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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 한국비료와 이병철의 10년의 고난 (12)

사면초가 속에 결정, 승부사 이병철

옛 말에 “고대비풍다”(高臺悲風多;높은 곳일수록 고난의 바람이 많다.)라 했다. 삼성이 정말 그랬다. 조금씩 한국의 제일로 올라갈수록 주위에 질투와 시기가 심했다. 이승만 정권말기 대한민국의 모든 은행을 삼성에게 맡겨 운영을 하도록 하면서 이병철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현금이 많은 사람이 된다. ‘돈(錢)병철’이란 별명도 이 때 생겼다.

 

문제는 이 때 한국의 모두가 가난했다는 점이다. 삼성의 이병철이 한국의 현금 대부분을 손에 쥐면서 모든 한국인의 부러움을 샀지만, 질투와 시기도 함께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같은 국민 감정을 정치인들이 교묘하게 이용하기 시작한다. 4.19 혁명직후 ‘부정축재자 1호’로 꼽힌 것도 그 때문이며, 박정희의 5.16 군사 쿠데타 직후 국가 경제 재건 사업에 앞장서면서도 다시 부정축재자로 내몰린 것도 그 때문이다.

 

소위 ‘삼분파동’의 핵심으로 내몰린 것 역시 국민적 감정을 이용한 정치권의 장난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절정이 ‘한국비료 사건’이었다. 바로 직전에 소개했던 재벌 삼성의 ‘밀수 사건’이다. 사건은 본래 간단했다. 삼성측의 잘못도 있었다.

삼성이 한국비료 공장 건립 이후 비료 생산에 쓰려고 외국에서 수입한 화학물질의 일부를 현장 담당자가 모르고 일부 내다 판 것이 문제가 됐다. 본래 삼성이 바로 해당 벌금을 치르고 잘 해결 될 것 같은 사건이었다. 그런데 그 게 언론에 알려지면서 “재벌 삼성이 밀수를 했다”는 식으로 보도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병철은 당시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삼성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장되어 마치 국가적 범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몰아붙이는 것은 정도를 넘는 일이었다. 입을 열면 모두 변명으로밖에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천리의 둑도 개미구멍 하나로 무너진다. 비원의 비료 공장은 물론 이거니와, 오랜 세월에 걸쳐 각고 끝에 쌓아 올린 사업가로서의 업적도 모두 허사가 되고 마는 것일까, 하고 이를 데 없는 적막과 고독에 사로 잡혔다.”

 

이런 심정 속에 이병철은 고심 끝에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여기에는 정부의 압력도 한 몫을 했다. 다시 이병철의 증언이다.

 

“선친이 언제나 일러 주던 ‘사필귀정’의 뜻을 되새기면서 마음의 평온을 잃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그러나 악랄한 비난 속에서 삼성이 공장 건설을 속행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정부의 암암리의 강요도 있어, 드디어는 국가에 헌납할 것을 결의하고 그 뜻을 공표했다. 누가 건설하여 운영하든 비료공장은 국가적 견지에서 시급한 것이었으므로, 정부가 인수하여 완공시켜 주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는 생각보다 더 못됐다.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만족해하면서도 이병철에게 ‘완공해서 헌납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병철은 한국비료 지분 51%를 정부에 헌납하기 위해 동방생명과 마찬가지로 보험사업 진행차 매입했던 동양화재보험의 소유지분과 현재 한진빌딩이 서 있는 서울 중심부 1 등의 대지를 팔아 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이병철은 역시 이렇게 토로했다. “10년에 걸쳐 세 번씩이나 도전하여 겨우 완성시킨 비료 공장이다. 손을 떼는 데 아무 감상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 될 것이다.”

 

이 때문인가? 이병철은 정치에 나설 것을 놓고 한동안 고민을 한다. 현대그룹의 창시자 정주영 명예회장이 정치에 나선 것과 같은 이유다. 이 땅에 좀 더 청렴하고 올바른 정의를 실현해줄 정치인은 없는가? 가난의 길을 버리고 과감히 잘사는 길로 나갈 그런 정치인은 없는가?

 

바로 이병철의 고민거리였다. 하지만 이병철은 정치인의 길을 가는 것을 포기한다. 자신에게는 경제인으로서의 길이 더 걸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이병철은 정주영과 큰 차이를 보인다. 이병철은 대신 신문사를 하나 만들기로 한다. 바로 1965년 9월 22일 탄생한 중앙일보가 그 것이다. 정론집필을 통해 이 땅에 올바른 정치행태가 자리 잡도록 했으면 하는 것이 이병철의 바람이었다. 오늘날 중앙일보가 이병철의 바람 그대로 운영되는지는 미지수다. 중앙일보는 삼성의 손을 떠나 이병철의 사돈이며 동양텔레비전과 중앙일보 사장을 맡았던 홍진기 사장 집안의 소유가 됐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역시 당대 삼성을 견제했던 정치권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이병철이 그토록 아꼈던 동양방송은 1980년 국가에 헌납돼 KBS에 합병된다. 참 요즘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문제로 시끄러운데, 뭔가 그 옛날의 악몽들이 되풀이 되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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