洛东江高灵桥工程上的赤字,对郑周永与现代建设是一个致命的打击,但郑周永总能战胜挫折带来的种种考验,向更高的目标、更远的方向挑战,最终让挫折成为成功的垫脚石。这次也是如此。郑周永用紧急融通的钱,再一次挑战了更远大的目标。
首先,郑周永做了增资。由于政府执行的货币改革,原来3000万韩元的资金一下子缩成了30万韩元。郑周永通过企业增资,将公司资金再次增到1000万韩元。其次,郑周永召回了当时运营杂志社的弟弟郑仁永,担任现代建设的副社长。另外,郑周永开始收购工程需要的技术装备。高灵桥工程的经历,让郑周永认识到,技术装备在建筑施工中的重要地位。
访问瑞山围海造田工程现场的郑周永会长,正在听现场管理者的解说。郑周永会长以挑战性的企业家精神和坚强的事业推进能力,主导了国内外不同领域的许多事业。
当时,美第8军有许多废弃的大型施工装备,郑周永凭借他与美军的老关系,以较便宜的价钱将需要的设备买下。这些机械,就是后来现代建设的动力。战后,美军重新调置驻韩美军的驻地,军需工程增加,为郑周永创下了机会。郑周永积极争取美军工程,拿到施工费后,通过汇率优惠获得了不少利益。承接美军工程还有一个优点,就是可以学到最先进的建筑技术。有关美军的工程一般由美军设计、监督,所以在合作的过程中,现代建设自然地学到了美军的设计技术与施工法。
1958年,现代建设承接的群山市空军飞机跑道铺装工程,为现代建设进一步发展奠定了基础。飞机跑道的铺装工程,制作混凝土时需要格外细心,以防飞机滑行时道路开裂,所以美军对铺装工程要求十分严格,现代建设为了符合美军的要求而努力,其建筑实力自然提高,成了在韩国拥有最先进建筑技术的建设公司。在这样的背景下,郑周永于1958年设立了“金刚石版”公司,开始生产韩国最早的屋顶材料石棉水泥瓦。
1950年,汉江人工桥被炸毁,难民正在通过浮桥过河。
另外,在釜山市躲避战火时,现代建设承接了政府的外国器材储藏管理业务。这项业务随着韩国社会的稳定与发展,逐渐扩大了业务范围。郑周永干脆另设了“现代商运”,专门负责有关政府所属外国器材的所有业务。50年代后期,现代建设的事业自然地出现了多样化,但其中,对现代建设的“东山再起”,意义最大的是1957年的汉江人工桥工程。
1957年9月,内务部地方局招标修建汉江人行桥。高灵桥工程给郑周永留下了巨额赤字,再一次挑战江桥的建筑工程,似乎是非常不理智的决定,但现代建设从美第8军成功收购许多先进的建筑及机器,拥有了与过去不同的实力。
汉江人行桥项目,可是一项人人都想争取的工程。郑周永参加政府的招标,写下了“4450万韩元”的最低竞标价,成功拿下了这个项目。当然,就算没有低价竞标的攻略法,以通过高灵桥工程积下的实力和信誉,还是能够拿下工程的。
郑周永认为,只要成功完成汉江人工桥项目,日后就能拿下有关政府的各种建筑项目,对现代建设的快速发展必定有很大的帮助。郑周永的预想是正确的。汉江人工桥的第一、二、三工程于1957年9月开工1958年5月顺利完工,让郑周永获得了合同规定的工程总费用2亿3千万韩元的40%,并让现代建设跨入韩国建筑界六强之列。
1958年5月,汉江人工桥成功开通。汉江人工桥维修工程,让现代建设跨入韩国建筑界六强之列。
当时,在韩国建筑界中具有竞争实力的主要建筑企业有大东工业、远东建设、大林产业、三浦土建和中央产业。这五家公司在政界都有较深的关系,而现代建设只是资历浅的建筑公司,虽有建筑施工上的实力,但没有政界上的关系。郑周永通过汉江人工桥工程力挫群雄,向韩国建筑界的“五条龙”发起了挑战。皇天不负有心人。1960年,韩国政局动荡不安,却为郑周永开辟了新的发展空间。继1960年4月19日的学生反抗运动,5月16日发动了全国性政变。
民主党在大选中获胜之后,极为仇视官商勾结、以权谋私、牟取暴利的韩国百姓,强烈要求新政府对不正当蓄财者进行调查并加以处罚。在此调查中共有46家企业被认定有偷税和漏税的不法行为,当局命令他们必须立刻补交税款,并对它们处以轻重不等的罚款。郑周永的现代建设也在被罚之列,他被指定补交1300万韩元税款以及400万韩元罚款,但现代建设的官商勾结程度较低,在企业经营实际业绩的排名中,始终高居榜首,所以在新的政局下,现代建设迎来了新的事业发展之路。
笔者 淸露 图片摘自 现代集团】
现代集团与创始人郑周永(13)
시련은 성공으로 가는 계단이다
낙동강 고령교에서 큰 손실은 정주영에게 분명한 시련이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항상 시련은 딛고 일어서는 계단으로 이용했다. 항상 시련을 딛고 일어나 더 큰 곳, 더 높은 곳으로 향했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주영은 현대건설 사옥은 물론 동생들 집까지 팔아 다시 한 번 도전에 나선다. 당장 회사 증자부터 했다. 원래 3000만원으로 시작했던 자본금이 화폐개혁으로 30만환으로 쪼그라든 상태였다. 정주영은 그것은 1000만환으로 늘렸다. 잡지사를 차려 독립해 있던 동생 정인영을 부사장이란 직책으로 다시 불러들인 것도 이때였다. 공사에 필요한 중장비도 하나씩 갖추기 시작했다. 고령교 공사를 통해 대규모 토목공사에서 장비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낀 정주영이었다. 점차 회사는 주먹구구식에서 건실해지고 있었다.
장비는 다행히 전후 미8군이 불하하는 것을 싸게 살 수 있었다. 현대건설의 재기에는 역시 미군 공사의 덕이 컸다. 미군은 전후 군사력 재배치 계획에 따라 새로운 공사들을 진행하고 있었다. 정주영의 현대건설은 이런 미군 공사에 온 힘을 쏟았다. 미군 공사다 보니 자연스럽게 화폐가치 변동의 혜택도 따랐다.
미군 공사의 또 다른 장점은 공사를 하면서 첨단 건설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는 점이다. 미군 공사는 보통 미군이 설계 시공 감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대건설을 자연스럽게 그들의 설계법과 시공법을 배울 수 있었다. 1958년 시행한 군산 공군기지 활주로 포장공사가 대표적인 예다. 활주로 포장 공사는 콘크리트를 만들 때 일반 도로 공사보다 보다 세심한 기술이 필요했다. 현대건설을 까다롭기로 유명한 미군의 요구를 만족시켜주면서 자연스럽게 국내 최고의 기술을 지닌 건설사로 거듭났다. 이런 과정에서 1958년 금강스레트라는 계열사도 만들게 된다. 국내 최초로 지붕재인 석면 슬레이트를 선보인 회사다.
또 부산 피난시절 정부로부터 받은 외국자재 창고 보관 업무도 커져 하나의 회사로 변신했다. 현대상운이 출범한 것이다. 현대건설은 1950년 후반 자연스럽게 사업 다각화에 나서고 있었다. 이렇게 차곡차곡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던 현대건설에게 기회도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1957년 9월 따낸 서울 한강 인도교 공사가 그 것이다. 이미 고령교 공사로 경을 친 정주영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그때와 달랐다. 우선 현대건설의 장비부터가 남달랐다. 현대건설을 4450만환이라는 가장 낮은 공사금액을 써내면서 낙찰을 받는다. 물론 주변에서는 또 다시 무리한 덤핑공세를 한 것이라는 말들이 나왔다. 하지만 정주영은 현대건설의 실력으로 자신이 있었다. 무엇보다 인도교 공사를 성공하면 자연스럽게 정부 발주 공사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예측은 정확히 맞았다. 정주영의 승부수가 정확히 맞아 떨어진 것이다. 2, 3차 공사가 이어졌고, 전체 공사계약금 2억3000만환 가운데 40% 수익을 고스란히 남길 수 있었다.
이 인도교 공사로 현대건설을 말 그대로 대한민국 최고의 건설사 가운데 하나가 된다. 당시 한국 건설업계는 대림산업 등 5개의 건설사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대부분 회사들이 당대 한국 정계 주요 인사들과 연을 맺거나 주요 인사들이 직접 경영하는 회사들이었다. 현대건설을 그동안 미군부대 건설사업만 겨우 따내던 회사에 불과했다. 말 그대로 공사 실력은 있었지만, 연줄 실력은 제로인 회사였다.
한국 정부 사업은 고령교 사업에서 크게 좌절한 뒤 두각을 내지 못했다. 그런 현대건설이 한강 인도교 공사를 마무리하면서 조금씩 한국 건설업계 소위 ‘오룡’들에게 도전장을 내밀게 된 것이다.
특히 1960년대 한국의 정치변화는 이런 정주영에게 뜻하지 않는 기회를 가져다 준다. 앞서 한국 건설업계를 좌지우지하던 회사들이 1950년대 한국 정치 주요인사들과 연관이 있거나 주요 인사들이 직접 관련된 회사라 소개했었다. 1960년 4월 19일 혁명에 이어 5월 16일 군사쿠데타까지 일어나면서 한국 정치권이 천지개벽의 변화를 맞는다.
물론 당시 기업인들은 일단 모두가 정경유착의 부정부패를 통한 축재자로 낙인이 찍혔다. 정주영 역시 화를 피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집권세력은 경제계에 유화책을 쓰기 시작했고, 주요 경영자들에게 새로운 사업의 기회가 열렸다. 정경유착의 혐의가 적었던 정주영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