郑周永战胜火灾的挫折之后,重开了“阿道服务中心”。他的事业如日中天,生意越做越好,给他带来了极大的利润,借的钱早已连本带利地还给债主,甚至踏上了汽车维修业少有的富豪之路。然而,“好事多磨”,命运又一次把郑周永推向了破产的边缘。这次的挫折也是预想不到的。之前,郑周永经营的大米店受日本侵华战争的影响,只好在一夜间全部关掉。同样的事情再一次发生了。1941年,日本发动了太平洋战争,以满洲与太平洋一带为战线,大力展开激烈的战争,导致严重缺乏军用物资,开始从殖民地的朝鲜半岛上强制调动资源。
收购起亚汽车之后,郑周永会长访问华城市工厂(1999年)。收购起亚汽车,是以提升韩国汽车产业结构为目的而发起的另一个事业挑战。
郑周永的“阿道服务中心”也被殃及。有一天,日本当局公布整备令,他的“阿道服务中心”不可避免地与当时的日进工作所合并。那个日进工作所就在“阿道服务中心”附近的新设洞。郑周永只好眼睁睁地看着自己所努力的一切被无情地夺走。那时郑周永28岁,也就是1943年。
虽然造化弄人,但郑周永觉得他不能这样放弃。为了靠他养活的家人,必需要找出新的机会。他天生勤奋,做事不会怨天尤人,会靠自己的努力,不断艰苦奋斗。他试图找到有关军需的事业机会。当时,日本强制调动的不只是朝鲜的物资,还有朝鲜的年轻人。男的被强制派到军队或劳动所;女的被强征为日军的慰安妇。郑周永不仅要找到做军需事业的机会,还要逃过强制征用。然而,郑周永和他的弟弟们,都是日本垂涎的人才。
1976年,现代汽车蔚山市工厂。
好在郑周永通过汽车维修业结识了不少日本高官。利用这份交情,郑周永拿到了运输矿石的生意,需要将在黄海道遂安郡忽洞的金矿里挖到的矿石,运到平壤仙桥里的大同江。当时,这条路沿着“彦真”和“灭恶”两个大山脉绵延而下,路况非常糟糕,许多地面险象环生,途中汽车发生故障是常有的事情。郑周永的团队虽然善长维修汽车,但运输过程十分凶险,一旦发生事故,就很有可能丧命。这已经不是金钱上的问题了。郑周永做了两年的运输事业,但他一直在寻找一个退出的契机。正好,有个人想要接下这份活,郑周永立即把车队以及合同转让给了那个人,头也不回就退出了。
.1930年末,郑周永公司旗下的货车。
玄机不可捉摸。回到家的郑周永正愁着“往后做什么”的时候,老天赐予了他新的事业机会。郑周永退出运输事业的三个月后,日本战败投降了,朝鲜获得解放,日资产业全部关闭。更巧的是忽洞金矿的事情。日本政府直营的忽洞金矿,在战败之后,被苏联军占领,所有在金矿里工作的日本人和其他劳动者都被俘并带到了苏联。如果郑周永继续在忽洞金矿做军需运输事业,很有可能遭到同样的命运。只要不断努力、奋斗,老天总会开辟新的道路。
立于首尔峨山医院的郑周永会长铜像。
笔者 淸露 图片摘自 现代集团
现代集团与创始人郑周永(8)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쓸리다.
정주영이 화재의 불행을 딛고 새로 문을 연 아도서비스센터는 그야말로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그 뒤 세월은 정주영에게 말 그대로 장미빛 인생이었다. 당시 정주영과 비슷한 처지의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부를 쌓기 시작했다. 사업자금으로 빌려던 돈도 높은 이자를 쳐서 모두 갚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하지 않았던가? 정주영의 시련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역시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곳에서 왔다. 앞서 정주영은 쌀가게로 성공을 했다 일본의 만주침략이 가속화되면서 가게를 빼앗긴 적이 있었다. 같은 일이 이번에도 발생한 것이다. 이번엔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 탓이었다. 만주와 태평양의 두 전선에서 싸우게 되면서 일본은 물자가 급격히 부족하게 됐고, 식민지 조선의 모든 자원을 전쟁물자로 동원하기 시작했다.
정주영의 아도서비스센터에도 불똥이 튀었다. 어느 날 갑자기 총독부로부터 “모든 공장 자산을 일진공작소에 넘기라”는 통보가 왔다. 일진공작소는 정주영의 아도서비스센터가 있는 신설동에 위치했다. 다시 정주영은 두 눈을 멀쩡히 뜨고 피와 땀으로 가꾼 일터를 빼앗긴 것이다. 그의 나이 28세, 1943년의 일이었다.
정주영은 낙담만 할 수는 없었다. 먼저 딸린 식구들을 위해 무엇인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부지런 하기로 유명한 정주영은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셔 병이 나는 체질이었다. 정주영은 가능한 군수(軍需)분야의 일을 찾으려 했다. 당시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물자만 탐내지 않았다. 조선의 젊은이들, 남자는 군과 노역으로, 여자는 위안부로 강제 징용을 했다. 정주영은 가능한 군수 사업을 하면서 강제 징용도 피하고자 했다. 본인 뿐 아니라 동생들과 직원들은 일본이 탐을 내는 부지런한 일꾼들이었다.
다행히도 정주영은 자동차수리공장을 하면서 많은 일본 고관들을 알고 있었다. 친분을 이용해 따낸 일이 황해도 수안군 홀동금광에서 캐낸 금광석을 평양 선교리의 대동강까지 운반하는 일을 맡았다. 당시 이 길들을 언진(彦眞)과 멸악(滅惡) 산맥이 겹치는 고갯길이 굽이굽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보통 자동차는 제대로 가지도 못하는 곳이었다. 가다가 고장 나기 일쑤였다. 정주영과 일행은 자동차 수리에 밝아 일을 맡았지만, 매번 운반을 할 때마다 위험은 언제든 한번 사고가 나면 목숨을 내놓아 할 정도였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정주영은 2년간을 이 일을 했다. 일을 하면서 그만 둘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을 때 마침 새롭게 일을 맡아 보겠다는 이가 나타났다. 정주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털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이란 참 알 수가 없다. ‘이제 뭘 하나?’ 하며 일면 안도와 일면 실의에 빠졌던 정주영에게 세상은 또 다시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일본이 전쟁에 패해 항복을 선언한 것이었다. 조선은 하루아침에 해방이 됐다. 더욱 운명이다 싶은 것이 홀동금광의 일이다. 일본 정부의 소유였던 이곳에서 일을 했던 모든 일본인과 부역자들은 당시 38이북을 점령한 소련군의 포로가 돼 소련으로 끌려갔다. 정주영이 사업에 손을 뗀 지 불과 3개월이 지났을 때 일이다. 만약 정주영이 계속을 일을 했다면 주요 전쟁물자인 광석 운반 책임자였던 만큼 아마 그 뒤에는 시베리아에서 강제 노동을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노력하는 자에게 하늘은 길을 열어주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