到60年代后期,韩国的经济发展终于有了活力。通过军事政变上台的朴正熙政府,在执政初期致力于解决国民的生计问题,60年代后期,则努力实现经济复兴,包括进行国土大开发事业。韩国的国土几乎全是山地,所以想要高效利用这片土地,全国范围的大开发工程是必不可少的。占韩国国土面积70%的山地,主要由没有矿物资源的山脉组成,山脉之间还有许多大河小溪,周围地形较为险峻,给国民的来往造成了很大的不便。再加上,当时的韩国没有足够的基础设施,连公路、铁路、电网等最基础的设施供给也跟不上。
1964年,郑周永夫妇与朴正熙总统一起参加了丹阳市的水泥工厂竣工仪式。
朴正熙政府着手进行的第一个国土开发工程,就是四大江整顿事业,利用山势建设大坝电站。“昭阳江大坝工程”正是这“四大江整顿事业”的第一个纽扣,也是新政府的第一个大规模建设工程。
由于这个项目是国家的重点项目,初期的所有策划与可行性调查,当然由在世界土木工程产业占据第一、第二位的日本企业来负责。实际上,用于昭阳江大坝工程的资金也源于日本。日本著名的土木企业“日本工营”进行了昭阳江大坝的设计,提出了最典型的混凝土坝设计。也就是用混凝土将峡谷拦截后建成大坝,但问题是现场的实际情况。
昭阳江周围的山岳地形险峻,道路十分狭窄,难以搬运足量的材料与混凝土,以供120米高的大坝建设使用。就算没有路况问题,当时韩国的混凝土产量本就不足,无法满足修建如此巨大的大坝的需求量。就算能够从日本进口,运到如此偏僻的地方必定要花费一笔相当数额的运费,建材价格也要上涨,整个项目的经费无疑变成了天文数字。
昭阳江大坝项目是四大江整顿事业的第一步,也是韩国历史上规模最大的土木工程。经过昭阳江大坝项目,现代建设一跃成为世界级建设公司。
郑周永苦思了很长时间后,正式对日本的建设方式提出反对意见,并设计了新的大坝施工方案:取昭阳江周边的砂石,建立大坝。这是一个惊人的想法。在山地上建设大坝的时候,必定会开山崩石头,无法避免的会多出大量的砂石。利用这些砂石来修建大坝,不仅能解决搬运材料的问题,还能减少大坝的建设经费。
第二次大战以后,各个国家在修建百米以上的大坝时,一般都采用砂石结构。但问题是现代建设的技术。现代建设具有建立砂石结构大坝的技术吗?听到郑周永提出的新方案之后,不管是公务员还是日本企业都强烈反对。公务员担心新型建设的风险,日本企业不想失去一笔很好的生意。日本工营的高层甚至当面对郑周永说:“哪所学校教的你这样的东西?”直接讽刺了郑周永只有小学毕业的学历。
面对这样的压力与侮辱,郑周永还是没有屈服,他冷静地说服了政府。其实,郑周永提出的方案正合朴正熙总统的意。为了建设韩国最大的大坝,韩国政府已在日本那里有巨额借款,如果再让日本企业来标注昭阳江大坝的工程,这借来的钱都还没偿还,还要再给日本一笔钱。朴正熙总统不愿意看到这样的结局。
经过长时间的努力,郑周永终于拿下了昭阳江大坝项目。最终,砂石结构的大坝取得了大成功。不仅是日本,连韩国政府也曾担忧施工质量不符合标准,万万没想到,郑周永建设的新型大坝“昭阳江大坝”,竟会运转得如此好。经过昭阳江大坝项目,现代建设一跃成为世界级建设公司。1972年11月,昭阳江大坝开始全力运转。朴正熙总统参加纪念仪式,说道:“今日,我们站在一个通过挑战精神和强力意志克服大自然给予的困难的人奏响凯歌的现场。”这就是朴正熙总统在大众面前给予郑周永会长的赞赏。
笔者 淸露 图片摘自 现代集团
现代集团与创始人郑周永(14)
4대강 개발 한국 개발의 시작점…
현대건설 한국 국토 개발의 첫 삽을 뜨다
한국 경제가 본격적인 생기를 띤 것은 1960년대 후반의 일이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무엇보다 국민의 생계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을 했고, 1960년 후반에 들어 본격적인 경제 부흥에 주력한다. 국토대개발 사업도 이 때 출발한다. 전국에 산이 대부분인 국토를 좀더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계획이 국토개발 사업이었다. 이때만해도 한국에는 도로도 철도도 전기도 부족했다. 솔직히 부족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런 부족함은 국토 70%를 자연 자원도 별로 많지 않은 산이 차지하고 있다는 원인이 컸다. 산이 많다는 것은 곳곳에 크고 작은 강이 많다는 것도 의미했다. 쉽게 말해 당시 한국의 땅에는 높은 산과 강으로 좁은 산하가 서로 왕래하기도 불편한 지경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처음에 손을 댄 것이 한국의 주요 4대 강 주변을 정비하는 사업이었다. 특히 많은 산을 이용해 댐을 건설해 부족한 전기를 만드는 것은 이 사업의 주요 부분에 속했다. 소양강 댐은 이런 4대강 정비사업의 첫 단추이면서 규모가 조선반도에 사람이 산 이래 가장 큰 사업으로 주목을 받았다.
당연히 사업의 중요성이 큰 만큼 사업 초기 모든 계획과 타당성 조사는 당시 토목사업 분야 세계 1, 2위를 다투던 일본 기업이 맡았다. 사실 소양강 댐 사업 자체가 일본의 돈으로 진행이 됐던 것이다.
일본의 니혼에이고(日本工营)가 소양강댐의 설계를 맡았다. 니혼에이고가 내놓은 방안은 당시 가장 일반적인 콘크리트 댐 방식이었다. 말 그대로 콘크리트로 계곡을 막는 댐을 짓는 것이다. 문제는 당시 상황이었다.
당시 소양강 댐이 건설되는 산악지대는 길이 좁아 자재를 나르기 조차 힘들었다. 120m 높이의 댐을 지을 자재와 콘크리트를 실어 올리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특히 문제는 한국에서는 콘크리트가 당시만 해도 소량이 생산되었을 뿐이라는 점이다. 댐을 지을 막대한 콘크리트는 물론이고 웬만한 자재들 모두가 일본에서 수입을 해야 할 판이었다. 당연히 자재 마련 경비가 천장부지로 치솟을 게 뻔했다.
정주영은 고민 끝에 일본의 방식에 반대를 하고 스스로 방안을 마련한다. 바로 댐을 쌓으면서 자연히 깎을 산의 모래와 흙을 이용해 댐을 짓는 방법이었다. 참 놀라운 생각이었다. 댐을 지어 어짜피 물에 잠길 언덕마저 모두 깎아서 자재로 이용할 수 있었다.
이미 흙으로 댐을 짓는 방법은 사례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현대건설의 기술력이 과연 그 것을 성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안정적인 것을 추구하는 한국 공무원들은 물론이고, 당장 자재비 등으로도 한몫을 챙기려 했던 일본의 반대가 심했다. 니혼에이고 간부는 공식 석상에서 정주영 당시 현대건설 대표에게 “당신은 어느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냐?”고 몰아세웠다. 정주영이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것을 비꼬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굴하지 않았다. 차분히 정부를 설득해 나갔다. 무엇보다 정주영 생각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내심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한국 최대 규모의 사업을 벌인다고 하면서 일본의 차관을 빌려왔는데, 결국 그 차관 그대로를 일본에 내주면서 일본 손에 전적으로 소양강 댐을 짓도록 한다는 게 박 대통령의 심기를 상하게 했던 것이다.
정주영의 노력에 박정희도 결국 동의하고 만다. 그리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일본은 물론 한국의 많은 이들이 부실공사를 우려했지만, 소양강댐은 지금까지도 튼튼하게 자기 역할을 하고 있다. 현대건설은 이 공사로 단숨에 그 실력을 세계에서도 주목받게 된다. 1972년 11월 담수가 시작됐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기념식에 참석해 “우리는 인간이 엄청난 도전 정신과 강한 의지로 대자연을 극복하며 개가를 올린 산 증거를 보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순수하게 고 정주영 회장에게 바치는 찬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