虽然郑周永踏上了平壤的土地,但他开发朝鲜的梦想还是难以实现,因为韩国与朝鲜之间的政治关系不稳定。首先,郑周永在韩国的地位有所改变。1992年,郑周永参选总统,但没有成功,之后,新上台的金泳三政府当然不会看好现代集团。对于新政府而言,现代集团雄厚的资金与很强的组织力是一种巨大的压力,尤其在选举的票数上,将现代集团的工作人员与家属的名额都加起来,总人数确实不少,所以郑周永的总统梦虽以失败告终,但他创立的“统一国民党”,却获得了不少议席。郑周永参选总统选举的时候,还把对朝事业当作选举公约。其次,朝鲜政局也有了重大变化。1994年,金日成因心肌梗塞逝世之后,朝鲜的政局陷入重重迷雾。
郑周永会长经过板门店回到韩国,在统一大桥南边的欢迎仪式上举着鲜花回礼。
在这种情况下,郑周永还是尽力寻找再次访朝的机会,努力建立韩国与朝鲜之间的交易关系。郑周永从创立50周年纪念活动预算中省出了5亿韩元,于1997年6月,作为韩国大企业的统帅,首次拿出了帮助朝鲜老百姓的基金。之前他还向“统一院”递交过访问故乡的访朝申请书。
所谓“至诚能感天”,郑周永的坚持与努力,衍生出了1998年的“牛群外交”。被称为“玉米大王”的韩国玉米种植专家金顺权,是原先帮助郑周永与朝鲜联系的人。当时,金顺权用他培育的玉米良种,在朝鲜进行人民救济项目,所以他常出入朝鲜,与领导阶级有了较深的关系。金顺权虽然尽力地帮了忙,但由于朝鲜政权的交替,没能起到很大的作用。
郑周永不得不找日本的中介,日本《朝日新闻》的首尔分社社长小林庆二与吉田猛。吉田猛正是促成郑周永“牛群外交”的人物。吉田猛在朝鲜的人脉很广,后来他甚至被疑为朝鲜间谍。针对这样的疑惑,他于2005年提出了诽谤诉讼,并取得了胜诉。
从东海港出发的金刚号。1998年11月18日,开往金刚山的金刚号从东海港出发,历史性的金刚山观光项目开启了。
经过如此复杂又艰难的过程,郑周永的“牛群外交”取得了成功。再次访朝之后,郑周永的对朝事业也进展顺利。朝鲜劳动党中央委员会总书记金正日曾对郑周永说:“金刚山事业就不要和其他企业一起做了,我希望郑周永会长您一个人来做。”除了金刚山开发项目之外,郑周永与朝鲜政府还讨论了西海岸油田共同探测项目、平壤火力发电站建设项目等各种经济合作项目。
这些都是需要巨额资金的国家重建事业,但郑周永已经是身经百战的老战士了,并没有因项目的数量或规模而高兴,反而苦恼如何让每个项目都成功。就在这个时期,郑周永为了自己的大儿子,还设想了汽车组装事业、铁路车辆事业等各种对朝事业,但由于朝鲜内部的情况,郑周永最终只能集中精力做金刚山观光开发项目。
现代集团会长郑周永给朝鲜送了1001头牛,敞开了金刚山观光的大门。
郑周永最后选择做金刚山开发项目是有几个重要原因的。首先,当时的韩国政府与朝鲜政府之间没有信任关系,虽然直至今日,在关系上也没什么进展,但当时的情形更加严峻。韩国政府怀疑:“进行对朝项目,韩国政府的资金流入朝鲜,会不会造成韩国在经济上的劣势?”朝鲜政府则担忧:“韩国的资金流进朝鲜,改变朝鲜人民对韩国的印象,会不会进一步造成对政权的威胁?”金刚山与平壤相隔很远,所以朝鲜政府相对而言比较安心。另一方面,金刚山与韩国比较近,所以也让韩国政府比较安心。更重要的是,金刚山观光开发项目是交流事业,为了去看金刚山,韩国人民得访问朝鲜,与朝鲜人民进行面对面的交流。人与人之间,只有接触与交流,才能在不知不觉间敞开心扉。郑周永瞄准的正是这一点。对于郑周永个人而言,金刚山是一个意义非凡的地方。年轻的他曾经离家出走,来到金刚山。望着绿水青山,他再一次下定决心,追求自己的梦想。能够在这样的金刚山,为韩国与朝鲜之间的交流活动而工作,他感到无比的荣幸。郑周永的坚持与奋斗,最后连朝鲜政府也感动了,金刚山观光开发项目正式开启。
笔者 淸露 图片摘自 现代集团
现代集团与创始人郑周永(22)
금강산 관광개발 사업을 시작하다
평양 땅은 밟았지만 정주영의 북한 개발의 꿈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남북의 정치 상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 한국에서 정주영의 입지가 달라졌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뒤 당선에 실패하자 새로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정주영의 현대그룹을 곱게 볼 이유가 없었다. 당장 현대그룹의 막강한 자금력이 부담스러웠다. 조직력도 대단했다. 일단 직원과 가족만 해도 선거표로 따지면 적지 않은 수였다. 그래서 정주영은 대통령 선거에서 실패했지만, 그가 만든 정당, 통일국민당은 적지 않은 의원을 배출했다. 정주영은 대통령 후보로 나서면서 대북 사업을 공약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북한 정권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1994년 김일성이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뒤 북한 정세가 안개 속에 빠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주영은 어떻게 하든 방북 기회를 잡고 남북 교역의 물꼬를 트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현대그룹 창립 50주년 기념행사비 가운데 5억원을 아껴 모아 이를 1997년 6월 대기업총수로서는 처음으로 북한 동포를 위한 기금으로 내놓는다. 그에 앞서 그는 통일원에 고향 방문을 하겠다며 방북신청서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결국 정주영의 애틋한 노력은 1998년 소떼몰이 방북으로 이어진다.
본래 정주영을 대신해 북한과 접촉했던 인물은 옥수수박사로 당시 유명했던 김순권金顺权이었다. 그는 실제 옥수수 종자 개발을 해 북한에 보급한 인물이다. 지원 사업 덕에 북한에 자주 드나들며 북한 지도부 사람들과 사귀었다. 그러나 김순권은 실제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가 알았던 지도부 인사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교체됐기 때문이었다.
정주영은 어쩔 수 없이 일본 쪽에서 중개인을 찾는다. 일본 아사히朝日신문 서울지국장을 지낸 고바야시 게이지小林庆二와 요시다 다케시였다. 특히 요시다 다케시가 정주영의 소떼몰이 방북을 성사시킨다. 요시다의 북한 인맥은 대단해서 훗날 그는 북한 공작원이었다는 의혹도 받았다. 이와 관련해 요시다는 2005년 명예훼손 소송까지 벌어져 승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겨우 정주영의 소떼몰이 방북이 성사됐다. 방북이 성사되면서 정주영의 북한 사업도 급물살을 탔다. 김정일 위원장은 정주영에게 “금강산 사업은 다른 기업과 나누지 말고, 정주영 회장께서 모두 추진하기 바란다”는 말까지 들었다. 금강산 개발 외 서해안 유전 공동탐사, 평양 화력발전소 건설 등 다양한 경제 협력 방안이 논의됐다.
이 모든 사업은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국가 재건 사업이었다. 정주영은 이미 한국의 경제 개발을 경험한 인물이었다. 사업 목록에 기뻐하기 보다 그 사업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탄생시킬지 고심했다. 이때 큰 아들을 위해 북한 내 사업도 구상했었다고 한다. 자동차 조립이나 철도 차량 사업 등도 고민했었다. 하지만 이런 계획을 추진하는 데 북한의 여건이 만만치 않았다. 정주영은 결국 금강산 관광 사업에 집중하게 된다.
정주영이 금강산 관광 개발 산업을 택한 것은 여러 이유가 있었다. 우선 당시 남북간 불신이 깊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요즘도 그렇지만, 북은 북 대로 남은 남 대로 서로 믿지는 못했다. 대북 사업이 진행되면 한국 정부는 북한에 자금이 흘러 들어가 북에 유리하지 않을까? 의심을 품었고, 북은 남한의 자금이 국민의 마음을 흔들어 정권에 위협이 되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금강산은 북한 평양과 멀리 떨어져 북한 정권의 이런 불안을 안심시키는데 유리했다. 또 남쪽과 가까워 한국 정부를 안심시키기에도 좋았다.
무엇보다 금강산 관광개발은 인적 교류의 사업이었다. 남한 사람들이 북한의 금강산을 보러 북으로 가야 하는 일이었다. 사람이란 게 서로 만나 부딪쳐야 마음도 열리고 하는 것이다. 정주영은 이 점을 정확하게 노리고 있었다. 정주영 개인에게도 금강산은 남다른 곳이었다. 어린 시절 가출할 때 들렀던 곳이다. 청운의 꿈을 다시 한번 다졌던 곳이다. 이런 금강산에서 남북으로 갈라진 조국을 위한 교류사업을 시작한다는 게 정주영에게도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정주영이 강하게 밀어붙인 끝에 북한 정권도 결국 손을 들고 만다. 금강산관광개발 산업이 본격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