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나무인 이유는 풀이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풀이 풀인 이유는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동물이 동물인 이유는 식물이 있기 때문이요, 꽃이 꽃인 이유는 풀이 있어 꽃과 풀이 다른 탓이다. 자연의 법칙이다. 서로 달라 조화롭고 서로 달라 화음을 낸다. 자연의 법칙, 그대로가 적용되는 게 한자의 세계다. 한자의 세계는 평등하다. 상호의존적이다. 한자 하나하나가 자신의 뜻을 갖고 문장 속에서 그 뜻을 발현한다. 한자의 뜻은 한자와 한자의 관계 속에서 더 분명해진다. 문장 속에 또 다른 한자와 호응해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차이는 필요할 때만 드러난다. 예컨대 ‘간(干), 우(于), 천(千)’ 모두 비슷하다. 차이가 적다. 그저 기울기가 다르고 꼬리 모양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의미는 서로 완전히 다르다. 간은 ‘줄기’, ‘’행하다‘는 뜻이고 우는 ‘~에’, ‘~보다’는 조사다. 천은 '10의 100배'요, '100의 10배'다. 생김새만 놓고 문장에서 한 글자만 쓴다면, 간을 우 같은들 우가 천 같은들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한자는 이렇게 평소에 구별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한 문장에 동시에 간이나 우, 우나 천 등 두 글자 이상 쓰이는 경우, 간은 다시 간이요
我的生意 wǒde shēngyi 내 사업 家荣,你听说了吗?... Jiā Róng,nǐ tīngshuō le ma? 찌아롱, 소식 들었어요? 凯文通过了HSK的高级考试! Kǎi Wén tōngguò le HSK de gāojí kǎoshì! 케빈이 HSK 고급 시험에 합격했대요! 和我有什么关系? 不是我的生意! Not my business! Héwǒ yǒu shénme guānxi? Búshì wǒde shēngyi! Not my business! 저랑 무슨 상관이 있죠? 제 사업이 아니에요! Not my business! *영미권에서 ‘business’로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를 많이 표현한다면, 중국에서는 ‘关系(guānxi)'로 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찌아롱의 대답은 ‘和我有什么关系?’로 끝내는 편이 좋다. 중국에서 ‘business(生意)’는 사업적인 얘기를 할 때만 쓰인다. 作者:刘志刚 画家:宋海东
같은 것을 비교해 다른 것을 알아내는 게 차별의 차(差)다. 같은 곡물을 비교해 둘의 다름을 보는 모양이다. 갑골, 금문 등에 등장하는 구(區)는 오늘날의 글자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작은 물건들을 하나의 경계로 묶어낸 모습이다. 일부 글자는 한 선을 꿴 모습도 있다. 즉, 구별의 구는 공통점을 갖는 여러 물건을 한 데 묶은 모습이다. 자연스럽게 각각의 공통점이 다른 무리들이 만들어지는 데, 그 그룹과 또 다른 그룹의 다름이 구별(區別)이다. 바로 이점에서 차(差)와 구(區)는 완전히 다르다. 간단히 말해 출발이 다르다. 차는 같은 것에서 출발하고, 구는 다른 것에서 출발한다. 모두가 다른데 한 가지 공통점, 혹 대표적 특징으로 묶이는 한 무리를 만드는 게 바로 구다. 구별은 그렇게 공통점과 특징으로 묶인 그룹 간에 이뤄지는 것이다. 차는 같은 것에서 떼어내는 것이고, 구는 다른 것을 하나로 묶는 것이다. 그래서 차별은 우리 가운데 있고, 구별은 너희 가운데 있다. 차별은 조직을 해치고 구별은 조직을 단합시킨다. 중요한 것은 차별이나 구별이나 그게 필요할 때만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만물은 어찌 구별하면 하나의 무리이기 때문이다. 지구의 만물은 우주 속 또
참새는 목이 짧아 참새요, 황새는 목이 길어 황새다. 참새가 목이 길면 참새가 아니고, 황새가 목이 짧으면 황새가 아니다. 황새가 목이 길다고 자르면 살지 못하고 참새가 목이 짧다고 늘이면 역시 살지 못한다. 생물이 그렇다. 서로 다르다. 본래 그렇다. 같은 새라도 참새와 황새가 다르고, 사람이라도 너와 내가 다르고, 너의 그가 다르다. 세상 만물은 다르기에 서로 어울려 산다. 다르기에 조화가 생기고, 만물이 있어 생동이 있다. 다르다는 건 평소 눈에 띄지 않는다. 참새와 황새가 다르다는 걸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는 걸 너와 내가 다르다는 걸 평소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 굳이 강조할 필요없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르기에 달리 살고 달리 살기에 조화롭되, 간여하지 않는다. 다른 게 강조될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것만 빼고 같을 때다. 모든 게 같을 때 비로소 다름이 두드러진다. 모두가 같기에 굳이 차이(差異)를 찾는다. 차이(差異)의 차(差)라는 게 그렇다. 같은 것끼리 비교해 다른 것이다. 갑골자의 차(差)는 벼(禾) 가지 두 개를 든 손이다. 훗날 하나를 들고 기구로 재는 모습의 글자 형태도 나온다. 자로 벼의 크기를 재는 것이다. 같은 벼의 다름을
“热”女朋友 “rè ”nǚpéngyǒu 뜨거운 여자친구 哇!你的女朋友真漂亮! ... Wa!Nǐ de nǚpéngyǒu zhēn piàoliàng ! 와! 여자친구가 정말 예뻐요! 是啊,我很喜欢她,她很热! Shì ā,wǒ hěn xǐhuān tā,tā hěn rè! 네, 제가 많이 좋아해요, 그녀는 정말 뜨거워요! 很热? Hěn rè? 뜨겁다고요? 是的,She is hot ! Shì de,She is hot! 네, She is hot ! *영어의 ‘hot’은 ‘섹시’라는 뜻도 있고 ‘뜨겁다’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벌어진 실수이다. 찌아롱이 말한 ‘she is so hot’은 ‘그녀는 참 섹시해요’라는 뜻인데, 직역으로 ‘她很热’라고 표현하면 ‘그녀는 정말 뜨거워요’가 된다. 정확한 표현은 ‘她很性感(xìnggǎn)’이다. >>맞는 문구: 是啊,我很喜欢她,她很性感! 作者:刘志刚 画家:宋海东
단장의 고사는 아기를 잃은 어미 원숭이의 이야기다. 아기 원숭이가 잡히자, 어미가 따라 오며 울다 울다 결국 죽고 말았는 데, 죽은 어미 원숭이의 그 가슴을 열어보니 너무 깊은 슬픔에 오장육부가 마디마디 끊어져 있었다는 이야기다. 짧지만 이처럼 혈육 간 이별을 표현한 글이 있을까. 그래서 나온 표현이 단장, 장이 끊어졌다는 말이다. 단장의 슬픔이 단장의 아픔이 바로 이별의 슬픔요 아픔인 것이다. 애달픈 것은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이 아픈 이 슬픈 단장의 이별을 약속 받는다는 점이다. 그게 삶이다. 삶은 얻었다 잃는 것이다. 차면 기우는 달처럼 만났다 헤어지는 게 바로 우리네 삶이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노랫말 그대로다. 우리는 매일 너무 살갑고 익숙한 너무도 사랑하는 오늘의 너와 너희와 이별하고 있다. 갑골자 별(別)은 이런 이별의 아픔을 하나 틀림없이 그려낸다. 뼈에 붙었던 살점을 칼로 뜯어내는 모습이다. 뼈에서 살이 떨어지는 아픔, 그게 바로 이별의 별이다. 단장의 고사, 이별의 아픔, 별(別)이라는 한자는 그렇게 담고 있는 것이다.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것, 내게서 너를 떼어내는 것, 그래서 너무도 아픈 것 아파서 잊을 수 없는 것 바로
세상은 존재(存在)로 채워져 있다. 세상(世上)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란 없다. 존재하기에 인식(認識)되는 것이다. 또 인식되지 않는 걸 아는 것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걸 우리는 인식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알 길이 없다. 우리는 감지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알 길이 없다. 표현할 길이 없다. 존재하기에 있다하고 있지 않음을 알기에 없다하는 것이다. 이렇게 유와 무는 모두가 하나의 존재다. 유의 존재요, 무의 존재인 것이다. 갑골자에서 유(有)는 손안의 고기다. 본래 손 그 자체다. 있다는 것은 내 손으로 만져지는 것이며 내 손에 들려지는 것이었다. 내 손에 없는 게 내 손에 있다가 없어진 게 바로 없는 것이었다. 무가 있어 유가 나오고 유가 있어 무가 나온 것이다. 있다하는 것도 없다하는 것도 없음도 있음도 모두가 세상에 존재하기에 느끼고 인지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와 무는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존재로서 모두가 하나인 것이다. 없다는 존재(存在)요, 있다는 존재인 것이다. 공(空)과 색(色)처럼 양(陽)과 음(陰)처럼 실(實)과 허(虛)처럼 하나의 존재들인 것이다. 비워진 것이 공이 채워지려 하고 채워진 색이 비워지려 하듯 뜨거운 양이 차가워지
무는 없다는 것이다. 없다는 것은 어찌 알까? 한자를 그런 무(無)를 표시했다. 그것도 상형자다. 도대체 어떤 모습에서 없다는 것을 있지 않다는 것을 표시할 수 있었을까? 사실 없다는 것은 있는 것을 다 알고,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아는 것이다. 있는 것들, 그 외 것이 바로 무(無)인 것이다. 있는 것을 빌어 없음을 아는 것이다. 사실 갑골자의 무(無)가 그렇다. 춤을 추는 모습이다. 춤을 추며 손에 든 것을 몸에 부착한 것을 모두 보여주는 게 바로 무(無)다. 춤이라는 의미의 무(舞)가 생기면서 없을 무(無)와 구분됐지만 없을 무(無)나 춤출 무(舞)나 본래 하나의 글자였다. 없다는 것은 있다는 것을 다 보여준 뒤야 비로소 알게 된다. 내 곁에 무엇이 없는지를 …. 갑골자 무는 그렇게 실제론 가차자다. 춤 무(舞)를 빌어 없을 (無)로 썼다. 있음을 빌어 없음을 표기한 것이다. “遥知兄弟登高处, 遍插茱萸少一人。” (요지형제등고처, 편차수유소일인) “저 멀리 형제들 산에 올랐겠지. 그리고 돌아가며 수유나무 가지를 머리에 꽂다 그 때 비로소 다시 알겠지. 내가 자리에 없음을 ….” 당나라 시인 왕유의 시 한 구절이다. 중양절 산에 올라 수유나무 가지를 머
一起“苍蝇” yìqǐ “cāngying ” 함께 파리해요 老师,这是我送你的新年礼物!... Lǎoshī,zhè shì wǒ sòng nǐ de xīnnián lǐwù! 선생님, 선생님께 드리는 새해선물이에요! “亲爱的老师,蝴蝶苍蝇,时间苍蝇,新年我们一起苍蝇!” “qīnàide lǎoshī,húdié cāngying,shíjiān cāngying,xīnnián wǒmen yìqǐ cāngying!” “사랑하는 선생님, 나비가 파리하고, 시간이 파리하고, 새해에는 우리 함께 파리해요!” 老师,让我们一起fly吧! Lǎoshī,ràng wǒmen yìqǐ fly ba! 선생님 우리 함께 fly해요! 哈哈,那我们可都完了! Hā hā,nà wǒmen kě dōu wán le! 하하, 그러면 우리 다 끝장인걸요! *영어에서는 'fly'가 상황에 따라 ‘날다’라는 뜻도 되고 ‘파리’라는 뜻도 되지만, 중국어에서는 ‘날다’와 ‘파리’는 확실히 구분되어 있다. ‘날다’는 ‘飞(fēi)’이고, ‘비상하다’는 ‘飞(fēixiáng)’이다. >>맞는 문구: 新年我们一起飞吧! 作者:刘志刚 画家:宋海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참 어려운 질문이다. 수많은 법전(法典), 종교 경전(經典)이 있어도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쉽지가 않다. 많은 이들이 제대로 판단하지 못해 실수를 한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서양 입장에선 인간이 선악과를 먹어 생긴 불행이다. 정말 그렇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곧고 굽음에 대한 판단은 사실 불행이다. 그래서 굳이 따져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있지만, 최대한 피하려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세상은 때론 몰라서, 구분하지 않아서 나은 게 있다. 아니 더 낫고 더 많다. 최소한 마음의 평화를 위해선 좋은 게 좋다고 넘어가는 게 역시 좋다. 그래도 따진다면 옳고 그른 것, 곧음과 굽음 둘 가운데 무엇을 따져야 할까. 사실 곧음은 하나다. 어찌 둘이 다 옳을까. 즉 따질 게 없다는 의미다. 굳이 따진다면 굽음이다. 얼마나 굽었는지, 따져봐야 안다. 한자 곧을 직(直)과 굽을 곡(曲)에는 이 같은 생각이 담겨 있다. 곧을 직은 눈에 보이는 하나요, 굽을 곡을 굽을 재는 자다. 눈금이 분명한 자다. 곧을 직은 덕(德)에 포함돼 있어 하나의 의미군(意味群)을 이룬다. 눈을 부릅뜨고 사거리를 걷는 모습이다. 일직선으로 가는 모습이다. 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