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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现代集团与创始人郑周永9】获得解放的祖国领土上,升起了“现代汽车工业社”大旗


       郑周永退出忽洞金矿之后,正在家里愁着“往后做什么”的时候,日本宣布无条件投降,也结束了对朝鲜半岛长达36年的殖民统治。听到祖国解放的消息的那一刻,郑周永的心脏就开始怦怦跳。一直以来,他和他的事业都被压在日本人之下,那是何等的辛苦,又是何等的屈辱呢!郑周永感觉希望的光芒照拂在他的身上。正好他的手里有巨额的资金,是通过之前的事业积攒下来的。那么做什么事业好呢?郑周永开始探讨新的事业机会。 

位于首尔市钟路区的现代建设总部。1950年,郑周永会长将现代汽车工业社和现代土建社合并,成立现代建设株式会社。

 


       获得解放的韩国在享受了短暂的自由之后,很快就陷入了混乱之中。长期流亡在世界各地的解放运动势力大批返回汉城,为了夺权争锋相对,煽动普通老百姓,整个韩国社会陷入混乱。其中,最大的两个势力是右派和左派。这两个政派在“接受信托统治制度”的案件上意见不合,分为正方和反方,几乎每天都在街上游行示威。这时,驻朝鲜美国陆军司令部军政厅已经接手了对韩国社会的控制权,发布了关于敌产问题的法令,宣称向民间出售部分日本人财产。


       郑周永瞧准时机,买下了200坪的敌产土地,一块位于首尔市中区草洞106号的地皮。这是一块杂草丛生的荒地,原有的几间日本人房屋,早已被拆掉。郑周永买下这块土地后,于1946年4月挂上了“现代汽车工业社”的牌子。“现代”这一企业名,终于诞生了。郑周永曾经亲自开大货车,亲手维修汽车,他在汽车产业已有丰富的经验,所以想再一次挑战这个行业。此时,在郑周永身边有他的二弟郑仁永和三弟郑顺永,尤其是郑仁永,帮了大忙。郑仁永说了一口流利的英语,是他帮助郑周永拿到了美军的事业许可。妹夫金永柱也帮了不少忙。另外,郑周永离家出走时借钱的故乡旧友吴寅甫也加入了。


       当时,日军留下了不少老旧的大货车,很多人想把这些汽车改装使用,比如说,将火车的载量从1.5吨扩大到2.5吨,所以郑周永的生意刚开始就门庭若市。由于业务量不断增加,不到一年,现代汽车工业社的职员就由当初的30人发展到了80人。只可惜,全国只有7,000多辆汽车。其中,3,600辆是火车,1,300辆是汽车。也就是说,市场太小,光靠维修或改装汽车的生意,无法做大事业。


       于是,1947年5月25日,郑周永在现代汽车工业社的旁边又挂上了“现代土建社”的牌子,开始做土木建筑业。当时,战后许多房屋需要修缮,而美国要长期在韩国驻军,许多营房、机舱仓库等军事设备也急需修建,刚好郑周永有充足的人力和大货车来做土木建筑事业。就算如此,跳进一个完全陌生的行业,必定不是一个容易的决定。建筑行业投资大,工期长,需要经验和技术,更需要大资金,风险太大。如果是普通人,一想到失败的风险,估计就会往后缩,错过开展新事业的绝佳时机。郑周永是如何鼓起挑战的勇气的呢?

 

1976年,在沙特阿拉比亚朱拜勒港口建设现场的郑周永会长。该建设工程被世界建设行业评为“20世纪伟大的建筑历史”。

 


       “我不管做什么事业,除了90%的‘一定会成功’的信心与10%的‘一定可以让这份事业取得成功’的自信之外,其他的,什么都不想。”这是郑周永会长的《回忆录》中记录着的一段话。“现代土建社”是“现代建设”的母体。从挂上“现代土建社”牌子的那一刻起,郑周永就完全投入到了土地建筑业里,在任何一个工地现场都能看到他的身影。美8军首尔地区司令部是主要客户。郑周永骑着2人乘摩托车,在首尔市各地跑。当时,街上汽车不多,摩托车是移动时间最短的交通工具。郑周永在光华门和平新闻社(如今的“大韩日报”)大楼租了两个房间,作为现代土建社的正式办公室,并把现代土建社的招牌挂到了那里。

 

1948年,现代汽车工业社的职员们。后排左七就是郑周永会长。



       郑周永对这份事业的预感是正确的。不到两年,也就是在1950年,郑周永将现代汽车工业社和现代土建社合并,成立现代建设株式会社,相当于是现代土建社收购现代汽车工业社,并在首尔市中区笔洞1街41番地建了总部办公楼。登记资产为3,000万韩元,正式理事共有6人。就在郑周永雄心勃勃准备大干一场的时候,命运再一次捉弄了他。郑周永的挫折并没有完,比上几次更加严峻的考验即将降临。命运总是像大草原上的一只猛兽,突袭刚踏入成功之道的人。

 

笔者 淸露 图片摘自 现代集团

 

 

现代集团与创始人郑周永(9)

 

 

해방된 조국에서 ‘현대자동차공업사’ 깃발을 올리다 

 

 

정주영이 8.15 해방을 맞은 것은 홀동광산에서 물러나 집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조국을 되찾았다는 소식에 정주영의 심장은 뛰기 시작했다. 그동안 얼마나 일본인 눈치를 보느라 고생했는가? 정말 뭔가 새로운 서광이 비추는듯 싶었다. 특히 정주영은 그동안 사업을 통해 자금도 충분히 쌓은 터였다. 무엇을 하면 좋을까? 정주영이 다시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해방을 맞는 한국은 그러나 잠시의 환호 뒤에 바로 혼란이 찾아왔다. 그동안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세력들이 서로 정치적으로 권한을 잡으려 사람들을 선동하고 나서면서 사회적 혼란은 더욱 심화했다. 가장 큰 세력은 우파와 좌파였다. 둘은 신탁통치를 놓고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거의 매일 거리에서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한국 사회 통제권은 이제 일본의 손에서 미군정청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정주영이 적산대지 200평을 불하 받은 게 이 시기다. 미군정청 산하로 발족한 신한공사가 일본인들이 허겁지겁 떠나가면서 버려 놓은 재산을 관리하고 있었다. 중구 초동 106버지의 땅이었다. 원래 일본인 주택이 있었지만, 집들이 헐리고 빈 땅만 덩그러니 있었다. 1946년 4월 정주영은 이 땅을 산 뒤 ‘현대자동차공업사’ 간판을 내걸었다. 드디어 현대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정주영은 직전 트럭 운반, 자동차 수리 등으로 자동차 연관사업에서 경험을 쌓은 만큼 자동차로 승부를 보고자 했다. 사업 초기 가장 큰 힘은 아우들이었다. 둘째 정인영과 셋째 정순영의 도움이 컸다. 정인영은 유창한 영어로 미군 사업을 따내는 데 힘을 보탰다. 김영주의 역할도 컸다. 그는 이미 정주영 여동생과 결혼해 매제가 된 상태였다. 고향 친구로 가출 자금을 도와줬던 친구 오인보도 합류했다.

사업을 초기 성황을 이뤘다. 당시 일제가 버리고 간 헌 트럭이 적지 않았는데, 이를 정주영 공장에 맡겨 구조를 바꿔 이용하려는 이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1.5톤 트럭을 수선해 2.5톤 트럭으로 바꾸는 작업이었다. 불과 1년 남짓한 시간, 정주영의 공장은 종업원만 80명으로 늘어난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자동차는 전국 7000여대에 불과했다. 그중 3600대가 화물차, 1300대가 승용차였다. 간단히 말해 자동차 수리만으로는 그 시장이 워낙 적어 승부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주영은 수리센터가 안정을 찾으면서 1947년 5월 25일 바로 ‘현대토건사’라는 회사 간판을 내걸고 토건업을 시작한다. 어차피 인력도 있고, 물건을 실어 나를 트럭이 있었다. 일감은 당시 미군청에 쌓이고 쌓인 상태였다. 그래도 전혀 생소한 일에 과감히 뛰어드는 판단이 쉬운 일이었을까? 분명히 일반인에게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건축일이라는 게 한번 문제가 되면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까먹을 가능성도 컸기 때문이다. 일반인이었다면, 처음에 성공할 장미 빛 꿈만 꾸다 막상 일을 시작하려 할 때는 실패할 두려움에 결국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만다. 그럼 정주영은 어떻게 그런 평범의 한계를 넘었을까?

“나는 무슨 일을 시작하든지 ‘된다’는 확신 90%와 ‘반드시 되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 10% 외에 다른 쓸데 없는 생각은 갖지 않는다.” 훗날 정주영 고 명예회장의 회고다. 그렇게 해서 훗날 현대그룹의 모태가 되는 현대건설이 창립된다. 토건업을 시작하면서 정주영은 토건업에 전적으로 매달렸다. 현장에는 항상 정주영이 있었다. 미8군 서울지구사령부가 중요한 출입처였다. 이때 정주영은 2인승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당시 차도 거의 었던 시절이다. 오토바이야말로 기동력이 가장 우수한 이동 수단이었다. 정주영은 현대토건사만을 위한 사무실도 마련. 서소문 평화방송(현 대한일보) 건물이었다. 방 두 칸 규모 사무실이었다.

정주영의 예상은 정확히 맞았다. 토건업은 알짜 수익을 내는 사업이었다. 사업을 시작한 지 2년여가 지나 정주영은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한다. 1950년 들어서 일이다. 토건부분이 자동차 수리공장을 인수 합병하는 형식이었다. 중구 필동 1번가 41번지에 본사 사무실도 차렸다. 자본금은 3000만원였고, 이사도 6명으로 늘었다.

이제 본격적인 성공 가도만 달리면 일이었다. 그러나 운명이 어찌 그리 쉬울까? 정주영의 고난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고난보다 더 격한 고난이 남아있었다. 운명의 항상 초원의 맹수처럼 그렇게 평범한 이들을 덮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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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드라마 막장형 늘어나며 사회 속에 여성혐오 싹 키워
동영상 홍수의 시대다. 현실을 보다 극적인 현실로 묘사하는 과거와 달리 최근 드라마는 극적인 비현실이 특징이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비현실을 통해 현실의 불만을 대리 만족시켜주는 것이다. 마약이 주는 환상과 다를 게 없다. 아쉽게도 이 쾌감은 역시 극적이어서, 쉽게 중독되고 만다. 더욱 문제는 이 비현실을 현실로 착각하는 착란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 중국에서는 이 같은 드라마의 ‘비현실’성이 논란이 되고 있다. 비현실적 여성 캐릭터들에 대한 묘사는 현실 중국사회에 여성 혐오증을 양산할 수 있다는 우려를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미니 드라마를 본 후, 우리 엄마는 주변에 악독한 며느리가 있다고 확신했다.” 최근 한 중국 매체는 이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는 비현실 드라마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보도에 따르면, 허난성 난양시에 사는 리 씨는 어머니가 **《○○ 시어머니, 모두를 놀라게 하다》**라는 미니 드라마를 보고 나서 태도가 변했다고 밝혔다. 해당 드라마는 강인한 시어머니가 악독한 며느리와 맞서 싸우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이를 본 후 어머니는 “그동안 며느리가 보였던 정상적인 태도는 다 연기였고, 악독한 며느리 주변에는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