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오사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가장 주목을 받는 것은 미국과 중국이다. 두 나라간의 ‘무역전이 확전할 것이냐, 휴전할 것이냐?’에 전 세계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아쉽게도 현재까지 진행상황을 보면 녹녹치 않다. 두 나라 담당자들은 주요 외신에 “최근 분위기가 좋지 않아 두 정상의 회담을 앞두고 준비가 부족한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미중 무역협상은 지난 5월 10일 이후 답보 상태에 빠져있다. 이후 미국과 중국 담당자들의 미팅은 중단된 상태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마퀴스(Garrett Marquis) 대변인은 “회담 준비는 현재 진행되고 있다. 아직 뭐라고 전할 내용은 없다”고 밝혔다. 백악관 경제고문 라리 쿠들로는 “트럼프 대통령이 양국정상회담에서 논의가 중단된 문제들을 다시 언급할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의 성공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함께 “중국의 양보가 부족하다”며 위협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바로 당일 중국 외교부는 “중국은 경제 개방과 미국과 무역회담에 개방적인 태도”라 강조하면서도 “양국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아직 밝힌 내용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중국 외교부는 그 전 주만해도 “미국이 무역 마찰을 원한다면 우리
소위 밀가루, 설탕, 시멘트 이렇게 세가지의 분말의 가격이 갑자기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963년 한국의 상황이다. 밀가루 판매소에는 사람들이 길게 밤새 줄을 섰다. 설탕직매소마다 사람들이 줄을 섰다. 미리 사놓지 않으면, 아침에 100원하던 것이 저녁에는 150원으로 가격이 뛰었다. 1963년 동아일보는 이렇게 썼다. “‘밀가루 배급을 달라 소동’ 직매소마다 사람들이 줄을 섰다. 한 주먹의 설탕, 밀가루라도 더 사려 아우성을 쳤다.” 소위 삼분파동이 벌어진 것이다. 사실 삼분파동은 각기 다른 이유에서 발생했다. 설탕만해도 당시 세계 설탕원료의 대부분을 제공하던 쿠바가 서방세계에 원당 수출을 중지하면서 발생했다. 설탕 원료가 공급되지 않으니, 설탕 가격이 치솟았도 생산자 입장에서는 설탕을 만들 길이 없었다. 설탕이 품귀현상을 빚으니 ‘사재기’(물건을 사서 쌓아두는 것) 현상이 벌어졌다. 1963년 6월 6일 한근 600g에 50원하던 설탕이 자고난 다음날엔 75원으로 뛰었다. 4~5개월 사이에 설탕 값이 10배나 올랐다. 정부가 나섰다. 정부는 직매소를 두어 일종의 배급제를 시작했다. 한 사람당 한근 이하로 팔았다. 직매소에서는 시중보다 설탕을 싸게 팔았다.
정말자기것인것인지알려면버려봐라 옛선인들이준충고다. 소유라는것은내게있어야만하는게아니다. 소유란내맘대로되는것이다. 내것은저절로내맘으로그대로된다. 내맘대로된것이야말로내것인것이다. 그런데그게영원히내것일까? 기업은어떻게소유하는것일까? 삼성그룹의영원한숙제는일찌감치선대이병철때부터시작됐다. 울산비료공장은이병철, 또지금의삼성에게기업소유권을어찌유지해야하는지끝없이고민하게한주인공이다. 울산비료공장, 제일제당, 제일모직을성공시킨이병철의회심의작품이었다. 한국정부도못하는유럽차관까지모두섭외를해놓고도한국국내정치상황의급변으로이루지못했다. 경제를중시하는혁명정부가들어섰지만, 이병철은울산비료공장을적극추진하지않았다. 여러가지이유가있었을것이다. 하지만현상만으로간단히이병철의자신의계획을버린것이다. 하지만그렇게버려졌던울산비료공장계획은엉뚱한순간되돌아왔다. 마치자신의진정한소유주는이병철이라는것을증명이라도하듯... 1963년10월한국에는대통령선거가있었다. 혁명정부가정권을민간에이양한조치였다. 그렇게뽑힌대통령이박정희였다. 혁명정부의수뇌가정식대통령이된것이다. 박정희는한국역사에이렇게중심인물이됐다. 이후그에대한평가는극과극으로나뉜다. 아쉽지만여기서논할이야기는아니다. 울산비료공장이그오랜기간을지난이병철에게다시돌아온것은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해 시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던 3.1운동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다. 문재인 대통령은 26일 "친일을 청산하고 독립운동을 제대로 예우하는 것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정의로운 나라로 나아가는 출발"이라고 말했다.문 대통령은 3·1절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둔 이 날 오전 서울 효창공원에 있는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오늘 국무회의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국가적 의미를 담아 백범기념관에서 열게 됐다"며 이같이 밝혔다. 문 대통령은 "우리 정부는 그동안 독립운동 역사를 기억하고 독립운동가를 예우하는 국가의 자세를 새롭게 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며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이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된 뿌리가 됐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또 "이곳 백범기념관과 함께 후손들에게 독립운동 정신과 민주공화국 역사를 건설할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도 계속되고 있다"며 "이 모두가 우리를 당당하게 세우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오늘 유관순 열사에게 국가 유공자 1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를 의결하는 정신도 같다"며 "유관순 열사는 3·1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중공업만이 한국을 살릴 수 있다. 한국 경제인협회의 회장을 맡은 이병철은 이렇게 판단했다. 협회 회원들의 논의 결과도 같았다. 이 같은 내용은 즉시 박정희를 수뇌로 한 혁명정부에 전달됐고, 채택됐다. 군인들의 장점은 별다른 게 아니었다. 빠르게 결정하고 대단한 추진력을 보였다.일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병철과 경제인협회 회원들은 미국과 일본을 찾아 우리 중공업 산업 부흥 계획을 알리고 투자를 요청했다. 하지만 토끼가 마음을 고쳐 먹는다고 호랑이가 될까?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해외의 시각도 그랬지만, 내부의 문제도 많았다. 무엇보다 이병철 수준의 경영을 이해하는 한국 경영인도 드물었다. 이병철의 자서전에는 이런 사례가 있다. “자금이나 기술 면에서 난처한 사람이 생기면 일본의 경제단체나 개인에게 연결시켜 주고 미국이나 구주(유럽)에도 알선하여 여러모로 서로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중에는 경영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이 없고 겉으로만 공장건설 계획을 내세울 뿐, 구체적으로는 아무런 준비도 없는 한심한 사람도 있었다. 중공업에 참여하겠다는 사람이 있어 일본에 동행하여 가와사키川崎 제철 사장을 소개해 주었다. 그러나 ‘도대체 이야기가 되지 않으니 사
한국비료와 이병철의 10년의 고난.-5 한국경제인협회의 탄생 5.16 군사 정권의 국정 운영의 핵심은 하나도 경제 건설, 둘도 경제건설이었다. 그 뒤가 바로 안보였다.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사정권세력은 ‘과감’이라는 군사정권을 특징을 그대로 살렸다. 각종 경제 건설 계획을 수립하고 과감하게 실천했다. 사실 어떤 계획도 실천보다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훌륭한 계획이라도 실천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물론 좋은 결과를 위해 좋은 계획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에 대한 고려 없이 각종 이상만을 담은 실천할 수 없는 계획은 이미 좋고 나쁨의 평가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너무 많은 선과 색을 넣으면 그림은 지저분할 수밖에 없고, 완성될 수 없는 이치다. 바로 4.19 혁명 정권의 한계였다.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것은 다른 게 아니었다. 순수한 국민의 힘이었다. 탱크와 총에 몸으로 맞섰던 일반 학생 국민들의 용기였다. 그러나 그 혁명으로 정권을 얻은 시민 정부는 너무나 무력했다. 수많은 주장들이 서로 맞섰고, 양보하지 않았다. 걸핏하면 거리로 나서 시위를 했다. 학생들은 학생대로, 공장의 공원들은 공원대로, 심지어 경찰도 경찰대로 시위를 했다. 어느
한국비료와이병철의10년의고난.-4 5.16군사혁명발발 이병철이김포공항에서청년의손에이끌려도착한곳은엉뚱하게도명동의메트로호텔이었다. 그곳에서이병철은가족과통화를한다. 가족에게우선자신이무사하다는사실을알렸다. 그리고그곳에서박정희혁명정부최고회의부의장을만나담판을한다. 당시상황은이렇다. 이병철이4.19 혁명정부의전횡에낙담해일본에서유유자적을하고있을때4.19혁명이후혼란한사회를안정시키겠다며1961년5월16일군사혁명이일어난다. 혹자는정변이라고도한다. 4.19 혁명이일어난지불과1년만의일이다. 사실이병철의자서전에도고백하고있지만, 당시이승만정권의갑작스런붕괴이후한국은국정운영의주체가없었다. 도심에서는경찰과학생, 노동자들이각자자신들의주장을하며시위를벌였다. 나라가온통주장뿐이었다. 군사혁명정부는빠르게나라를안정시켰다. 국민들의불만도빠르게잠재웠다. 그중하나가부정축재자들에대한처벌이었다. 4.19 혁명정부역시국민들의욕구불만을덜어주기위해이병철을부정축재자로몰았다. 이병철은당당히“말도안되는세금을부과하고그것을내지못했다고부정축재자로모는게문제”라고맞섰다. 그리고한국을떠났다. 4.19 혁명정부나5.16 군사혁명정부나같은문제를들고나와국민의불만을잠재우고자했다. 5.16 혁명정부는군의힘을바탕으로해더강한집행
한국비료와 이병철의 10년의 고난.-3 5.16군사혁명 발발 일본에서 이병철은 대부분 시간을 골프장에서 유유자적하게 보냈다. 그렇다고 시간을 소비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병철은 일본에 이미 수많은 인맥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렇게 일본의 우수한 인재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세상 동향을 읽었다. 그래서 이병철은 작은 한국에서 한국만 보지 않고 세계의 동향을 읽으며 경영구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1961년 5월 16일이었다. 이날 아침 7시쯤 이병철은 여느 날처럼 친지와 골프장으로 향하기 위해 호텔을 나와 승용차에 오른다. 이 때 일본인 운전사가 놀라운 소식을 전한다. “지금 한국에서 군사혁명이 났다고 합니다.” 5.16군사 혁명, 이 것은 당시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이 정치권을 뒤엎고 일으킨 정변이다. 4.19 혁명이후 정부가 나라를 제대로 안정시키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군부가 들고 일어선 것이다. 한국 역사는 이에 대한 평이 입장마다 극과 극으로 나뉜다. 혹자는 이 군사혁명으로 한국의 민주화가 늦춰졌다고 하고, 혹자는 이 군사 혁명으로 한국이 빈국에서 탈출해 부국의 반열에 들었다고 한다. 역사는 보는 입장
이병철은 일본 도쿄행 비행기에 오른다. 창 아래 펼쳐지는 고국 산하를 보면서 한국의 고전 시를 떠올린다. “가노라 삼각산(서울의 북한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돌아 올지 말지 머뭇거리는 상태) 하여라”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병철의 삼성은 큰 위기를 맞는다. 부정축재로 생애 처음 검찰에 출두해 조사를 받는다. 무리한 정부의 요구에도 순응하기로 한다. 그와중에도 그는 비료공장의 꿈을 접지 않는다. 하지만 부정축재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잠시 고국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병철은 정부 요직의 사람들을 만나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고 협조를 구하고자 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거절이었다. 어떤 이는 탈세범과는 상대하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 결국 이병철은 잠시 나라를 떠나 일본에 가 있기로 한다. 출국 직전의 심정이 그의 자서전에 잘 나타나 있다. “부정축재 문제는 3개월이 지났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국회를 포함하여 당국자들은 경제인을 책망만 했지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경제인의 힘을 유도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평소 가까이 지냈던 어느 재계 출신 의원이 재무부 등 관계 당국을 찾아다니며 일벌백계로 삼성만 엄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말을 듣고 아연실색했던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이처럼 신의와 의리가 없고 시비 분별을 모르는 지도자의 수가 적지 않으니, 나라의 장래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병철을 실망시켰던 게 있다. 이병철은 당시 비료공장의 계획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삼성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이라도 찾아서 이 일을 추진해야 한다고 하면서 심혈을 기울였던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하지만 결국 이 서류는 훗날 정부에서 실종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