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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 한국비료와 이병철의 10년의 고난 (9)

삼분파동, 우리가 잘 사는 길에 대한 새로운 고민      

소위 밀가루, 설탕, 시멘트 이렇게 세가지의 분말의 가격이 갑자기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963년 한국의 상황이다. 밀가루 판매소에는 사람들이 길게 밤새 줄을 섰다. 설탕직매소마다 사람들이 줄을 섰다. 미리 사놓지 않으면, 아침에 100원하던 것이 저녁에는 150원으로 가격이 뛰었다.

 

1963년 동아일보는 이렇게 썼다. “‘밀가루 배급을 달라 소동’ 직매소마다 사람들이 줄을 섰다. 한 주먹의 설탕, 밀가루라도 더 사려 아우성을 쳤다.” 소위 삼분파동이 벌어진 것이다.

 

사실 삼분파동은 각기 다른 이유에서 발생했다. 설탕만해도 당시 세계 설탕원료의 대부분을 제공하던 쿠바가 서방세계에 원당 수출을 중지하면서 발생했다. 설탕 원료가 공급되지 않으니, 설탕 가격이 치솟았도 생산자 입장에서는 설탕을 만들 길이 없었다.

 

설탕이 품귀현상을 빚으니 ‘사재기’(물건을 사서 쌓아두는 것) 현상이 벌어졌다. 1963년 6월 6일 한근 600g에 50원하던 설탕이 자고난 다음날엔 75원으로 뛰었다. 4~5개월 사이에 설탕 값이 10배나 올랐다.

 

정부가 나섰다. 정부는 직매소를 두어 일종의 배급제를 시작했다. 한 사람당 한근 이하로 팔았다. 직매소에서는 시중보다 설탕을 싸게 팔았다. 시중가격의 반값 정도에 설탕을 팔았다. 적은 양이었지만, 직매소에서 사서 사재기를 하면 그 순간 배의 돈을 번 셈이었다.

 

오히려 사회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사회 여론은 갈수록 악화됐다. 이 때 정치권의 모 인사가 그 배후로 재벌을 지목했다. 사실 말이 재벌이지, 한국인이라면 그 지목된 재벌이 누군지 다 안다. 바로 이병철이었다.

 

“백성의 혈을 빨아 돈을 채운다”는 사설이 나왔다. 일부로 공급을 늦춰 설탕 인플레이션을 조장했다는 것이었다.

 

이병철은 정말 억울했다. 사실 이병철이 한 일이라고는 남들보다 사업을 더 잘한 일밖에 없었다. 그래서 돈을 벌었고, 두 번의 혁명에 부정축재자로 몰려, 거액의 배상금을 내야 했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있다. 이병철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 삼분파동을 아주 짧게 언급한 것이다. 그리고 대신 자신이 한 언론에 기고한 ‘(한국이) 잘사는 길’이라는 3편의 글을 가감없이 실었다.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이 든다. ‘이병철은 정말 억울했다. 말로 할수없을 정도로 억울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렇게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은 한 사람의 잘못이나 정권의 잘못을 보지 않았다. 한국 사회의 사회의식이 아직 그리 성숙하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삼분파동으로 누구를 욕하기 보다, 사회의식을 바꾸자, 보다 잘사는 길은 열심히 일해서 잘살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인정받는 것이고, 성공한 사람들이 존중받는 것이다.’

 

바로 이런 생각에서 이병철은 삼분파동에 대한 어떤 악의 찬 글을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싶다.

 

다만 당시 이병철은 분명히 억울하고 억울했다. 그래서 검찰 수사를 자청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 악의 찬 글을 쓴 언론사를 대상으로 명예훼손 소송도 진행했다.

 

검찰 수사결과, 실제 처음 문제를 제기한 정치인이 악의 근원이었음이 드러났다. 그의 가족이 설탕 판매소를 운영했는데, 실제 사재기를 해서 막대한 부를 챙긴 것은 그의 친지이지 이병철이 아닌 것이 명백히 밝혀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본래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법이다. 이병철의 결백을 지금 한국인들 가운데 아는 이는 몇 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과거 생산된 가짜뉴스를 그대로 믿고 있다. 이병철은 자서전에서 삼분파동의 검찰 수사 결과만 짧게 언급하고 있다.

 

그럼 이병철이 절실함에서 쓴 ‘잘 사는 길’은 어떤 길일까? 이병철과 관련한 글을 쓰면서 서너번을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그의 식견에 감탄을 하게 된다. 정확히 한국병을 짚었고, 그 대안은 제시했다.

 

이병철이 본 한국병은 뿌리가 깊다. 상을 멀리하는 유교의 전통에도 그 화근의 일부가 유래했다. 조선은 공자의 나라다. 특히 공자 가운데도 성리학 주자의 나라다. 성리학은 공자의 학파 가운데 맹자를 최고로 친다. 솔직히 개인적 감상은 ‘공자는 좀더 포괄적이고 인간적인 반면, 맹자는 지극히 이상주의, 관념주의자’라는 것이다.

 

조선은 그런 이상주의와 관념주의가 지배했던 나라다. 주자와 달리 공자를 해석했다고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다른 학파를 몰살시킬 정도였다. 맹자는 군자의 도를 최고로 쳤고, 완성된, 교육받은 인간은 군자의 도를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청렴을 최고 가치로 쳤다. 솔직히 당대 사대부들은 자연스럽게 녹봉을 받는 관료가 될 수 있었으니 그럴만도 하다. 하지만 조선은 사대부들 스스로도 지키지 못하는 사회적 가치를 백성들에게 지키도록 강요했다. 역대 한반도에 들어선 왕조 가운데 가장 위선적인 정권이었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론 진정 맹자를 추종해 가끔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들이 나오기도 했다. 온갖 고행을 스스로 지면서 국가와 군자의 도를 행했다.

 

이병철은 우선 이 같은 조선의 풍토를 비판한다. 청렴한 이가 가난할 수 있지만, 가난한 이들이 청렴한 것은 아니다. 일하지 않아 가난한 것의 변명이 청렴이 아니라는 지적이었다.

 

‘일 하라. 그래서 부를 만들라. 그래서 보다 많은 이들과 그 부를 나눠라.’ 이것이 이병철이 제시한 잘 사는 길이었다. 묘한 것이 훗날 접했던 덩샤오핑의 ‘선부론’과 겹치는 부분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병철의 생각은 공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아주 어려서부터 한문을 접하고 공자의 학문을 추구했던 이병철이다. 맹자에 빠져, 위선에 물든 조선 말기의 ‘가난한 정신’을 고치지 않으면 한국이 잘살기 어렵다는 점을 명확하게 지적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지적한다. “일 하지 않는 자들이여, 제발 일하는 이들의 발목을 잡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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