若早知统一路工程的竣工难度,郑周永在奔向文山的那辆车上,就会拒绝朴正熙的提议了吧。板门店与首尔之间修建统一路的工程委实不容易,最大的问题是多变的天气,每天都像是一场赌注,只能祈求不要下雨、下雪,因为一旦下雨或者下雪,工程就会被延迟。11月末,正是天气逐渐变凉的时候,日夜温差也很大,公路常常结霜,对于铺路工程来说,是最恶劣的天气条件,但郑周永需要解决朴正熙给的课题。
“Imja(喂)。必须要12月5日之前完工。”为什么是12月5日呢?简单的说,是因为朝鲜。当时,朝鲜政府的访问团将会经由板门店访韩,朴正熙想让朝鲜官员看到韩国先进的公路系统。但其实,当时的韩国经济确实落后于朝鲜。因此,准确来说,朴正熙不想让朝鲜官员有“韩国的经济基础尚落后”的印象。
在首尔钟路区桂洞总公司旁边的公园,郑周永会长正在做早操。(1991)一生都勤劳的郑周永会长,是出了名的凌晨上班的“晨型人”
郑周永怎么会不懂朴正熙的心思呢?郑周永的想法也应该是一样的。郑周永的故乡就在朝鲜地区。他是在朝鲜战争爆发之前,以找工作为目的南下的人。虽然为了养家糊口,离开故乡,但他从来没有忘记自己的故乡。郑周永很想让故乡的人看到自己的成功,所以他当下就接受了朴正熙统一路工程的提议。
在郑周永的指挥下,统一路工程进展顺利。老天可能也知道了郑周永的心,天气没有那么恶劣。郑周永每天凌晨5点亲自到工地督阵。想要凌晨5点到工地,他至少得3点半起床,4点从家里出发。根据相关记录,在整个工程期间,郑周永坚持了这样的作息,一天也没落。职位最高的人,每天凌晨5点来工地督阵,属下的工作人员也只能早早的来。现代建设的上下一条心,共同为修建统一路而奋斗。
统一路工程的现场。郑周永会长的故乡本在朝鲜地区,所以对他而言,统一路工程具有重大意义。
可惜,工程最终没能按原定的时间完工。12月5日早上10点,朝鲜政府的访问团将会经由现代建设负责修建的公路区间,但这区间的工程还没有完工。在寒冷的天气下,刚铺完柏油的公路上冒出了白色烟气。虽然碧蹄桥工程还没有完工,但郑周永决定先用临时支架搭桥,让访问团通过。忙着修建临时桥的时候,看见了远处朝鲜政府访问团的车队。郑周永与工人们迅速躲到了公路两边的草丛里。郑周永掩不住紧张的神情,他担心桥下临时搭起的支架撑不住车队的重量。如果发生塌桥的事故,必定会引起巨大轰动。当时,朝鲜与韩国的关系较为紧张,访问团在韩国的日程中绝对不能出现意外。郑周永躲在草丛里,屏住呼吸注视着访问团过桥,确认访问团安全过桥之后,他才松了口气。然而,朝鲜政府的访问团完全不知情。他们不知道自己驶过的公路,是郑周永会长正在铺的,不仅如此,郑周永还躲在路旁的草丛中,祈祷他们安全过桥。
访问团安全过桥的那一瞬间,郑周永应该心怀感激了吧:“同乡人经由我铺下的公路,到首尔参加和平会谈啊。现在的我虽然躲在路旁的草丛里,但未来,我会亲自修建南北和平统一的道路。”郑周永内心可能是这么想的。当时的郑周永万万没想到,19年以后,他的梦想成真。那是1989年1月23日的事情。
笔者 淸露 图片摘自 国家记录院
现代集团与创始人郑周永(19)
숨어서 본 도로의 완공
박정희의 차를 얻어 탄 게 잘못이었다. 자연스럽게 판문점에서 서울까지 통일로 맡았지만, 공사는 쉬운 게 아니었다. 특히 공기가 정해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하늘과 벌이는 도박 한판이었다. 하늘에서 비, 눈이라도 내리면 도로를 까는 일이 그만큼 지연되기 때문이다. 때는 11월말, 날씨가 하루가 다르게 추워지고 있었다. 날씨가 추워지면 밤낮 기온차로 도로에 이슬이 맺히기 일쑤다. 도로 공사에 최악의 조건에서 정주영은 박정희가 낸 숙제를 풀어야 했다.
“임자 12월 5일까지 반드시 마무리 해줘야 하네.” 왜 12월 5일이었을까? 앞에서 설명했지만, 다시 짧게 이야기하면 북한 때문이었다. 북한 대표단이 서울을 찾아 남북대화를 하는데, 박정희는 가능하면 잘 닦인 도로를 북한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 북한의 경제는 남한보다 훨씬 좋았고, 서울은 막 새롭게 산업의 길을 걷는 처지였다. 한마디로 꿀리기 싫다는 게 박정희의 마음이었다.
정주영이 어찌 그 맘을 모를까? 오히려 더 심했을 것이다. 이북은 그의 고향이었다. 그 역시 이북에서 일자리를 찾아 남하한 인물이었다. 자연스럽게 고향을 떠났지만, 고향을 한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 고향 사람들에게 자신의 성공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박정희의 요구를 한마디 대꾸없이 들어준 것도 그런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사는 정주영의 지휘 아래 빠르게 진척됐다. 하늘도 정주영의 마음을 이해한 듯 변덕을 부리지 않았다. 정주영은 매일 새벽 5시면 현장에 도착해 지휘를 시작했다. 그렇게 하려면 정주영은 새벽 4시쯤에는 서울 청운동 자택을 나서야 했다. 그래도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가장 높은 양반이 가장 먼저 일어나 현장에 있으니, 다른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모두 하나의 마음으로 공사에 매달렸다.
그러나 아쉽게도 공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완성되지 못했다. 12월 5일 오전 10시 북한 대표단이 현대건설이 맡은 도로 부분을 통과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까지 공사는 끝나지 않았다. 겨우 아스팔트를 깔았을 뿐이어서 도로 위해서는 추운 날씨 속에 연기가 피어 올랐다. 정주영은 일단 이 상태로 북한 대표단을 통과시키기로 마음 먹는다. 다리가 문제였지만, 벽제교 아래 임시 받침대를 깔고 아스팔트를 위에 설치를 했다. 공사가 한창일 때 저 멀리서 북한 대표단을 태운 차량이 모습을 보였다. 정주영은 신속히 작업 인부들을 도로 양 옆으로 숨도록 했다. 이어 자신도 몸을 숨긴 정주영은 긴장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임시방편으로 받쳐 놓은 다리가 걱정됐기 때문이다. 만약 다리라도 무너지면, 큰 오해를 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민감한 게 남북관계였다. 정주영이 도로 곁에 숨어 숨을 죽이고 있을 때 정말 천운이 맞아 북한 대표단은 무사히 다리를 건넜다. 정주영은 겨우 한숨을 쉴 수가 있었다. 이 순간의 비밀스러운 정황에 대해 북한은 지금도 모르고 있다. 자신들의 대표단이 달린 길을 정주영 회장이 직접 깔았으며, 자신들이 달리는 순간 길 옆에 숨어서 자신들의 안전을 기원했다는 것을.
사실 당시 그 순간 정주영 역시도 감격했을 것이다. 고향이 있는 북한 사람들이 자신이 직접 깐 도로를 달려, 평화의 회담을 벌이러 왔다니. 지금은 도로에 숨어 있지만, 언젠가 내 손으로 직접 남북의 재결합을 위한 도로를 만들리라. 아마 정주영은 이리 다짐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정주영은 꿈에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다짐이 그 뒤 19년 만에 다시 빛을 보리라는 것을. 1989년 1월 23일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