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도는 본래 그런 것이고, 항상 그런 것이다.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땅의 공간 속에, 시간 속에 다르 게 나타난다고 다르게 부를 이유가 없다. 이름이 붙는 순간 그것은 그 이름의 도일뿐이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은 하늘의 도를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 수 만년, 인간이 셀 수 없는 시간을 걸쳐 진행돼 왔고, 앞으로 셀 수 없는 시간 동안 진행될 것이 하늘의 시간이요, 도다. 그런데 그런 도를 유한의 생명을 지닌 사람이 입으로 담기엔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다고 해도 쑥스러운 일이다.
아직도 우주의 탄생 과정도 잘 몰라 논란인 게 현대 과학의 현주소다. 그런데 수 천년 전 인간이 도를 이야기한다? 누가 봐도 "글쎄요"다.
그래도 워낙 사람들이 답답했던지 적지 않은 현인들이 도에 대한 비유를 남겼다. 하늘의 도를 성(誠)이라 한 대학이 그랬고, 노자 스스로도 하늘의 도를 이야기했다. "하늘의 도는 마치 당겨진 활과 같다"(天之道其猶張弓者也)는 말이 노자가 한 것이다. 활을 당길 때 윗부분은 당겨 아래로 굽고, 아랫부분은 당겨 위로 굽듯 하늘의 도란 있는 것을 덜어 부족한 것을 채운다 했다.(故天之道損有餘而益不足) 그런데 인간의 도는 부족한 것을 더 갈취해 있는 것을 모시는 데 쓴다(人之道則不然, 損不足而奉有餘)는 것이다.
이 말처럼 현대 서구가 주장하는 경제적 효용이란 말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게 없다. 한동안 이 말에 무릎을 치면서도 "그럼 자본주의는 말 그대로 하늘의 도를 어긴 인간의 도에 불과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떨치기 힘들었다. 또 노자가 말한 '인간의 도'는 인간 세계보다 동물의 세계에서 더 두드러지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다. 인간 말고 그 어떤 동물이 스스로 잡은 먹이를 사냥 능력이 없는 동료 동물을 줄까?
시간이 지나면서 노자의 이야기는 '하나의 유기체' 관점에서 말 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예컨대 인간 대 인간의 문제, 인간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한 인간, 한 국가, 한 사회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개별의 합과 전체 자체는 보는 관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는 의미다. 한 사회는 인간과 인간이 관계해 만든 것이지만 인간관계의 복합체로 보는 관점과 하나의 유기체로서 보는 관점에 따라 서로 보는 게 다르다. 쉽게 말해 인간 몸속 각 장기들이 마치 각기 개별적인 로직을 가지고 작동하는 듯싶지만 서로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듯 인간은 사회 속에서 서로서로 연결돼 마치 하나의 인간 몸속 장기들처럼 작동한다. 그런 하나의 사회를 보면 노자의 주장은 분명히 제대로 작동을 한다. 장점으로 단점을 보강하며 산다. 남는 것이 모자란 것을 보태며 산다.
인간의 몸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몸속의 각 장기 기능은 최저로서 '0'도 없고, 최고로서 '100'도 없다. 항상 파동을 그리며 일정한 범위 안에 머문다. 중용의 이치다. 물론 가끔 일정한 범위를 넘어설 때도 있다. 오히려 그렇게 극단까지 자신의 몸 기능을 활용해보는 건 나쁘지 않다. 고급 자동차를 구입해 최고 속도로 달려 보듯 말이다. 분명한 것은 반드시 다시 안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병이 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안정을 찾지 못하면 병이 된다. 극단적 사회는 몸처럼 쉽게 지친다. 몸에 이상이 생기면 건강할 때 아무렇지도 않았던 일들이 병에 치명적인 행동이 되기도 한다.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건전하고 건강한 사회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일들이 체력이 떨어진 사회에서는 치명적인 혼란을 초래한다. 사람의 병력이 체질마다 다르듯 사회 역시 체력에 따라 병치레를 자주 하기도 하고, 급작스러운 중병을 앓기도 한다. 병을 고치지 못한 사람이 죽음을 맞듯 병이 골수에 든 사회는 붕괴돼 간다.
개인은 그 속에 그냥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이다. 죽어가는 몸속에 다른 건강한 장기들이 최선의 노력을 다해 자기 기능을 하듯 개인을 그렇게 자기의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이다. 최선의 노력이란 그렇게 그 결과를 보고하는 게 아니다. 본래 그래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게 하늘의 도에 따르는 인간의 도다. 그래서 '성지'(誠之)라 한다. 결과가 좋으면 감사하면 되고, 아니면 그뿐이다. 바보 같다고?
이때는 그냥 반문을 해주면 된다. "그래? 안 하면 어쩔 건데?" 우리 말 삶에 대응하는 한자, 생(生)이 본래 그런 건다. 그냥 나온 것이다. 그냥 자라는 것이다. 주어진 여건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해 그냥 열심히 사는 거다. "나는 왜 이렇게 사는가?" 개미가 스스로 물을까? 개가 스스로 물을까? 어느 생물이 있어 이 질문을 할까? 일찍이 이 질문을 던지기 때문에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낫다 생각했는데, 지금은 거꾸로다. 인간을 빼고 만물이 본래 살아야 하는 그대로 사는 데, 이제 인간만 어떻게 사는지 잊은 듯싶다. 그냥 열심히 살면 되는데? 사람만 어떻게 열심히 사느냐 묻는다. 그래 현인들은 자꾸 "너 자신을 보라"하고, "자연을 보라"하는 데 내 귀에는 그 말이 그대로 들리지 않는다. 아직도 스스로의 심리를 해부하고 있고, 현미경으로 자연 속을 계속 파고 있다. "깊고도 깊다"라는 말에만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며 팥 나는 법이다. 콩이 스스로 콩이 되려 할까? 팥이 스스로 팥이 되려 할까? 콩은 좋고 팥은 나쁜가? 본래 그런데도 열심히 살면 콩은 콩이 되고, 팥은 팥이 되는 법이다.
삶이란 그저 콩이 콩이 되는 데 필요한 것을 채워가는 것이다. 필요라는 것은 부족한 것이다. 배고프다는 것이 배속이 비었다는 의미이듯 말이다. 배를 채우고 배가 다시 몸에 영양소를 공급하는 것이다. 배고프다는 감정은 위가 비었을 때 느끼지만, 비었다고 느끼는 게 아니다. 피 속에 당이 떨어지면 배가 고프다고 느끼는 것이다.
도는 본래 하늘에 있고, 그 성질은 사람마다 타고 나는 것이다. 하늘의 도에 우리는 인간의 도로 반응하며 산다. 인간의 시간, 공부의 성과가 아무리 특출나고, 신기하다고 해도 하늘의 시간 속에서 그냥 저 먼지 한 톨보다 작은 일이다. 그러고 보니 대학에서 하늘은 수많은 별을 담아 넓은 것이고, 땅은 한 줌의 흙들이 쌓여 두터운 것이라 한 말이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