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路建设常被比喻为国家产业发展的血脉,正如血脉把体内的营养物质运输到身体各个部位,公路将国家的资源和财富分配到各个地区。60年代的韩国可谓是“全身血脉完全堵塞的患者”。国土70%是山地的韩国,似乎只能利用江河等自然形成的道路来发展产业。
从运输功能来看,江河等水路比山路效率更低,因为并不是所有的江河都可以当作运输的水路。不仅如此,有时为了避开江河,需要绕行险峻地势,一个错误的判断,就有可能使交通堵塞,进一步阻碍运输的发展。
郑周永会长(图右)、朴正熙总统(图左)、陆英修女士参加京釜高速公路的开通仪式,正在为开幕剪彩。(1970.7.7)ⓒ 联合通讯社
因此,刚上台的朴正熙先对水路开发事业下了手。他首先整顿了四大江沿岸流域,给本为帆船大小的河道加宽,放大船行驶。其次,他在每个大河上架桥,使地区相连。另外,还建设了昭阳江大坝等水路相关的基础设施,把自由流动的河流变成了发电、供电的重要资源。
但只有这些是不够的。韩国真正需要的是连接海边的大港口与首尔等主要大城市的公路。当然,当时的韩国并非完全没有道路,只是还没有具备能够让货车奔驰的高速公路,光靠砂石路等低速道路来运输,韩国经济的发展速度也只好处于“低速”。因此,韩国对高速公路的需求非常大,尤其是在最大的港口城市釜山与首都首尔之间。
当时,釜山市跟亚洲经济大国日本积极进行贸易,进出口的货量很大,但釜山市与首尔市之间没有高速公路,货物的运输时间非常慢。最快的交通工具火车,往返于首尔和釜山也需要14个小时左右。综合这样的情况,朴正熙政府开始规划建设京釜高速公路,目标是“建立一个单程只要5个小时的高速公路”,实现“首尔-釜山1日生活圈”。
京釜高速公路施工现场(左图)与完工后现场(右图)。京釜高速公路是郑周永会长耗尽心血的成果。ⓒ 国家记录院
其实,朴正熙推进京釜高速公路建设事业,并不只是因为有经济发展方面的需求,而是为了巩固其政治立场。在朴正熙政府原本设想的“韩国经济5年计划”的国土开发项目中,也不包括京釜高速公路事业。变化的关键在于政治趋势。当时,韩国正在举行第六届总统选举,政治圈开始有了要求朴总统下台的意见:通过军事政变上台的朴正熙总统应该下台,将集中于政府的权力下放到民间。针对这样的意见,朴正熙总统想证明,自己的领导能力仍是重建国家的重要条件。
朴正熙总统需要快速发展国家,不只是将国民的生活水平提高到小康水平,更要让整个国家成为富裕国家。因此,他提出了京釜高速公路建设事业,以助于推动国家经济的快速发展。但由于制定该事业计划的过程比较急,朴政府没法提前备好内部的合作体系,急需外部的协助来实现其计划。反对朴正熙的政治势力主张:“朴正熙利用没必要的大规模国土事业来实现个人的政治野心。”这时,朴正熙的脑海中浮现了一个人物,正是郑周永。
60年代,率领现代建设集团的郑周永,取得了泰国高速公路兴建工程,并顺利完成了这项韩国建筑史上的第一个海外建设工程。想要建设高速公路,朴正熙当然会最早想起郑周永。郑周永与朴正熙第一次见面的那天,正是韩国产业发展史上重要的里程碑。当时,朴正熙已成功当选第六届总统,虽然实现了其政治目的,但还面对着履行公约的义务,所以无论如何都要成功建设京釜高速公路。反对朴正熙的势力已把“京釜高速公路”当作政治争论的核心,不断施行政治攻击。不过,他们的主张也有道理。当时,韩国一年的预算是1,700亿韩元,税收也只有1,000亿韩元。然而,京釜高速公路的建设费用高达500亿韩元。也就是说,如果京釜高速公路建设工程遭遇失败,有可能动摇国家经济的根基。
“高速公路是富人专用的公路,干脆用那些钱种玉米吧!”这是当时在野党反对京釜高速公路时高喊的口号。
笔者 淸露 图片摘自 现代集团
现代集团与创始人郑周永(16)
현대건설, 한국 경제의 핏줄을 뚫다
흔히 도로를 국가 산업 발전을 위한 혈맥에 비유를 한다. 핏줄이 몸 속에 영양분을 공급하듯 도로는 국가의 자원과 부를 각 지역에 분배해주기 때문이다. 1960년 대 한국은 이런 점에서 완전히 혈맥이 막힌 환자와 같았다. 전국토의 70%가 산악지역인 한국은 마치 산업 발전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유일한 게 자연이 뚫어준 도로, 수로만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은 어떤 점에서 산보다 더 지역과 지역의 소통을 막는 것이었다. 강을 피하기 위해 먼 곳을 돌아가야 한다. 잘 하면 좋은 길이 되지만, 잘못하는 산보다 더 길을 막는 게 수로의 특징이다.
그래서 새로 집권한 박정희는 가장 먼저 수로에 손을 댔다. 4대강 유역을 정비하고 돛단배 겨우 던 것을 넓혀 보다 큰 배를 띄울 수 있게 했다. 또 강마다 다리를 놓아 지역과 지역이 연결되도록 만들었다. 소양강 댐 등을 만들어 강물이 그냥 흐르지 않고 전기, 즉 돈을 만들며 흐르도록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했다. 정작 필요한 것은 바다의 큰 항구와 서울 등 주요지역을 잇는 것이었다. 물론 도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말 그대로 고속도로가 없었다. 모두가 일부 비포장길까지 포함된 저속 도로였다. 그러니 한국 경제의 발전 속도 역시 저속일수밖에 없었다. 특히 한국의 가장 큰 항구인 부산항과 서울을 잇는 고속도로도 없었다.
인천이야 가까워 다행이지만, 부산은 당시 아시아 최대 경제대국인 일본과 교역이 많았지만, 서울과 이어진 고속도로가 없어 물건 수송에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려야 했다. 당시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기차를 타는 것이었다. 그 기차는 밤낮으로 달려 14시간가량 걸렸다. 박정희 정권은 이에 경부고속도록 건설을 계획한다. 14시간 기차길을 5시간내로 차로 달려 가도록 해보자는 것이다. 소위 서울 부산 일일생활권이라는 개념이 나온 것이다.
사실 경부고속도로는 한국 경제의 승부수만이 아니었다. 박정희의 정치적 승부수였다. 본래 박정희 정부는 한국 경제 개발을 위해 5개 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967년은 2차 5개 년 계획이 진행되는 해였다. 그런데 경부고속도로는 당시 국토개발 계획에 포함돼 있지 않았다. 문제는 그해 한국에 제 6대 대통령 선거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미 한국 정치권에서는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제는 권력을 내려 놓을 때가 됐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늘고 있었다. 민간에 권력을 이양해줄 때가 됐다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에 이제 본인도 민간인이며, 아직 국가 재건을 위해 자신의 지도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 방법은 국가를 보다 빠르게 재건하는 것이다. 먹고 살만한 수준이 아니라 잘 사는 나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 복안이 바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계획은 이렇게 급히 나온 것이다. 박정희는 이 급한 구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외부의 도움이 절실했다. 무엇보다 경부고속도로의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고 그 타당성을 문제 삼는 이들이 많았다. 무모한 일을 정치적 욕심 때문에 강행한다는 게 박정희 정치적 반대세력의 주장이었다. 그때 박정희의 머리 속에 떠오른 인물이 바로 정주영이었다.
박정희는 자연히 정주영을 찾았다. 정주영은 당시 국내에서 유일하게 태국에서 고속도로를 건설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정주영의 박정희와의 첫 독대였다. 둘의 만남은 한국 산업사에 결코 지울 수 없는 한 장면이기도 하다. 당시 박정희는 이미 새로운 6대 대통령에 당선이 된 신분이었다. 정치적 목적은 달성했지만, 결코 공약을 허언으로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주영을 만난 박정희의 얼굴에도 이런 결연함이 있었다. 실제 정가에서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아예 정치적 논쟁의 핵심으로 삼고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한국의 1년 예산은 1700억 원, 연 세수는 1000억 원 정도밖에 되지 않던 시절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비용은 약 500억 원에 달했다. 실패할 경우 한국 전체가 흔들리는 규모였던 것이다.
“고속도로는 부자들만의 전용도로다. 차라리 그 돈으로 옥수수를 심자.” 당시 야당의 경부고속도로 반대의 구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