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中心)은 가운데 마음이다. 사전에 중심(中心)은 가운데요, 중심(重心)은 무게의 가운데라 했다. 사실 중심(中心)이나 중심(重心)이나 다르지 않다. 다만 실제 찍히는 점(点)이 다를 수 있다. 평균과 중간이 다른 이치다. 길이의 중심(中心)과 무게의 중심(重心)은 개념상 비슷하지만 실제 점(占), 점한 곳이 다른 경우가 많다. 길이의 중심(中心)은 그 길이의 반이 중간이다. 하지만 무게의 중심(重心)은 길이의 반이 반드시 그 중심(重心)은 아닐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중심(中心)은 길이의 중심(中心)과 무게의 중심(重心)이 더해진 개념이어야 한다. 진정한 마음의 중심(中心)이 바로 충(忠)이다. 충은 마음의 중심 그 중심을 세우는 것이다. 복잡한 개념 탓에 한자 충(忠)은 갑골자가 아니라 금문에서 나온다. 마음에 가운데 중심(中心)이 선 모습이다. 마음의 중심을 잡는 게 바로 충(忠)인 것이다. 그래서 치우쳐 편협하지 않고 한 가지 일에 마음 씀씀이를 다하는 것, 그게 충(忠)의 본의(本意)다. 중세 봉건왕조가 충(忠)의 대상을 군주(君主)로, 상급자로 고착시키면서 뜻이 변했지만, 본래 충(忠)이란 스스로를 가꾸려는, 즉 수양(修養)하는 개인이 사
사람을 볼까? 자리를 볼까? 성인(成人)의 만남, 사회 교류는 자리를 통해 이뤄진다. 자리에 앉은 이를 찾아 만나고 자리에 앉아 찾아온 이들을 만난다. 자리란 무엇일까? 눈에 보이는 건 사무실 안 책상 하나 의자 하나다. 그 옛날엔 그저 바닥 위의 두터운 방석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건 그 의자 뒤 그 방석 위에 따르는 권한과 의무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이 보는 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권한과 의무다. 아니 권한이다. 사람이 자리를, 자리의 앉은 이를 찾는 건 그 권한 때문이다. 의자가 그냥 의자가 아니요. 방석이 그냥 방석이 아니게 되는 이유다. 자리가 그냥 방석이 아닌 이유다. 그런 방석에서 사람과 사람이 마주 한 것이 바로 자리에 앉는 것이다. 한자 좌(坐)의 변천은 이 같은 세속의 도리(道理)를 전한다. 본래 갑골자 시대 앉는다는 것은 그저 순수하게 방석에 앉는 것이었다. 나라의 틀이 잡히고 권한과 의무가 생기며 앉을 좌(坐)는 동등한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이 마주 보는 꼴이 됐다. 사실 자리를 보고 사람을 만나는 건 속세의 상리요, 도리다. 속세를 사는 한 군자나 소인이나 다름이 없다. 차이는 만나고 나서 비로소 생긴다. 소인은 자리만 보고 군자는
농사를 짓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돌을 고르는 일이고 건물을 짓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돌 고른 땅을 다지는 일이다. 세상의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이 순서는 바뀌지 않는다. 이 도리는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초요, 기본이다. 삶과 인생의 공리다. “모든 일이 시작이 있고, 그 시작이 있고서야 비로소 끝이 있다. 모든 일이 본이 있고, 본이 있고서야 비로소 말이 있다.” 대학의 도리다. 자연의 순리다. 땅이 고르고 단단해야 그 위에 무엇이든 지을 수 있다. 심지어 어느 나무도 터를 잡지 않고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인간의 삶은 더욱 그렇다. 삶의 터를 잡아야 삶이 편해지는 것이다. 삶의 터는 어떻게 내리는가? 한자 기(基)가 그림으로 그 방식을 전한다. 땅 위를 돌을 쌓아 만든 틀로 내려치는 것이다. 때리고 때려, 다지고 다져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다. 삶의 기초도 마찬가지다. 기본 틀을 되풀이 해 익히고 익히는 것이다. 다지고 다져 능숙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편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배우면 익혀야 한다. 그 배움이 다져지고, 익숙해져 기초가 될 때 비로서 삶이 편해진다. 바로 알면 실행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경지다. 배우기만 하고 익히지 않
기쁘고 슬프고 모두가 실은 하나다. 정(情)이다. 정 하나의 서로 다른 양 끝이다. 관계가 있고서야 정도 쌓이고 정이 쌓여야 기쁘기도 슬프기도 한 것이다. 만남의 시작은 본래 고기 한 점이다. 같이 나누는 고기 한 점, 같이 먹은 한 상 차림 바로 모든 관심의 시작이요, 관계의 시작이다. 정(情)의 시작이다. 정은 마음이 항상 푸른 것이다. 관심이 생기고서야 상대방이 내 마음 속에서 항상 푸른 것이다. 갑골자, 아주 오랜 사람의 글자 속에 보이는 사귈 제(祭)의 의미다. 발이 있는 귀한 그릇 위로 고기 한 점을 얻는 손의 모습이다. 사귄다는 건 상대방의 숟갈에 얹는 고기 한 점이었던 것이다. 이를 죽은 이에게 하면 제사(祭祀)가 되고, 산 이끼리 하면 축제(祝祭)가 된다. 너와 나의 사귐은 하나의 경계를 넘는 교제(交際)가 된다. 여기 제(際)에는 경계를 의미하는 부호가 담겼다. 사귐은 그 자체로 즐거운 것이다. 서로 나눈 고기 한 점, 귀한 식사 한 번이다.
목숨으로 하는 게 그 옛날 성벽을 쌓는 일이다. 진시황이래 만리장성 벽돌을 쌓으며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버려야 했던가. 한 왕국의 기틀과 완성은 그 왕국을 둘러싼 성벽이 얼마나 튼튼한지, 장엄한지가 좌우했다. 담을 쌓는 것 바로 나와 너 우리와 너희를 구분하는 것이며 내가 홀로 섰음을 만천하에 고하는 것이다. 세속의 왕조가 그렇듯 한 개인의 삶도 그렇다. 내가 어떤 담을, 어떤 성벽을 쌓고 지켜가느냐에 내 삶이, 인생이 좌우된다. 바로 업(業)이다. 업에 대한 설명은 좀 복잡하다. 금문에 나타나는 모습이 쉽게 그 의미를 짐작하기 힘든 탓이다. 요즘 갈수록 복잡해지는 세상은 업(業)이란 말의 숙명 같기도 하다. 금문에 등장하는 업의 자형도 그 형태가 다양하다. 글자를 겹쳐 쓰기도 했다. 업을 악기의 받침대로 설명하기도 한다. 실제 고대에 업(業)이라는 악기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점점 많은 이들이 업(業)을 담을 쌓는 일로 공감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결국 벽돌을 만들어 성벽을 쌓듯 그렇게 하나하나 쌓아가 이루는 게 아닌가 싶다. 가장 모든 일의 본질에 닿아 있는 게 바로 업(業)의 본의가 아닐까.
이치(理致)란 바로 돌 속의 옥이다. 사물의 이치란 그 사물이 다듬어 이르는 것이다. 이치란 본래 의리정치(義理情致)의 줄임말이다. 주어인 의(義)와 정(情)을 빼고 줄여 이치(理致)라 했다. 말 그대로 “의(義)를 다듬어, 정(情)이 이른다.” 는 뜻이다. 요즘 줄여서 도리(道理), 순리(順理) 등의 뜻으로 쓰인다. 그런데 도리는 무엇이고, 순리는 무엇인가? 도리는 그러한 것이고, 순리란 그러는 것이다. 결국 돌고 돌아 다시 그 거다. 그냥 그대로 바로 자연이다. 모두가 자연을 따르자는, 순기자연(顺其自然) 의 도리, 이치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항상 그런 것의 이치다. 정확히 그렇고 그런 것들을 하나로 꿰는 보물, 일이관지(一以貫之)다. 한자 리(理)에 담긴 뜻이다. 금문에서 등장하는 리(理)는 옥(玉)을 꿴 보물과 옆의 리(里)다. 설문해자는 옥이 뜻(意)이요, 리는 음(音)이라 했다. 리(里) 역시 금문에 나온다. 땅을 다듬어 밭을 만드는 모양이다. 리(理)의 구성 자형을 모두 뜻으로 읽으면 땅을 다듬어 밭을 만들어 옥, 보물을 얻어낸 것이다. 본래 옥은 돌 속에서 자라난다. 깎아 다듬지 않은 옥의 외형은 그저 돌, 강바닥에 널린 조각돌이다. 돌 속에
기회는 오는 게 아니다. 만드는 것이다. 한자 기(機)가 전하는 교훈이다. 기회(機會)의 한자 그대로의 뜻은 만들어진 기계들의 조합이다. 만들어진 기계, 도구들이 모여 만드는 게 기회(機會)인 것이다. 그렇게 기계들이, 도구들이 준비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한자 기는 금문에 등장한다. 나무를 보고 기술자가 창과 칼로 그 나무를 깎아 다양한 기계, 기구 장식품을 만드는 모양이다. 기계든 장신구든 좋은 물건을 만들려면 필요한 게 바로 재료다. 나무다. 그 다음이 기술자다. 그리고 중요한 게 바로 도구다. 이 셋은 만들어진 완성품의 품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 셋의 조합이면 결과가 달라진다. 한자 기(機) 속에는 그 과정이 기록된 것이다. 마음은 필요를 만들고 손은 나를 찾아 필요를 형상화하며 완성된 형상은 다시 내 마음을 달래주는 것이다. 모든 게 마음이지만, 그것은 사람 속에만 머물지 않으며 세상으로 나아가 수많은 기계가, 기구가, 장신구가, 사물이 되는 것이다. 결국 다시 모든 게 마음인 것이다.
뱀을 잡을 때 조용히 다가가 한 번에, 빠르게 뱀의 뒷목을 잡아야 한다. 안전을 위해 한 쪽 끝이 'Y'자 형의 막대를 이용하면 더 좋다. 이 뱀을 잡는 행위가 바로 감(敢)이다. 위험한 줄 아는 일을 과감하게 머뭇거림 없이 냉혹하게 순식간에 해치우는 게 바로 감(敢)이다. 금문에 등장한다. 거대한 도마뱀을 잡는 모양이다. 혹자는 이 모습을 뱀의 꼬리를 잡는 무모한 일로 보기도 한다. 본래 위험한 일일수록 얻는 게 많은 법이다. 지금도 악어가죽은 다른 어떤 가죽보다 비싸다. 그래서 전문가의 감(敢)은 뱀의 머리를 잡지만 미숙한 이의 감(敢)은 뱀의 꼬리를 잡는다. 꼬리를 잡으면 역으로 물린다. 반드시 머리를 잡아야만 한다. 준비된 이의 감(敢)은 위험하지만 해야 할 일이어서 그 결실이 크고, 미숙한 이의 감(敢)은 위험한 일의 나쁜 결과만 분명한 일인 것이다. 이처럼 감(敢)은 위험한 일을 하는 법을 알려준다. 위험을 감당하고 컨트롤하면 뱀을 잡을 수 있고 그 반대라면 뱀에 물린다. 독사라면 바로 죽는다. 그래서 진정한 용기는 능(能)히 감(敢)하며 능(能)히 부감(不敢)한 것이다. 감과 부감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뱀을 위기를 잡는 진정한 전문가, 용
용기는 마음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용기는 준비에서 나온다. 창과 방패를 들어 비로서 나오는 게 용기다. 그런 준비 없이 나오는 용기는 용기가 아니다. 만용(蠻勇)이다. 한자 용(勇)은 이 같은 용기의 이치(理致)를 담고 있다. 사실 용(勇)자는 그 본의를 놓고 많은 해석이 있다. 용(用)이 발음이고 힘(力)이 의미라는 설명이 가장 일반적이다. 용(勇)은 갑골문은 아직 없고 금문에서 등장한다. 용(勇)의 자형은 모두 세 개인데, 하나는 쓸 용(用)에 창 과(戈)가 있으며 다른 하나는 쓸 용(用) 아래 힘 력(力)이 있다. 마지막은 쓸 용(用) 아래 마음 심(心)이 있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글자가 바로 쓸 용(用) 아래 힘 력(力)이 있는 글자다. 용(用)는 일찌감치 갑골문에 나온다. 기본적으로 나무로 만든 물통으로 쓰임을 의미한다고 본다. 혹자는 용(用)을 종(鐘)이라 보기도 한다. 보는 눈마다 다를 수 있지만, 갑골자 용(用)은 볼수록 나무로 만든 물통이다 싶다. 나무로 만든 물통, 그 물통이 용기의 용(勇)에서는 방패 순(盾)의 의미로도 쓰인 게 아닌가 싶다. 그리 보면 금문에 등장하는 세 가지의 용기 용(勇)의 세 가지 의미가 새롭다. 맨 처음은 방패와
모든 씨앗은 그 자람이 결정돼 있다. 벼의 씨는 벼가 되며 보리의 씨는 보리가 된다. 백합 씨는 백합이 되며 난초 씨는 난이 된다. 소나무 씨는 소나무가 된다. 볍씨가 보리가 되는 법이 없으며 난초 씨가 백합이 되는 법이 없다. 식물도 동물도 사람도 모두 마찬가지다. 정해진 씨앗 그대로 자란다. 다만 자란 모습이 다를 뿐이다. 들에서 자란 소나무는 쭉쭉 하늘로 뻗어 자라며, 벼랑 끝에 자란 소나무는 구불구불 굽어 자란다. 나무를 아는 것은 씨앗을 알고 자란 환경을 알아 지금까지 자람을 알고 미래의 성장을 추정하는 것이다. 씨앗부터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는 하나의 모습, 바로 본(本)이다. 모양은 쉽지만 어려운 개념이 한자 근본 본(本)이다. 금문에 등장해 나무를 뿌리와 줄기로 나눈 모습이다. 뿌리만이 아니고 줄기만이 아닌 둘을 나눠 모두 아는 게 바로 본(本)이다. 씨앗을 알고 그 씨앗의 싹을 알며 싹의 뿌리를 알고 싹의 줄기를 아는 게 바로 본(本)이다. 지금 눈에 보이는 나무의 뿌리와 줄기는 하나의 씨앗에서 나와 자랐음을 아는 게 바로 본(本)이다. 그래서 본(本)을 알면 그 유래(由來)인 본래(本來)를 알고 본(本)을 알면 그 미래(未來)인 본거(本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