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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 한국비료와 이병철의 10년의 고난 (3)

군사혁명 발발

이병철이 김포 공항에서 청년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엉뚱하게도 명동의 메트로 호텔이었다. 그곳에서 이병철은 가족과 통화를 한다. 가족에게 우선 자신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그 곳에서 박정희 혁명정부 최고회의 부의장을 만나 담판을 한다.

 

당시 상황은 이렇다. 이병철이 4.19 혁명정부의 전횡에 낙담해 일본에서 유유자적을 하고 있을 때 4.19혁명이후 혼란한 사회를 안정시키겠다며 1961년 5월 16일 군사 혁명이 일어난다. 혹자는 정변이라고도 한다. 4.19 혁명이 일어난지 불과 1년만의 일이다.

 

사실 이병철의 자서전에도 고백하고 있지만, 당시 이승만 정권의 갑작스런 붕괴이후 한국은 국정 운영의 주체가 없었다. 도심에서는 경찰과 학생, 노동자들이 각자 자신들의 주장을 하며 시위를 벌였다. 나라가 온통 주장뿐 이었다.

 

군사 혁명 정부는 빠르게 나라를 안정시켰다. 국민들의 불만도 빠르게 잠재웠다. 그 중 하나가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처벌이었다. 4.19 혁명 정부 역시 국민들의 욕구불만을 덜어주기 위해 이병철을 부정축재자로 몰았다. 이병철은 당당히 “말도 안되는 세금을 부과하고 그 것을 내지 못했다고 부정축재자로 모는 게 문제”라고 맞섰다. 그리고 한국을 떠났다.

 

4.19 혁명정부나 5.16 군사 혁명정부나 같은 문제를 들고 나와 국민의 불만을 잠재우고자 했다. 5.16 혁명정부는 군의 힘을 바탕으로 해 더 강한 집행력을 보였다. 부정축재자 10명을 감금하고 일본에 있던 이병철을 갖은 수단으로 압박해 귀국하도록 종용했다. 이병철을 그렇게 귀국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병철을 기다리고 있던 상황은 일본에서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여기에 바로 박정희 군사 정권의 뛰어남이 숨어있다. 4.19 혁명정부와 비교해 박정희는 보다 현실을 알고 있었다. 이병철은 이 박정희를 1961년 6월 27일 처음 만난다. 26일 귀국 한 뒤 바로 그 다음날 이었다.

 

이병철의 기록에 따르면 이 장면은 한국 경제의 축을 바꾸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27일 오전 박정희 부의장과 면담이 잡혔다는 통보를 이병철은 받는다. 이병철의 기록이다.

 

“지프를 타고 간 곳은 후에 원호처 청사가 된 참의원 자리였다. 비서실을 거쳐 안내된 100여 평이 돼 보이는 넓은 방에 들어서자, 군인 몇 사람과 함께 강직한 인상의 검은 안경을 쓴 사람이 저쪽에서 걸어왔다. 검은 안경의 박정희 부의장을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다.

 

방안은 자뭇 삼엄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박정희 최고회의 부의장의 첫인상은 아주 강직해 보였다. 지도자로서 덕망은 어떨까 하고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검은 안경의 박 부의장은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고생은 되지 않았습니까?”라고 안부 인사부터 하는 것이었다.

 

의외로 너무나 부드러운 음성에 안도감을 느꼈다.

 

이어 박 부의장은 부정축재자 11명의 처벌 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었다.”

 

참 묘한 표현이었다. 4.19 혁명 당시 이병철을 젊은 검사에게 끌려가 탈세 혐의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 군사 혁명 정권에서는 최고 권력자가 직접 담판을 한 것이다. 그 것도 부정축재, 소위 탈세 혐의에 대해서 가타부타 없이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다. “어떻게 처벌을 해드릴까요?”

 

이병철은 말 문이 막혔다. 당연한 일이었다. 박정희의 속셈을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둘 사이 침묵이 흘렀다. 박정희가 재촉을 한다. “어떤 이야기라도 좋으니 기탄없이 말해달라”고 재촉했다.

 

이병철은 그렇다면 감춤없이 말하기로 결심한다. 이미 검사 앞에서도 당당히 소신을 밝혔던 이병철이었다. “부정축재자로 지칭되는 기업인에게는 사실 아무 죄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을 들은 박정희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병철은 계속 말을 이어간다. “현행 세법은 수익보다 많이 세금을 걷는 전시 비상상황의 세법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만약 법을 지킨다면 모두가 도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병철의 설명이 이어지자 박정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한다. 이병철은 말을 이어갔다. “기업하는 사람의 본분은 많은 사업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그 생계를 보장해 주는 한편, 세금을 납부하여 그 예산으로 국토 방위는 물론이고 정부 운영, 국민 교육, 도로, 항만 시설 등 국가 운영을 뒷받침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른 바 부정축재자르 ㄹ처벌한다면 그 결과는 경제 위축으로 나타날 것이며, 이렇게 되면 당장 세수가 줄어 국가 운영이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오히려 경제인들에게 경제 건설의 일익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 국가에 이익이 도리 줄 압니다.”

 

이병철의 말에 박정희 감동을 받는다. 박정희는 이병철에게 어디 머물고 있냐고 묻는다. 호텔에 연금중이라는 말을 하자 놀란 박정희는 일단 이병철을 돌려 보낸 뒤 이튿날 바로 귀가 조치를 시킨다. 이병철은 역시 이병철이다. “부정축재자 10명이 다른 곳에 감금돼 있는데, 1호범을 귀가 시키면 국민들이 납득을 하겠는가?”라며 귀가를 거부한다.

 

혁명정부 역시 4.19때와 달랐다. 박정희는 다시 사람을 보내는 묻는다. “부정축재자 전원이 귀가했다. 아직도 귀가를 거부하시겠는가?”

 

이렇게 이병철은 몇 달만에 그리던 가족과 재회를 한다. 이병철이 귀가를 하자, 국세청 등 관련 부처 곳곳에서 따로 조사를 벌이겠다며 이병철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을 막아 준 것이 혁명 정부였다. 혁명정부는 이병철 조사시 헌병대의 허가를 미리 받도록 조처를 해 이병철을 각 부처의 조사 공세에서 구해준다. 그리고 몇 달 뒤인 8월 12일 혁명정부는 부정축재자 27개 기업주 전원에게 벌금액을 통보한다. 총 378억800만 환이었다. 삼성은 103억 400만 환으로 전체 27%를 차지했다. 이병철은 이어 다시 박정희를 만나, 벌금을 돈으로 내는 대신 공장을 짓도록 하고 그 지분을 나라에 바치는 식으로 하도록 제안을 한다. 처음 “좋은 제안이지만, 국민이 납득하겠냐?”고 반문했던 박정희는 결국 제안을 받아들인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결을 거쳐 투자명령이라는 법령이 만들어진다. 이제 한국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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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취안저우, 문화유산 보호와 관광객 유치 위한 투 트랙 전략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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