韩国建筑业空前的繁荣,使郑周永的事业逐步站稳脚跟。1950年,郑周永将现代汽车工业社和现代土建社合并,成立了现代建设株式会社。现代建设株式为如今的现代集团奠下了坚实的基础,现代集团与三星、LG一起被列为“韩国产业三大公司”。1950年?这不是大家都耳熟的年度吗?
1950年6月,朝鲜战争,也就是抗美援朝战争爆发了。6月25日的凌晨,炮声在远处隆隆作响,郑周永挂上“现代建设”招牌还不到5个月,朝鲜战争就没有任何预兆地爆发了。“事业才刚开始起步……”郑周永嘴边的话还未说完,也只能赶快撤走。生命都垂危了,谈什么生意?加上,现代建设的主要客户是美军,朝鲜军不可能看好这份关系。
1984年,在瑞山现场指挥围困工程的郑周永会长。
无情的战火让老百姓陷入了一片恐慌之中,到处都是避难的人流。大部分的公共设施已被炸毁,包括汉江大桥,许多人找不到渡过汉江的办法,都挤在江边。郑周永一伙碰巧找到了一艘渡船,侥幸过江之后,一直往南徒步走。中途在天安市停留几天,观察了战争的形势,但怎么看战争形势也会更严峻,郑周永一伙只能逃到韩国的最南边,釜山。韩国的临时政府也从大邱市搬到了釜山市。
所谓“危机就是机遇。”战争给郑周永带来了预想不到的机会,而这个机会是二弟郑仁永帮他争取到的。战争爆发之前,郑仁永在《东亚日报》从事记者工作,由于他英语娴熟,所以经常采访美国及其他国家的外交人士。郑仁永利用这层关系,在釜山市的美军第8军统帅部谋到了差事,担当了工兵部队负责人Mcalister中卫的直属翻译。
战争期间,美军紧急需要修建军用建筑物。Mcalister中卫则请郑仁永帮他找盖楼的工人,郑仁永当然先和自己的大哥商量。郑周永对Mcalister中卫自信地说:“不管是什么事情,只要接手,我一定会做好的。”Mcalister中卫对郑仁永十分信任,对郑周永也不可能印象不好。郑周永顺利地得到了承建军用建筑物的业务。
现代建设负责装修的联合国纪念墓地公园。从中可以看出,郑周永机灵的一面以及他长年以来坚守的一种信念:“(只要下定决心,)就没有什么不可能的事情。”
最需要修建的是军营。7月初,10万美军在釜山登陆,釜山市这座本来不大的城市到处都挤满了美军。郑周永首先征用了学校教室。当时的学校,只能算是在光溜溜的土地上搭上的帐篷,根本不是什么建筑楼。郑周永先把每间帐篷消了一遍毒,再用木地板铺地,并补修帐篷,修建了美军用的军帐。美8军的所有建筑项目几乎都被郑周永一人垄断,他的生意再一次腾达了起来。受麦克阿瑟将军仁川登陆作战的影响,郑周永跟随军队回到了首尔一段时间,但抗美援朝的人民军占领首尔之后,只好再次跟随军队回到釜山,继续与美军第8军合作。回到釜山市之后,郑周永在釜山港第一港口前面设立了办公室,再次挂上了“现代建设”的招牌,事业开始从建设军帐扩大到港口仓库建设、水库维修等有关港口建筑的业务。通过各种各样的业务,郑周永的现代建设积累了不少有关建筑的实力。
1950年初,郑周永会长(图中左二)与郑仁永会长(图中最左)。当时,郑周永会长的二弟郑仁永(汉拿集团会长)担当了美军的直属翻译,利用这层关系,帮助郑周永拿到了修建军帐等建筑工作。
《回忆录》中,郑周永讲述了他做装修美军墓地的故事。从中可以看出,郑周永机灵的一面,以及他长年以来坚守的一种信念:“(只要下定决心,)就没有什么不可能的事情。”当时,在朝鲜战争中阵亡的美军士兵皆安息在釜山市。战争期间,釜山市的美军墓地粗陋无比,只有墓碑孤独地站着。有一天,美军第8军收到了联合国工作人员来参拜的消息,负责人就立马找郑周永装修墓地。“请把墓地装修得干干净净。多种点青草,尽量让它看起来绿意盎然。”郑周永立即回答:“好的。”成交之后,转过身的郑周永不禁叹了气,其实他有些不知所措,因为当时不是夏天,是严寒的冬天,根本就不是能找到青木或青草的季节。“该怎么办好呢。”苦恼了几天后,某种奇特的想法在郑周永的脑海中浮现。
笔者 淸露 图片摘自 现代集团
现代集团与创始人郑周永(10)
한국전쟁 발발 시련 속에 찾아온 진정한 행운
건설업종의 호황으로 사업가 정주영의 꿈은 이제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됐다. 기존 자동차 공업사를 토건업과 합치면서 번듯한 사무실도 갖춘 현대건설도 이때 탄생했다. 바로 1950년의 일이다. 현대건설은 훗날 삼성, LG와 함께 한국 산업의 삼대 기업으로 꼽히는 현대그룹의 모태가 된다. 그런데 1950년이라? 한국과 중국 독자 모두 너무나 귀에 익은 연도가 아닌가?
바로 한국전쟁, 중국에서 항미원조 전쟁이 일어난 시기다. 6월 25일 새벽 포성이 지축을 흔들면서 전쟁이 시작됐다. 바로 정주영의 현대건설이 간판을 내건 지 5개월만의 일이다. “이제 막 시작을 했는데…” 탄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주영 등은 사업은 고사하고 우선 몸부터 챙겨야 했다. 현대건설은 무엇보다 미군 일거리를 받아 성장한 회사였다. 북한 공산당의 눈에 곱게 보일리가 만무했다.
서둘러 오른 피난길은 아비규환이었다. 이미 한강 다리가 끊어진 상태였다. 강가는 강을 건너려는 이들도 가득했다. 정주영 일행은 그나마 다행이 나룻배를 구했다. 강을 건넌 뒤는 뒤도 안 보고 무조건 남쪽으로 걸었다. 천안 쯤에서 잠시 멈춰 전세를 살폈지만, 전세는 악화일로였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실제 대구로 피신했던 임시 정부도 부산으로 거처를 옮긴 지 오래였다.
그러나 “위기가 기회”라고 누가 그랬던가? 전쟁의 와중에 정주영에게는 생각지도 못했던 기회가 찾아온다. 기회는 동생 정인영을 통해 얻은 것이었다. 정인영은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 동아일보 기자로 활약하고 있었다. 외신부를 맡나 미국과 각국 외교 인사들을 취재했었다. 그런 인연 덕에 정주영의 동생 정인영이 부산 서면에 지휘부를 차린 미8군 후방기지 사령부에 특채가 된 것이다. 정인영은 일본으로 유학을 가 영문학을 전공한 덕에 영어와 일어에 능통한 상태였고 기자 경력까지 있으니 자격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무엇보다 정주영 입장에서 큰 기회가 된 것은 동생 정인영이 사령부에서도 공병대 책임자인 맥칼리스터 중위의 전속 통역을 맡았다는 것이다.
전쟁통에 당시 미군부대에서는 긴급한 건설 일거리가 쏟아지고 있었다. 맥칼리스터 중위는 정인영에게 한국 일군을 찾아달라고 부탁을 했고, 정인영은 자연히 형 정주영과 상의한다. 정주영은 맥칼리스터 중위를 만나 “무슨 일이든 맡겨만 주면 하겠다”고 자신있게 답한다. 신뢰하는 통역관의 형인만큼 맥칼리스터 중위의 정주영에 대한 인상은 나쁠 수가 없었다. 정주영은 이제 뜻하지 않는 행운으로 ‘전쟁특수’를 누리는 행운을 잡게 된 것이었다.
무엇보다 미군 숙소가 급선무였다. 미군 병사들이 전선에 배치되기 위해 부산항에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정주영은 일단 학교 교실을 사용하기로 했다. 당시 학교라고 해도 맨 땅에 천막을 친 수준이었다. 정주영은 우선 막사를 소독한 뒤 바닥에 널빤지를 깔고 천막을 새로 수리해 덮는 식으로 임시 숙소를 만들었다. 전쟁통에 더욱 일거리가 몰려들면서 정주영의 현대건설은 그야말로 남모르는 호황을 누려야 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 작전으로 잠시 서울에 돌아가기도 했지만, 다시 1.4후퇴로 정주영은 부산에서 계속 미8군 사령부와 함께 일을 해야 했다. 1.4후퇴 때는 그래도 이전과 달리 부산항 제 1부두 앞에 서무소를 차려 놓고 ‘현대건설’ 간판도 내걸고 일을 할 수 있었다. 하는 일은 미군 숙소는 물론 부두창고 건설, 다시 보수, 댐보수 등 다양해졌다. 정주영의 현대건설을 일을 하면서 갈수록 실력을 쌓아갈 수 있었다.
정주영 회고록에는 당시 공사 가운데 미군 묘역 단장 공사를 하던 일화가 나온다. 정주영의 재치와 불가능은 없다는 그의 신념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일화다. 당시 부산에는 전국 각지에서 전사한 미군 장병들의 묘역이 조성이 돼 있었다. 묘비 등으로 단순하게 꾸며진 수준이었다. 문제는 이 묘비에 유엔 관계자들이 참배를 온다는 연락이 미 8군에 전달된 것이었다. 미 8군 사령부는 긴급히 정주영을 찾았다. 그리고 주문을 했다. “묘지를 깨끗이 단장해주시요. 단 가능한 푸르게 보이도록 풀을 잘 심어주시오.” 정주영은 “알겠습니다”고 답은 하고 나왔지만, 참 암담했다. 그때는 여름이 아니라 한 겨울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손쉽게 사철나무나 사철잔디를 구할 수 있는 시기도 아니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한다.” 며칠을 고민하던 정주영에게 벼락처럼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