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70이 넘어서는 무엇이든 새로 시작하지 않으려 했다.” 이병철의 말이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자신의 말을 어겼다. 꼭 해야 할, 꼭 하고 싶은 사업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알기 전에 이병철의 기업에 대한 생각을 좀 더 이해해 보자. “기업은 자선후생의 단체가 아니다. 이익을 올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 이익으로 종업원에게 충분한 급료를 지불하고,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고, 주주에게 배당하고 그리고 재투자를 한다. 기업이 이익을 얻는 방법에는 적부의 문제가 있을지언정, 이윤추구 그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기업이 적자를 내면 그것은 하나의 사회악이라 할 것이다. 자본, 자재, 사람 등 사회의 귀중한 자원이 낭비되기 때문이다. 기업부실화의 부담은 결국은 국민에게 돌아온다. 또한 생산하는 재화가 소비재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국민에게 필요불가결하냐 하지 않느냐가 문제이다. 양질의 제품을 얼마나 저렴하게 사회에 공급하느냐, 바로 이것이 기업 사명의 전부이고 그 존재가치이기도 하다.” ‘기업이 이익을 얻는 방법에는 적부의 문제가 있을지언정, 이윤추구 그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기업이 적자를 내면 그것은
“생은 기(寄)요, 사는 귀(歸)다.” 위암의 공포에서 이병철이 찾은 답이다. 여기에 이병철이 쌓은 부의 비밀이 숨겨 있다고 저자는 본다. 돌이켜 보자, 이병철에게 삶이란 무엇이었을까? 세상에 없는 부를 만들어 가졌고 수천수만의 시간을 자기 것 인양 쓸 수 있는 사람, 바로 이병철이었다. 그런 그의 삶에서, 그가 부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묘하게 삶의 인생의 진의를 느낀다. 많은 독자가 납득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병철과 관련한 자료를 찾고, 이병철이 남긴 글들을 읽으면서 그에게 부란 무엇인지? 어떻게 부를 쌓는지를 이해하면서 필자가 느낀 점들을 하나로 묶는다면 ‘이병철은 삶의 진의가 무엇인지 알고자했던 구도자였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다. 최소한 인간의 삶을 가장 잘 이해한 이가 이병철이다 싶기 때문이다. 먼저 그가 돈을 버는 철학을 보자. 그의 입을 빌면, “사업은 될 일을 가장 확실한 투자를 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반드시 되는 일을 찾으려 항상 애를 썼고, 한번 일을 시작하면 한국 최대, 세계 최대를 지향했다. 1950년대 편벽한 이 한국 땅에 가장 필요한 것이 농업이며, 농업의 기본이 될 비료공장의 필요성을 봤다.
생을 일군다는 게 무엇인가? 이병철의 삶을 보면 막연하나마 그 답을 느낄 수 있다. 정답인지 몰라도 이병철의 삶을 통해 얻은 개인적 느낌은 단순하다. 생을 일군다는 것, 그것은 끝없이 노력하는 데 답이 있지 그 노력으로 얻는데 답이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병철의 삶은 정말 끊임없이 일구려 노력한 삶이다. 첫 사업에 실패의 고배를 마시고, 성공해서는 매 정권의 견제를 받으며 이병철은 한 번도 삶을 일구려는 노력을 중단하지 않았다. 4.19 혁명으로 들어선 혁명정부에 대한 실망에 일본으로 떠나 한국의 업(業)을 잊기도 했지만, 업을 일구기를 중단한 적은 없다. 그게 이병철 삶의 매력이다. 한국비료를 세우기 위해 한국 정부도 못하는 대규모 차관을 끌어왔고, 세계 최대의 비료 공장 건설을 위해 미국과 유럽을 신발이 닳도록 돌아 다녔지만, 이병철은 그렇게 세운 한국비료를 정치적 이유에서 국가에 헌납해야 했다. 이병철은 가슴이 아팠지만, 그렇다고 그 업을 일구기를 중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병철은 매 위기에서 새로운 발전의 기회를 찾았다. 무엇이 이병철이 그러할 수 있도록 만들었을까? 사실 이병철의 삶을 연구하다보면 불연 듯 드는 생각이다. 사실 답은 이미
옛 말에 “고대비풍다”(高臺悲風多;높은 곳일수록 고난의 바람이 많다.)라 했다. 삼성이 정말 그랬다. 조금씩 한국의 제일로 올라갈수록 주위에 질투와 시기가 심했다. 이승만 정권말기 대한민국의 모든 은행을 삼성에게 맡겨 운영을 하도록 하면서 이병철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현금이 많은 사람이 된다. ‘돈(錢)병철’이란 별명도 이 때 생겼다. 문제는 이 때 한국의 모두가 가난했다는 점이다. 삼성의 이병철이 한국의 현금 대부분을 손에 쥐면서 모든 한국인의 부러움을 샀지만, 질투와 시기도 함께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같은 국민 감정을 정치인들이 교묘하게 이용하기 시작한다. 4.19 혁명직후 ‘부정축재자 1호’로 꼽힌 것도 그 때문이며, 박정희의 5.16 군사 쿠데타 직후 국가 경제 재건 사업에 앞장서면서도 다시 부정축재자로 내몰린 것도 그 때문이다. 소위 ‘삼분파동’의 핵심으로 내몰린 것 역시 국민적 감정을 이용한 정치권의 장난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절정이 ‘한국비료 사건’이었다. 바로 직전에 소개했던 재벌 삼성의 ‘밀수 사건’이다. 사건은 본래 간단했다. 삼성측의 잘못도 있었다. 삼성이 한국비료 공장 건립 이후 비료 생산에 쓰려고 외국에서 수입한 화학물질의
이병철이 꿈꿨던 비료공장은 그렇게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됐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을 기억하는가? 자신의 것은 놓아 보아야 안다고. 진짜 자신의 것은 포기를 해보면 안다. 절로 자신에게 돌아온다. 하지만 그 반대는 어떨까? 정말 자신의 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다. 품에 돌아왔다가도 이내 떠나고 만다. 사랑도 그렇고 사업도 그렇다. 특히 품에 들어왔다 떠나는 것은 정말 가슴을 아프게 한다. 역시 사랑도 사업도 마찬가지다. 무슨 이야기일까? 이병철과 울산비료공장의 인연을 말함이요, 정치 변동이 심했던 한국에서 세계 제일을 꿈꿨던 이병철, 삼성의 운명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고? 우리의 이야기를 더 알고 나면 무슨 말인지 그제야 안다. 박정희 정부의 독촉에서 시작을 했지만 이병철은 그만의 독특한 기지와 일본의 인연을 활용해 거액의 차관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삼성을 위한 차관만 받은 게 아니다. 1965년 6월 한일협상이 이뤄지는 데도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 한일협상에서 일본의 배상액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상업차관 1억 달러였다. 그 때 일본만해도 전후 복구 과정에 있었기에 정부가 달
‘이병철은 화가다. 하얀 도화지에 연필 하나로 세상을 그려낸다. 처음엔 눈에 보이는 세상이지만, 점차 자신의 상상 속에만 있는 것을 그려낸다.’ 호암 이병철의 생을 연구하다 얻는 생각이다. 이병철은 창조자다. 요즘 많은 이들이 혁신을 이야기하지만, 혁신가는 기업을 유지시키는데 그치지만, 창조자는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들어 낸다. 이병철은 그런 사업가였다. 하얀 도화지 위에 하나씩 그림을 그렸다. 그가 화가 이상이 되는 순간은 화가의 그림은 그림에 머물지만, 이병철이 그린 그림은 현실에서 살아 움직인다는 점이다. 그가 그려낸 것들은 세상에 가장 돈을 잘버는 기업으로 살아 남았다. 처음 한국이라는 가난한 나라의 조그만 마을의 기업에서, 한국 제일의 기업으로, 이어 아시아를 넘어 미국의 기업들과 당당히 세계 1,2위를 다투는 기업이 됐다. 어떻게 이병철은 그럴 수 있었을까? 그의 생애 많은 사례가 있지만 울산비료공장 건설은 가장 대표적인 예다. 한국 울산비료공장은 한국이 공장을 지어 세계 최대라는 말이 처음 나온 곳이다. 본래 이승만 대통령시절 이병철이 기획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4.19 혁명이 났고, 곧 5.16 혁명이 났다. 이병철은 자연스럽게
소위 밀가루, 설탕, 시멘트 이렇게 세가지의 분말의 가격이 갑자기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963년 한국의 상황이다. 밀가루 판매소에는 사람들이 길게 밤새 줄을 섰다. 설탕직매소마다 사람들이 줄을 섰다. 미리 사놓지 않으면, 아침에 100원하던 것이 저녁에는 150원으로 가격이 뛰었다. 1963년 동아일보는 이렇게 썼다. “‘밀가루 배급을 달라 소동’ 직매소마다 사람들이 줄을 섰다. 한 주먹의 설탕, 밀가루라도 더 사려 아우성을 쳤다.” 소위 삼분파동이 벌어진 것이다. 사실 삼분파동은 각기 다른 이유에서 발생했다. 설탕만해도 당시 세계 설탕원료의 대부분을 제공하던 쿠바가 서방세계에 원당 수출을 중지하면서 발생했다. 설탕 원료가 공급되지 않으니, 설탕 가격이 치솟았도 생산자 입장에서는 설탕을 만들 길이 없었다. 설탕이 품귀현상을 빚으니 ‘사재기’(물건을 사서 쌓아두는 것) 현상이 벌어졌다. 1963년 6월 6일 한근 600g에 50원하던 설탕이 자고난 다음날엔 75원으로 뛰었다. 4~5개월 사이에 설탕 값이 10배나 올랐다. 정부가 나섰다. 정부는 직매소를 두어 일종의 배급제를 시작했다. 한 사람당 한근 이하로 팔았다. 직매소에서는 시중보다 설탕을 싸게
“일하는 자의 발목을 잡는 것은 항상 일하지 않는 자다.” 이병철이 남긴 말이다. 지나면 지날수록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최소한 한국사회에는 그렇다. 뿌리 깊은 병폐다. 그의 아들 이건희는 삼성의 혁신을 강조하며 “차라지 가만히 있으라! 일하는 자의 발목을 잡지마라!”라고 했다. 일제 말기 정미와 술제조로 큰 돈을 벌 때만해도 조선의 그저 돈이 있는 여러 집안 가운데 하나였다. 전국적인 명성은 있었지만, 그 부가 전국 1, 2위를 아니었다. 그가 한국전쟁 직전 서울에 진출 ‘삼성물산’을 세울 때만 해도 삼성물산보다 큰 회사가 5,6곳이 있었다. 그런 삼성이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1위에 올랐고, 부산에서 ‘제일제당’을 만들자 이병철의 부가 전국 1,2위를 다투기 시작했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고, 제일모직을 만들었다. 개인적으로 삼성그룹의 탄생에 있어 제일모직의 위치는 색다른 의미가 있다. 제일제당만해 국내 시장 장악이 목표였다. 단순히 설탕을 대체해 직접 제조하자는 게 목적이었다. 목표가 단순하니 이병철의 주변에서도 모두가 쉽게 돈이 된다고 봤다. 그러나 제일모직은 달랐다. 목표가 한국 시장을 넘어 세계 시장이었다. 한국의 회사들이 경쟁 상대가
“정말 자기 것인 것인지 알려면 버려봐라” 옛 선인들이 준 충고다. 소유라는 것은 내게 있어야만 하는 게 아니다. 소유란 내맘대로 되는 것이다. 내 것은 저절로 내맘으로 그대로 된다. 내 맘대로 된 것이야말로 내 것인 것이다. 그런데 그게 영원히 내 것일까? 기업은 어떻게 소유하는 것일까? 삼성그룹의 영원한 숙제는 일찌감치 선대 이병철 때부터 시작됐다. 울산비료공장은 이병철, 또 지금의 삼성에게 기업 소유권을 어찌 유지해야하는 지 끝없이 고민하게 한 주인공이다. 울산비료공장, 제일제당, 제일모직을 성공시킨 이병철의 회심의 작품이었다. 한국 정부도 못하는 유럽 차관까지 모두 섭외를 해놓고도 한국 국내 정치 상황의 급변으로 이루지 못했다. 경제를 중시하는 혁명정부가 들어섰지만, 이병철은 울산비료공장을 적극 추진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상만으로 간단히 이병철의 자신의 계획을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버려졌던 울산비료공장 계획은 엉뚱한 순간 되돌아 왔다. 마치 자신의 진정한 소유주는 이병철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1963년 10월 한국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혁명정부가 정권을 민간에 이양한 조치였다. 그렇
본래 정말 원하는 것을 달성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법이다. 그런데 인생이 재미있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려고 그리 노력해 결국 그토록 원했던 별은 못 땄는데, 엉뚱하게 더 좋은 달을 따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굳이 설명하자면 이병철과 울산공업단지의 경우가 그렇다. 이병철은 제일모직 성공이후 국가 재건을 위해 아시아 최대의 비료 공장을 꿈꾼다. 대부분을 외국에서 차관을 받아 짓는다는 게 기본 계획이었다. 이병철은 이를 위해 유럽을 돌아다녔고, 차관과 기술협력과 관련한 기본적인 협의를 해놓는다. 하지만 한국의 4.19혁명에서 5.16군사혁명까지 두 번의 연이은 혁명은 이병철의 비료 공장의 꿈을 좌절시킨다. 하지만 그 비료공장을 위한 노력이 이병철에게 무익했던 것은 아니라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이병철은 해외 차관과 대규모 공장 건설을 위한 기술 지원 협의에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지니게 됐다. 이병철의 이 노하우가 발현된 것이 바로 울산공업단지다. 울산 공업단지는 한국의 경제 발전에 초석이 된 것이다. 본래 당시만 해도 군사혁명정부 내부에서는 경제개발과 관련한 두 가지 흐름이 있었다. 모두가 경제발전을 위해 산업화가 필요하다는 데 이견은 없었다.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