为了展开现代集团的“对朝事业”,我们先要让时光逆转几年。1989年,访问朝鲜的郑周永,体会到了衣锦还乡的激动心情,但这不是这集的重点,今天的故事重点是,现代集团的“对朝事业”。
1981年,郑周永首次产生“进军朝鲜市场”的想法。当年,郑周永作为韩国的“全国经济人联合会”(以下简称“全经联”)的会长,正在致力于1988年首尔奥运会的申办。为了进行招商引资活动,郑周永访问了德国的巴登巴登,偶然与朝鲜代表金有顺见面。当时,郑周永对金有顺说:“如果韩国成功申办奥运会,那我们在板门店周围设立竞技赛场,让韩国与朝鲜选手共同进行和平统一运动吧。”郑周永想着,就算把个人财产都拿出来,也要尽力设立大规模的竞技赛场。
访问前苏联的郑周永会长,在莫斯科与戈尔巴乔夫总统见面。
郑周永的话让金有顺印象深刻。郑周永还对金有顺说:“我的故乡就是江原道的桶泉,希望能在生前最后一次回到家乡。”金有顺回答说:“一定会有机会的。”经过上几集的故事,我们都知道答案。才不到8年的时间,郑周永与金有顺的话就成真了。但当时的当局者,谁能预知未来?
或许是金有顺向朝鲜政府传达了郑周永的意愿,郑周永于1987年受到了朝鲜“祖国和平统一委员会(以下简称祖统委)”的访朝邀请。虽然奥运会已成功申办,但韩国政府还是保持了较为保守的态度,不批准郑周永访问朝鲜。第二年的1988年,朝鲜政府再一次向郑周永发出了邀请函,但韩国政府还是不允许郑周永访朝。
横穿欧亚大陆的列车。“建立横穿欧亚大陆到韩国的铁道”是郑周永会长生前未能实现的心愿。
1989年,郑周永受到朝鲜政府的第三次邀请之后,韩国政府终于点头同意了。当时,卢泰愚总统做出了“7·7宣言”,并表示:“南北韩将翻越隔离的高墙,在各个领域进行交流。”虽然郑周永访朝取得了圆满成功,但他的“对朝事业”却没能顺利进行。关于事情的发展,专家们提出了不同的解释,但其中认同度最高的解释是,韩国政府由于政治原因,没有积极开展南北交流活动。
根据历史资料,郑周永在成功访朝之后的第二年4月,试图再次访问朝鲜,但最终没能获得韩国政府的批准。
然而,让郑周永成为南北交流的契机是,韩国政府怎么都没想到的前苏联。郑周永作为韩国企业家首次受到苏联商工会议所所长的邀请,于1989年前往莫斯科,访问了前苏联。经过此事,虽然韩国与朝鲜之间的交流活动被延误,但韩国与前苏联之间的交往有了新的突破。
1990年11月,郑周永作为韩国企业家首次访问了克里姆林宫,与当时前苏联总统戈尔巴乔夫见面商谈了经济交流问题。戈尔巴乔夫提出了韩
国对纳霍德卡经济特区的支持请求,郑周永谈到了关于西伯利亚与沿海地区的开发问题。后来成为第17届韩国总统的李明博也参加了这次的面谈。俄罗斯的塔斯社详细报道了该面谈的内容。当时,郑周永提出了“开发西伯利亚的天然气,横穿朝鲜地区,供给韩国”的想法,还有“建立从西伯利亚到韩国的铁道”的想法。1990年初,在一位韩国企业家的脑海中,“从平壤到欧洲的大铁路网”已浮现。
1981年,郑周永会长作为首尔奥运会的申办委员长,签署奥运会主办合同。
“如果可以建立从海参威到中国东北地区,到朝鲜,到韩国,最后到日本的交通纽带,我相信21世纪的经济问题将会被解决。”
这是郑周永在日本《日经新闻》采访中提出的信念。另外,郑周永还提出了“将平壤与新义州之间的2车道高速公路,扩大为10车道高速公路”的想法。如果郑周永的想法得以实施,那么朝鲜的物流网一定有了大大的改变,其经济情况也肯定与现在完全不同,或许朝鲜不会再开发核武器,作为一个经济大国在国际舞台上正与韩国竞争。当然,这些都是如果:如果郑周永还活着,并实现了他的所有愿望。故事情节慢慢发展到了我们在第一集中讲述过的“牛群外交”。
笔者 淸露 图片摘自 现代集团
现代集团与创始人郑周永(21)
평양에서 유럽까지 철로를 꿈꾸다
현대그룹의 대북 사업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다시 시간을 되돌려야 한다. 1989년 북한을 찾은 정주영은 일행과 함께 고향을 찾는 감격도 맛본다. 모두 기록할 가치가 있는 장면이지만, 그래도 여기서 다룰 사안은 아니다. 현대그룹의 대북 사업이 주제다.
정주영이 북한 진출을 염두에 둔 것은 1981년부터의 일이다. 당시 정주영은 한국의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 회장으로 88년 서울올림픽 유치 활동에 한창 힘을 쏟을 때였다. 유치 설명을 독일의 바덴바덴을 찾았을 때 정주영은 우연히 북한의 대표인 김유순金有顺과 마주치게 된다. 그때 정주영은 김유순에게 “남한이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면 판문점 주변에 경기장을 건설해 남북한 선수들이 함께 통일운동을 할 수 있게 하자”고 말했다. 사재를 털어서라도 대규모 경기장을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김유순 역시 정주영의 말을 인상 깊게 받아들였다. 정주영은 김유순에게 “고향이 강원도 통천”이라며 “생전에 꼭 다시 찾고 싶다”는 말도 전했다. 김유순은 이에 “꼭 그러실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우리는 미리 답을 안다. 불과 8년만에 정주영과 김유순의 말은 현실로 실현된다. 그러나 당시 누가 미래를 알았을까?
김유순에 의해 정주영의 의도가 전해졌는지, 정주영은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통위) 명의의 초청장을 받는다. 1987년의 일이다. 이미 올림픽 서울 개최가 확정된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아직 그렇게 개방적이지 않았다. 정부의 허가를 받지 못해 정주영의 방북은 성사되지 않았다. 북한은 이듬해 연이어 정주영에게 초청장을 보내지만, 역시 한국 정부가 허락하지 않았다.
1989년의 평양행은 정주영이 북에게 세번째 초청장을 받은 뒤의 일이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북과 “남과 북은 분단의 벽을 헐고 모든 부문에 걸쳐 교류를 실현한다”는 내용의 7∙7선언을 한다.
그러나 정주영의 대북 사업은 1989년 방북이래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한국 정부가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남북교류를 부담스러워 했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자료에 따르면 정주영은 평양 방문 직후인 그해 4월 다시 북한을 방문하기로 했지만, 한국 정부의 허가를 얻지 못한다.
정주영이 북한 교류의 디딤돌이 된 것은 당시 남한,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소련 덕이 컸다. 정주영은 남한 기업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소련 상공회의소 초청을 받아 1989년 북한 방문 직전 모스크바를 찾는다. 북한과 교류는 이후 지체됐지만 소련과 교류는 속도를 더했다. 1990년 11일 정주영은 한국 기업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크렘린 대통령궁을 방문한다. 정주영은 당시 소련 대통령이던 고르바초프와 면담을 하고 경제교류 문제에 대해 논의를 한다. 고르바초프는 나훗카 경제특구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고, 정주영은 시베리아와 연해주 개발을 제안한다.
훗날 대통령이 되는 이명박 현대건설 사장이 이 면담에 배석했다. 관련 내용은 소련이 타스통신을 통해 자세히 보도됐다. ‘시베리아 천연가스를 개발해 북을 통해 남한에 공급하겠다’ 바로 정주영의 당시 구상이었다. 정주영은 또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한국까지 연결하는 구상도 했다. 평양을 거쳐 유럽까지 이어지는 대 철도망에 대한 구상이 이미 1990년 초기 한국의 한 기업인의 머리 속에 있었던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주, 북한과 남한, 그리고 일본 열도를 잇는 번영의 고리가 완성된다면 21세기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크게 열릴 것으로 확신한다.”
정주영의 확신이었다. 그는 이런 구상을 일본의 신문인 니케이日經와 인터뷰에서 밝힌다. 또 정주영은 평양에서 신의주까지 2차선 고속도로를 10차선으로 확대한다는 구상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대로 실현됐다면 북한의 물류망이 크게 달라졌고, 경제 사정도 지금과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아마 북한은 더 이상 핵무기에 의존하지 않고 국제무대에서 당당한 경제 대국으로 한국과 경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주영이 살아 뜻한 바를 이뤘다면 말이다. 점점 이야기는 이제 우리가 정주영 이야기를 처음 시작했던 소 떼 방북의 순간으로 다가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