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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 한국비료와 이병철의 10년의 고난 (4)

한국경제인협회의 탄생

5.16 군사 정권의 국정 운영의 핵심은 하나도 경제 건설, 둘도 경제건설이었다. 그 뒤가 바로 안보였다.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사정권세력은 ‘과감’이라는 군사정권을 특징을 그대로 살렸다. 각종 경제 건설 계획을 수립하고 과감하게 실천했다.

 

사실 어떤 계획도 실천보다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훌륭한 계획이라도 실천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물론 좋은 결과를 위해 좋은 계획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에 대한 고려 없이 각종 이상만을 담은 실천할 수 없는 계획은 이미 좋고 나쁨의 평가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너무 많은 선과 색을 넣으면 그림은 지저분할 수밖에 없고, 완성될 수 없는 이치다.

 

바로 4.19 혁명 정권의 한계였다.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것은 다른 게 아니었다. 순수한 국민의 힘이었다. 탱크와 총에 몸으로 맞섰던 일반 학생 국민들의 용기였다.

 

그러나 그 혁명으로 정권을 얻은 시민 정부는 너무나 무력했다. 수많은 주장들이 서로 맞섰고, 양보하지 않았다. 걸핏하면 거리로 나서 시위를 했다.

 

학생들은 학생대로, 공장의 공원들은 공원대로, 심지어 경찰도 경찰대로 시위를 했다.

 

어느 한 곳 옳지 않은 주장이 없었고, 그래서 어느 하루 혼란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매일 서로가 더 옳다고 주장을 했다.

 

5.16 군사 정권은 이런 혼란 속에 탄생했다. 혼란 속에 모두가 차라리 이전 이승만 독재가 더 나았다는 한탄이 나올 때 등장을 했다. 총과 칼로 혼란을 정리했다. 민주의 입장에서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혼란은 그 어떤 수단보다 빠르게 정리됐다.

 

이병철은 당시를 이렇게 정리했다. “4.19 이후 계속된 혼란으로 경제활동은 위축되고, 물가고와 실업문제가 심각하였다. 그 위에 농산물의 흉작까지 겹쳐 쌀 파동마저 일어났다. 이렇게 중첩된 경제 문제의 타개를 위해서 정부와 경제계의 협력이 절실하게 요청됐다.”

 

박정희 군사 정권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박 정권은 경제계가 자신들의 지시에 빠르게 군처럼 움직이길 희망했고, 경제계를 총 관리하는 조직이 만들어지길 희망했다. 정부는 소위 한국경제인협회 조직을 추진한다. 이병철은 정부에 의해 초대 회장에 추대된다. 바로 1961년 8월 16일의 일이었다. 5.16년 혁명이 일어나고 불과 3개월만의 빠른 조치였다.

 

이병철은 초대 회장직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다. “거듭 사양했으나 창립총회에서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사진 속의 이병철은 환하게 웃고 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1962년 바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1차 계획을 착수한다. 협회는 이 같은 정부의 추진을 실천하는 기구였다. 또 경제계의 대정부 창구이기도 했다.

 

처음 협회 창립회원은 아이러니컬하게 정부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수사를 받았던 이병철 외 12명이 전부였다. 이어 구인회 LG 창립자 등 7명이 추가 돼 20명이 된다. 1961년 연말에는 다시 20명의 회원을 추가해 총 40명의 명실상부한 한국 최대 기업가 협회가 된다.

 

초기 경제개발계획에서 이병철의 역할을 정말 중요한 것이었다. 군 부대만 지휘하던 이들의 추진력만 대단했고, 경제 현실 등에 대한 고려는 적었다.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시간조차 실제 부족했다.

 

이병철의 회고에는 다음과 같은 사건이 기록돼 있다. 한번은 정부의 요인이 한 명이 이병철을 급히 찾았다. “아니 경제인들이 약속을 어기고 짓기로 한 공장을 짓지 않고 있다고 위에서 대단히 분노를 하시고 계십니다.” 이병철은 만나자 숨도 돌리지 못하고 쏟아낸 질책이었다.

 

본래 이병철의 제안으로 당시 정부는 부정축재 죄로 내야 할 벌금을 공장을 짓는 투자금으로 쓰도록 하고 그 지분을 벌금 대신 납부 하도록 했다. 정부의 독촉은 약속에 따라 지어야 할 공장이 제 대 지어지지 않는다는 지적이었다.

 

이병철이 가만히 살펴보니, 조급한 정부가 곳곳의 루트를 통해 각 경제인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병철은 직접 정부 담당자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상황을 정리한다.

 

“공장을 잘못 지으면 투자금은 물론 이후 사업비마저 날리는 경우가 생긴다. 이를 위해 철저한 준비를 하도록 해야 한다. 독촉하기보다 준비를 철저히 하기 위한 경제인의 활동을 지원해야 한다.” 이병철은 이를 위해 정부가 경제인의 신속한 해외여행 지원과 차관도입을 위한 정부의 지급보증을 요청했다. 박정희 정권을 이병철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 같은 혁명정부와 경제계의 협력은 바로 결과로 이어졌다. 이병철은 경제계의 중지를 모아 ‘울산산업단지’ 건설의 계획을 내놓는다. 한국의 기간산업 뿌리를 내리는 일이었다. 국가의 존망을 좌우할 대규모 차관도입이 필요한 일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과감하게 추진했고, 이병철을 중심으로 경제계가 그 뜻을 좇았다.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한 울산공업단지의 성공은 사실 이병철의 오랜 꿈인, 비료공장 건설 계획을 새롭게 추진하는 일이기도 했다. 10년여의 고난이 마침내 결실을 맺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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