齐白石作品真迹首次登陆韩国。齐白石是现代中国最著名的画家之一,但是专家们表示,对齐白石来说,“中国最著名”的这一说明有些不够,也就是说他不仅是中国之最,也是东亚最著名的画家之一。20世纪以后,东亚的文化逐渐衰退,因为“西方技术文明最好”的认识占据了主导地位。在这样的时代,齐白石通过最具中国特色的文化画出了和平和未来。齐白石的作品和思想至今还对许多人产生着影响。
笔者 李东耿 提供图片 艺术殿堂
从平凡到非凡,创造出新的造型语言齐白石开创了被称为“新文人画”的新题材,从贫穷的木匠和农民蜕变成为了中国最优秀的人民艺术家,也是20世纪中国美术史上创造新造型语言的画家。他将东亚艺术语言的基础,诗、书、画、印合为一体,融入到了他的书画艺术之中。
《水牛图》(初期)。
纯芝是齐白石原名,出生于湖南湘潭县以南的白石镇,故号白石。幼年家境贫寒没有上学的机会,长大后做了木匠,那时有空就自学绘画。他27岁开始绘画生涯,40岁后前往中国各地旅行,57岁前后在北京定居并专心绘画。曾任北京国立艺专教授,革命后当选中国美术家协会主席,获得了人民艺术家的称号。
《齐白石——从木匠到巨匠》展,海报。
齐白石以独特的篆刻技法和书法,将平凡生活中的非凡转化为艺术形象。他运用“单刀法”的篆刻刀法,用一刀表现线条的质感。这样的作品具有无人比拟的独特风格。从日常生活中提取了对象的本质和美的秩序,通过又粗又简单明了的画笔表现了出来。齐白石让花、鸟、草、虫生机蓬勃地活起来,而这些都是现有的文人画家不常注意的素材,因为他们觉得这些并不高贵。齐白石作为农民出身的画家,将农民画的水平提到了最高,将其变成高贵的东西。开辟了“新文人画”的新题材。
《山水和人物》(中期)。
此外,齐白石通过颜色、笔画、构图,运用作家自己最能表现出来的造型语言受到关注。可称得上“齐白石颜色”的强烈的原色对比,挥动长剑一般,一下子划下的直笔和细节的描写以及虚虚实实的空间管理,这些绘画中独创性的行动都是以齐白石的胆量和魄力为根源的。能够展现出古朴、新颖、朴素、孤高共存的画面并形成空间氛围,这种态度和作风可以在齐白石的所有作品中找到。
《虾》(1948年)。
诗书画印,以一切语言描绘出和平思想的巨匠
1956年,齐白石获得世界和平理事会颁发的“国际和平奖”时深有感触地说,“正因为爱我的家乡,爱我祖国美丽富饶的山河土地,爱大地上一切活生生的生命,因此花费了我毕生精力,把一个普通中国人的感情画在画里,写在诗里。直到近几年,我才体会到,原来我追求的就是和平”。
《松鼠葡萄》(中期)。
从这句话中可以看出齐白石的思想。齐白石并不是单纯的诗书画印的巨匠,他将诗、书、画、印融为一体,描绘出了和平的思想。艺术殿堂书法博物馆的首席馆长李东国先生表示,“在国际形势混乱的情况下,可以通过齐白石的思想,学习我们应该向哪儿前进”。
《雏鸡草虫图》(约1940年)。
7月31日至10月8日,将在艺术殿堂举行齐白石艺术作品展,这是齐白石作品首次来韩展出。为纪念中韩建交25周年,艺术殿堂、中国湖南省文化厅(厅长 禹新荣)、中国驻韩大使馆 (大使邱国洪)、中国文化中心(院长 史瑞琳)特别策划此次展览。将会展出中国湖南省博物馆收藏的齐白石代表作品50件以及齐白石纪念馆收藏的齐白石生平文物83件,韩国国内收藏的齐白石作品3件,由中韩两国现代书法家创作的以纪念齐白石为主题的追忆作品43件。
举行《齐白石》展的艺术殿堂书法博物馆展厅。
纪念中韩建交25周年特别展《 齐白石——从木匠到巨匠》
C 成人 5000韩元 / 儿童、青少年 3000韩元
H 2017.07.31(周一) ~ 10.08(周日) 11:00 ~ 20:00 (定期闭馆:每周周一)
L 艺术殿堂 书法博物馆
跨越30年年龄差的莫逆之交——齐白石和徐悲鸿
齐白石和徐悲鸿跨越30年的年龄差成为莫逆之交。徐悲鸿是中国著名的美术家和美术教育家,他曾留学法国学西画,归国后将西洋画的技法引入中国画,他尝试了中国的水墨画与西方油画的嫁接。他画的马闻名全世界,并且他在美术教育上的献身,为目前的中国美术教育打下了基础。20年代,齐白石60多岁,他以卖画谋生。相反,徐悲鸿是担任北平艺术学院院长的著名美术行政人员。徐悲鸿被齐白石既新颖又富有创造性的绘画所感动,亲自请齐白石到艺术学院做教授,多次拒绝的齐白石最终还是接受了。
之后,徐悲鸿不仅通过各种文章介绍了齐白石的艺术成就,还在中华书局推荐出版齐白石画集等。齐白石的首个画集就是这样制成的,就是因为这个画集,齐白石的名字被世人知晓。他们的友情至今还被传为中国画坛的美谈。
자연과 인간, 세계와 사회의 평화를 예술로
동아시아 최고의 작가 치바이스
치바이스가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치바이스는 ‘중국 최고’라 불리는 작가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치바이스에게 ‘중국 최고’라는 설명은 부족하다고 말한다. 중국 최고일 뿐 아니라 동아시아 최고의 작가라는 것이다. 20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문화는 사양되고 있다. 서양의 기술 문명이 최고라는 인식이 지배적인 것. 치바이스는 이런 시대에 가장 중국적인 문화를 통해 평화와 미래를 그렸다. 치바이스의 작품과 사상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평범(平凡)에서 비범(非凡)으로, 새로운 조형언어를 창조하다
치바이스는 가난한 목수이자 농민 신분에서 ‘신문인화(新文人畵)’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여 중국 최고의 인민 예술가로 등극했다. 또한 20세기 중국미술사에서 새로운 조형언어를 창조한 작가로 통한다. 동아시아 예술 언어의 토대인 시(詩), 서(書), 화(畵)는 물론 각(刻)까지 혼융일체(混融一切)로 변혁시켜냈기 때문이다.
치바이스의 본명은 순지(純芝)이나 태어난 곳이 후난성 상담현(湘潭縣) 남향 백석장(白石莊)이어서 백석(白石)이라는 호로 알려졌다. 젊은 시절에는 가난하여 학교를 가지 못했다. 가구점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다. 27세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전업으로 삼았고 40세에 전국을 여행하여 57세 전후에 북경에 정주하고 그림에 전념했다. 북경 미술전문학교의 교수를 역임했으며 혁명 후에는 중국 미술가협회 주석이 되어 인민예술가의 호칭을 받았다.
치바이스는 일상생활에서 발견되는 지극히 평범한 소재 속에서 발견한 비범함을 독자적인 전각기법과 서법으로 형상화 해냈다. ‘일도법’이라는 전각도법을 응용하여 한 칼로 표현해낸다. 이러한 작품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특한 풍격을 자아낸다. 일상의 흔하디 흔한 소재에서 대상의 본질과 미의 질서를 추출해내 굵고 단순 명료한 필획으로 나타낸 것이다. 특히 꽃, 새, 풀, 벌레를 ‘살아있음’ 그 자체의 생동감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소재들은 기존 문인화가들이 흔히 다루지 않은 것들이었다. 고귀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치바이스는 농민 출신의 화가로서 농민화의 수준을 최고로 끌어올려 고귀한 것으로 탈바꿈했다. ‘신문인화(新文人畵)’라는 전에 없던 장르를 개척한 것이다.
또한 치바이스는 색(色)과 필획(筆劃), 구도로 작가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해내는 조형언어를 구사하여 주목받는다. ‘치바이스 컬러’라 할 정도로 강렬한 원색의 대비, 장검을 휘두르듯 단숨에 죽죽 그어 내리는 직필(直筆)과 디테일한 묘사, 허허실실(虛虛實實)한 공간경영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회화에서의 독창적인 행동은 예술가로서 치바이스의 담력과 패기에 근원한다. 고풍스러움과 참신함, 소박함과 고고함이 공존하는 화면이 전개되고 공간 분위기가 형성된다. 이런 태도와 작풍은 치바이스의 모든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서화각 일체 언어로 평화사상을 그려낸 거장
치바이스는 1956년 세계평화평의회에서 국제평화상을 받으며 이렇게 답사를 했다. “나는 내 고향을 사랑하고, 내 조국의 풍요로운 산과 강 그리고 흙을 사랑하고, 대지위의 모든 생명을 사랑하기에 한평생 평범한 중국인의 마음을 그림으로 그리고 시로 썼다. 최근 몇 년 동안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끊임없이 추구한 것은 다름 아닌 평화였다는 것을.”
이 문장에서 치바이스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치바이스는 단순히 시서화각 일체의 거장이 아니다. 시(詩) 서(書) 화(畵) 각(刻)이라는 언어를 융합하여 평화(平和)라는 사상을 그려낸 것이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는 “국제 정세가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이러한 치바이스의 사상을 통해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배울 수 있다”고 밝혔다.
예술의전당은 7월 31일(월)부터 10월 8일(일)까지 치바이스齊白石 전시회를 국내 최초로 개최한다. 예술의전당, 중국호남성문화청(청장 禹新荣), 주한중국대사관(대사 邱国洪), 중국문화원(원장 史瑞琳)이 공동 주최하는 이번 전시회는 한중수교 25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중국 호남성 박물관 소장 대표작 50건 55점, 상담시 제백석 기념관소장 치바이스의 유품과 자료 19건 83점, 국내소장 치바이스 작품 3점, 현대 한중작가들의 오마주 작품 43점이 전시된다.
한중수교 25주년을 기념 특별전
<치바이스齊白石 - 목장木匠에서 거장巨匠까지>
성인 5000원 / 어린이, 청소년 3000원
2017.07.31(월) ~ 10.08(일)
11:00 ~ 20:00 (정기휴관 : 매주 월요일)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30년의 나이차를 극복한 막역지교, 치바이스와 서비홍(徐悲鴻)
치바이스과 서비홍(徐悲鴻)은 30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막역지교(莫逆之交)로 지냈다. 서비홍은 미술가이면서 미술행정가 겸 교육가로 프랑스 유학 후 귀국하여 중국화 창작에 서양화 기법을 도입했다. 단순히 서양의 유화에 머무르지 않고 중국의 수묵화와의 접목을 시도했다. 특히 그의 말 그림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또한 미술 교육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 현재 중국 미술교육의 기반을 마련했다. 1920년대에 치바이스는 60대로,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반면 서비홍은 북평예술학원장(北平藝術學院長)을 맡은 저명한 미술행정가였다. 그러나 서비홍은 치바이스의 참신하고 창조적인 그림에 감동해 직접 그를 찾아가 예술원 교수로 초빙했다. 여러 차례 거절했던 치바이스도 결국에는 응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서비홍은 여러 글을 통해 치바이스의 예술적 성취를 소개했을 뿐 아니라 중화서국에 제백석의 그림을 추천, 출판할 수 있게 했다. 치바이스의 첫 번째 화집은 이렇게 만들어졌고, 이 화집으로 제백석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의 우정은 아직까지 중국 화단의 미담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