才23岁就成为米店老板的青年郑周永,对未来充满梦想与期待。郑周永有了一定规模的米店,任谁都会羡慕。只要好好经营管理,那家米店就能发展成稳定的事业,就算把乡下的所有家人都接过来,也足以过上舒适的生活。郑周永早已胸有成竹。当送货员的时候,已经结识了碾米厂等老客户。郑周永把米店移到新堂洞的大街边,换上了“京一商会”的招牌,一展“成为首尔第一店”的抱负。
天有不测风云。卢沟桥事变爆发,郑周永的梦想彻底被打破了。日本发动了全面侵华战争后,朝鲜成了日本侵华的重要战略基地,日本总督府开始在朝鲜搜刮战争物资。大米是最为重要的战争物资之一。战争初期,日本总督府只是控制粮食的供给量和流通过程,但到了1939年,战线不断扩大,总督府干脆严禁粮食买卖,实行“粮食配给制”。也就是说,市场不再需要米店。不只是郑周永的米店,朝鲜半岛上所有的粮食店都在一夜之间关门了。
1999年,郑周永会长收购起亚汽车之后,访问了华城市工厂。郑周永会长年仅25岁就开始做的修理汽车业,为日后现代汽车纵横世界打下了基础。
郑周永离家出走四次、在工地上做重活取得的小成功,就这样成了泡沫。当然,也不是一切都成了泡沫。郑周永经营的米店,有大家都羡慕的规模,所以把米店关掉之后,还剩下了不少钱,相当于工薪阶层两三年的薪水。
郑周永先用一部分钱给父亲买了农地。当时,郑周永接受父亲的建议,与边仲锡结了婚。边仲锡出生于郑周永的故乡峨山里的邻村“玉马里”,比郑周永小六岁,长相俊俏,性格温顺,其爷爷是松田面的面长,家世也很好。
郑周永迫于现实,不得不关掉米店,但他并没有绝望,也没有因此而停下向前的步伐,他相信,假以时日,养精蓄锐,总会有再次崛起的机会。“除了米店外,还有什么可以赚钱的生意呢?”这个问题,不容易找到正确的答案。战乱时期,到处都是废墟和难民,但混乱的背后时
常隐藏着产业变化的趋势。侵华战争期间,朝鲜半岛虽无战争的直接影响,但被日军无情地剥夺,朝鲜老百姓的生活实在是贫穷,根本谈不上什么经济发展。
1953年,郑周永会长在避难地的釜山市与夫人边仲锡一起合影。
在这样的情形下,郑周永开始感到不安。关掉米店已有一年多了,虽然手里有不少现金,但还是没有可以投资的事业,未来还是不稳定。这时,郑周永找到了一个更能赚钱的行当,就是修理汽车。当时,郑周永25岁。他发现,在战争年代,汽车修理业是投资少、利润高的行业。先不说郑周永手里的现金,他还有健康壮实的身体。
再加上,他通过米店结识了几位可靠的赞助人。其中,吴润根借给郑周永的资金最多。吴润根有碾米厂事业和高利贷事业,他已经通过粮食交易看到了郑周永的可能性,所以按“一个月三分”的利息借钱给郑周永。利息确实比较高,但当时郑周永还年轻,资历不够,信用度也高,所以吴润根肯借钱给他,已算是很讲义气了。还有一位重要的赞助人,叫做“李乙学”,是当代著名的汽车维修师。不像现在,当时根本就没有广告的概念,但李乙学维修汽车的技术非常好,在整个首尔市都很有名气。李乙学为郑周永亲自投资并大力宣传,郑周永的汽车工厂很快就由赤字变为盈利。但世上怎么会有免费的午餐呢?好事总是多磨,老天不断给郑周永挫折,仿佛在说:“关掉一个米店,你还不死心啊?”
郑周永会长的第一份事业,“京一商会”所在的新堂洞。
笔者 淸露 图片摘自 现代集团
现代集团与创始人郑周永(6)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23세의 젊은 나이 누구나 부러워하는 쌀가게 주인이 된 청년 정주영은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이미 누구나 부러워하는 수준의 사업체를 가진 상태다. 잘만 경영하면 순식간에 시골을 가족을 모두 데려와도 될 정도로 안정된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정주영은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 배달 점원을 하면서 쌀을 공급받는 정미소에서 지역 소비자들까지 모두 한 손에 장악하고 있었다.
정주영은 신당동 큰 길가로 점포를 옮기고 가게 이름을 ‘경일상회’(京一)로 바꿨다. 서울에서 제일가는 가게가 되겠다는 포부였다.
그런데 봄날의 꿈이었을까? 정주영의 부풀었던 포부는 만주사변이 발발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만다. 만주사변이 중일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일본 총독부가 전시물품 동원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쌀은 가장 중요한 보급품 가운데 하나였다. 총독부는 처음에 물건의 양과 유통 과정을 통제하는 정도에 그치더니 1939년 전선이 확대되자, 아예 양곡의 시장판매를 금지하기에 이른다. 대신에 양곡 보급제를 도입했다. 한마디로 쌀가게가 필요 없어진 것이다. 정주영의 경일상회 뿐 아니라 전국의 모든 쌀가게가 하루아침에 문을 닫고 말았다.
결국 정주영이 4번째 가출에 성공해 공사판을 전전하며 겨우 일군 작은 성공이 이렇게 물거품으로 변한 것이다. 물론 모두가 물거품으로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당대 모두가 부러워했던 쌀가게를 경영했던 정주영이었다. 가게를 정리하고 나니 적지 않은 돈이 남았다. 웬만한 월급쟁이 2~3년 월급은 족히 되고 남았다.
우선 정주영은 일부 돈으로 농지를 사 부친께 드렸다. 당시 정주영은 부친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미 결혼도 한 상태였다. 신부는 고향 아산마을의 이웃 동네인 옥마리에 살던 수더분한 변중석(邊仲錫)이란 여인이었다. 정주영 보다는 여섯 살이 아래였고, 성격이 수더분하고 고왔다. 할아버지가 송전면장을 지냈을 정도로 학식도 있는 집안이었다.
뜻하지 않은 상황 속에 쌀가게를 정리했지만, 정주영은 그로 인해 좌절하거나 손에 든 작은 결실에 만족하지 않았다. 숨을 죽이고 다음 계획을 세웠다. ‘쌀가게 말고 무엇을 해야 돈을 벌 수 있을까?’ 답을 찾기 쉽지가 않았다. 때는 중국 대륙은 전화의 포연으로 가득하고, 곳곳에 난민이 들끓었지만 그 파괴의 뒤편에는 새로운 변화의 거대한 물결이 있었다. 변화의 물결은 전쟁의 혼란을 조금씩 삼키고 있었다. 반면 한반도는 다행이 전화(戰禍)는 피해 있었지만, 너무나 가난해 오히려 변화의 물결에서도 벗어나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 쌀가게를 정리한 지 1년 여가 훌쩍 지났다. 정주영은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수중에 현금은 있었지만, 쓰이는 곳만 있지 버는 곳이 없었다. 그 때 정주영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자동차 수리 공장이었다. 그의 나이 25세 때다. 무엇보다 당시 자동차 수리 공장은 수요에 비해 너무 적어 일감이 끊이지 않았다는 점이 정주영의 마음을 움직이도록 했다. 정주영에는 현찰보다 건강하는 몸이 더 큰 자산이었다. 무엇보다 정주영에게는 몇몇 든든한 인물의 후원이 있었다. 모자란 자금은 쌀가게를 하며 신용을 쌓았던 오윤근(吳潤根)이라는 인물이 대줬다. 정미소를 경영하면서 고리대금업을 했고, 정주영에게 월 3푼 이자로 선뜻 돈을 빌려줬다. 이자는 높았지만, 누가 있어 어린 정주영을 믿고 돈을 빌려줬을까?
또 다른 인물은 이을학(李乙學)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당대 유명한 자동차 수리 기사였다. 요즘처럼 광고 홍보 미디어가 없던 시절 이을학은 정비 경력을 통해 서울에서 당당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을학이라는 인물이 투자도 하고 직접 나서 주면서 정주영이 손댄 자동차 공장도 일감이 끊이지 않게 됐다. 그러나 어디 하늘이 마음 좋은 이웃 아저씨 같은 적이 있었던가? 오히려 심술쟁이처럼 하늘은 정말 뜻하지 않은 시련을 정주영에게 던져준다. 마치 “너 쌀가게 정도로는 정신 못차리지?”하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