 발전한 곳이기도 하다. 취안저우는 이 푸젠성에서 독특한 문화유산을 보유해 푸젠성 3대 도시 중 하나로 꼽힌다. 2일 푸젠성 문화유산국에 따르면 취안저우는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후 문화유산 보호와 관광산업 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추진해온 것으로 나타났다. 우선, 더욱 적극적인 문화유산 보호와 복원을 위해 관련 법과 규정을 제정하고 전문가를 채용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 문화유산 보호를 강화하는 동시에 관광산업 증대를 위해 중국내는 물론 해외 관광객 대상의 다양한 홍보 정책을 추진했다. 푸젠성 최초의 도시 커뮤니케이션 센터를 설립하여 언론 매체와 SNS 플랫폼에서 관광 상품을 홍보하는 등 관광 활성화를 위해 온오프라인 관광 마케팅을 펼쳤다. 특히 지역 주민들이 문화유산과 함께 생활하고 교류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해 유적지의 대부분을 지역 주민과 관광객에게 무료로 개방하고 급증하는 관광객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