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郑周永,永远的挑战家。”这是许永燮(音译)对郑周永的评价。许永燮自称“郑周永经营学的博士”,是了解郑周永人生故事与企业经营战略的韩国媒体人。对郑周永了解的越多,笔者也越认同,许永燮对郑周永做出的正确评价。敢于不断挑战,这就是郑周永的人生。
郑周永1915年11月25日生于朝鲜江原道通川郡松田面峨山里。郑周永的祖辈在咸镜北道明川郡居住了十一代,直到曾祖父那一代的甲午年,反封建斗争爆发,曾祖父为了避难,领着祖父三兄弟来到峨山里。郑家向来注重学习,郑周永的祖父在村里开了学堂,教育郑家小辈以及村里的小孩们。当时,整个国家处于动乱的局面之中,学堂收入根本不足以养活一家人。
那时候的朝鲜半岛非常贫穷,很多老百姓连饭都吃不上,更不用说教育了。如今恋人们必去的浪漫之地首尔清溪川,当时是贱民与乞丐的居住之地,满地都是贵族阶级两班扔下的垃圾与废物。首都首尔市都如此,江原道的情况,就可想而知了。
郑周永会长年轻时最爱读的小说是春园李光洙《泥土》。读完这本小说后,郑周永会长离开故乡,毅然决然地搬到了城市里。
郑周永的家庭也受尽了贫困的煎熬,所以郑周永的父亲郑捧植想要成为农民,就算目不识丁,只要有土地与劳力,就能养家糊口。郑捧植希望他的儿子也像他一样种田,为家庭添一份力。郑捧植从早到晚带着年幼的郑周永,到周围的田野和山地,教儿子怎么干农活。年幼的郑周永扛不住重体力的农活,有时候会抱怨几句,父亲郑捧植就立即训斥:“长大后,你得负责种地养家呢!”郑捧植做梦也没想到,他的儿子日后竟成为了发展韩国工业的大企业家,养活了韩国国民。
其实,郑周永更像他的祖父。郑周永从小就跟着祖父学习汉字,培养了良好的学习能力。上小学的时候,除了书法与歌唱之外,他从来都没有丢过班级第一名的位子。有一天,他生了一场大病,一连五六个月都没能上学,但他还是考了第一名。
小学离郑周永家有十里(4公里)远。由于路途比较坎坷,加上草鞋不耐穿,所以郑周永总是赤脚上学。他的手脚长得像他的母亲,都比较大。他在《回忆录》中曾写道:“母亲可能就是劳动的命吧。她的手和脚都很大。”正如他的母亲,郑周永的手脚也很大,所以他的赤脚格外明显。
郑周永会长穿了数十年的一双旧鞋子。存放于蔚山现代重工业总部郑周永纪念馆内。
说到这里,笔者就想起了郑周永著名的老皮鞋。在位于蔚山市的现代重工业本社附属郑周永纪念馆里,展览着一双郑周永穿了几十年的老皮鞋。据说,即使在事业上取得了很大的成功,郑周永也坚持只穿一套衣服。“赤脚少年”长大后成为了“只穿一套衣服的绅士”……郑周永到底是为了什么而活的呢?金钱?名誉?那双老皮鞋默默地告诉我们,他并不全是为了金钱而活的。
在极度贫困中,父亲郑捧植想要把郑周永彻底培养成一个农夫,郑周永却从小就选中了截然相反的人生之路。小学毕业之后,在父亲的强力要求下,郑周永只能干农活,但他一直在坚持一件事,就是每天早上到里长(相当于中国县长)家读新闻报纸。当时,新闻是能够知道全国消息的唯一方法,非常珍贵,普通老百姓基本都买不起,所以郑周永只好到里长家读报纸。
郑周永因家境贫寒而放弃了学业,所以对他来说,新闻报纸不仅是新的教材,更是观察新世界的望眼镜。他通过新闻报纸,生平第一次接触了小说,曾梦想成为文学家。郑周永从报纸里学到了一切,后来他也说过:“我上的是新闻报纸大学,在那里学到了一切。”郑周永虽然一天到晚都在农田与山地干活,但他从来没有停止过阅读新闻报纸。
峨山郑周永年轻时期的模样。
其实,在经济如此困难的情况下,阅读新闻是他唯一能够坚持的乐趣。郑周永通过阅读新闻报纸获得了各种信息,而这样的信息促成了他新的梦想。他特别爱看新闻刊载的小说《土》。书中有一句话,总是浮现在他的脑子里。“住在厕所里的老鼠,只能吃人的粪便,住在库房里的老鼠,能吃上白米。”这句话对郑周永的感触很深。“对啊,不管做什么,总比做农活好。”郑周永有了这样的想法之后,立即决定离家出走。
笔者 淸露 图片摘自 现代集团
现代集团与创始人郑周永(2)
꿈꾸는 맨발의 소년 정주영
‘영원한 도전자 정주영’ 자칭 정주영 경영학 박사인 언론인 허영섭씨의 정주영에 대한 평가다. 필자 역시 정주영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이 말만큼 정확한 평가가 없다고 생각된다. 도전과 도전의 연속이 바로 그의 생이었다.
정주영은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마을에서 태어났다. 본래 집안 대대로 살았던 곳은 함경북도 명천이었다. 그의 증조부가 1894년 갑오년 난을 피해 이주를 하면서 아산이 새로운 터전이 됐다. 정주영 집안은 그의 할아버지가 아산에서 서당 훈장을 했을 정도로 교육을 중시했다. 그러나 낯선 곳에서 농사꾼이 아닌 교육가로서 집안을 이어가기에 당대 나라 상황이 허락을 하지 않았다. 당시 조선은 앞에서 누차 이야기 했지만, 제대로 된 밥 한끼를 먹는 서민들이 드물 정도로 가난했다. 요즘 여름철만 되면 분수대 주변 연인들로 가득한 서울 청계천도 당시에는 천민들이 몰려 살던 곳이었다. 양반들이 버린 오물이 가득한 곳에서 천민들은 해만 나오면 이를 잡기 위해 옷을 벗어 말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강원도야 오죽했을까?
가난 속에 정주영 부친 정봉식은 글 아는 서민보다 글 모르는 철저한 농사꾼으로 살기를 희망했다. 부지런히 농사를 지면 그래도 가족을 굶기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들 정주영 역시 자신처럼 농사꾼이 되기를 바랬다. 그래서 가족 생계에 보탬이 되기만을 희망했을 뿐이다. 그는 어린 정주영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밭과 들로 데리고 다니며 농사일을 가르쳤다. 어린 아들이 불평이라도 하면, “커서 식구들 밥은 책임져야지” 하며 야단을 쳤다고 한다. 훗날 아들 정주영이 산업의 일꾼이 돼 한국 절반을 먹여 살릴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사실 정주영은 부친보다 할아버지를 더 닮았다 싶다.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한자를 배우며 글을 깨우쳤고, 소학교를 다니면서는 서예와 노래 빼고는 뭐든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 한번은 크게 앓아 5,6개월을 학교에 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어려서 배운 한자 덕에 공부머리가 남달랐던 것이다.
소학교는 정주영 집에서 10리 밖에 있었다. 그 길을 정주영은 항상 맨발로 다녔다고 한다. 짚신을 만들어 신기도 했지만 10리 길을 버티지 못하고 헤지기 일쑤였다. 정주영은 그의 어머니를 닮아 손과 발이 컸다. “본래 노동을 하려 태어나셨는지 어머니 손발이 컸다”고 그 스스로 회고한 적이 있다. 어머니를 닮아 정주영 역시 손발이 컸다. 그래서 그의 맨발은 특히 눈에 띄었다고 한다.
사실 그와 관련한 이 기록을 접하고 떠올린 게 그의 낡은 구두였다. 울산의 현대중공업 본사 정주영 기념관에는 그가 수십년을 신었다는 낡은 구두 한 켤레가 있다. 성공해서도 그는 그렇게 단벌 신사였다고 한다. 맨발 소년이 단벌 신사로, 도대체 정주영은 무엇을 위해 살았던 것일까? 돈? 명예? 낡은 구두 한 켤레는 결코 돈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없이 보여준다.
가난 속에 부친은 정주영이 철저한 농사꾼으로 살기를 원했지만, 어린 정주영은 일찌감치 부친의 기대와는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부친의 강권에 어쩔 수 없이 농사일에 나섰지만, 그런 정주영이 빼놓지 않고 한 일이 그 길을 가는 단초가 된다. 바로 이장 집에 가서 신문을 읽는 일이었다. 당시 신문은 유일하게 전국의 소식을 알 수 있는 길이었다. 그래서 귀했다. 정주영 마을에서는 이장만 신문을 봤던 것이다.
신문은 집안 사정으로 중학교 진학을 못한 정주영에게는 새로운 학습 교재이자, 새로운 세상을 보도록 하는 망원경이었다. 특히 정주영은 신문에서 처음 소설을 접하고 문학가의 꿈을 꾸기도 한다. 신문에서 모든 것을 배웠다며 훗날 정주영은 “나는 신문대학에 다니며 세상물정을 배웠어요”라고 말했을 정도다. 하루 종일 밭과 논으로 나가 일을 하면서도 어린 정주영은 신문 읽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사실 어려운 노동 속에 신문 읽기는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신문을 읽으면서 싹을 튼 꿈들은 정주영을 농사꾼으로 남게 그냥 두지 않았다. 특히 당시 그가 즐겨 읽었던 소설 <흙>의 한 구절이 그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뒷간에 사는 쥐는 사람 똥을 먹고, 곳간에 사는 쥐는 쌀을 먹는다.” ‘그래 뭘 해도 이 것보다 못하지 않을 거야.’ 정주영은 이런 생각이 들자, 바로 가출을 결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