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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现代集团与创始人郑周永5】在工地上得到人生教训,在大米店接受经营训练……


       从首尔到仁川,再从仁川回到首尔。18岁终于出走成功的郑周永,又回到了大城市首尔,但他的生活还是没能安定下来,只是换了一个干重活的工地而已。郑周永虽然在工地上学到了不少,但总不能一辈子都打短工。那样拼死拼活地干活,也只能勉强糊口,与做农活没什么区别。“不能这样下去了。”郑周永虽年幼,但本能地感觉到了危机。

 

名誉会长郑周永访问了现代重工业现场,正与职员们谈话。(1983 年)


       正好,首尔仁岘洞的一家大米店急着招人。此前,郑周永在龙山附近的丰田麦芽糖工厂当了一名“杂役”,就是跑腿打杂的小工。这次大米店招的是正式的送货员,是待遇比较好的工作。这家米店叫做“福兴商会”。这份工作比较稳定,又管午餐和晚餐,工资也比较丰厚,郑周永的生活终于得以安顿。住宿的地方就更不用说了,不像之前满是跳蚤和臭虫的工地宿舍,米店的宿舍宽敞又舒适。在这家米店工作之后,离家出走的郑周永,第一次,睡了个好觉。
       那是1934年,是郑周永19岁的那一年,也就是他离家出走满一年的时候。做米店的送货员还有一个优点,就是可以接触到各种消息,进一步了解到社会变化的各个领域。郑周永通过他在故乡读 报纸的经历,深知消息的重要性。
       当时,首尔市政府正忙着维修鹭梁津附近的汉江人行桥。汉江人行桥设于1917年,但由于1925年的大洪水,桥的中间部分被激流卷走了。另外,从东大门到清凉里的车线扩增,来往首尔的交通量也增多了。郑周永住在东崇洞骆山的山村里,每天步行上班。仁岘洞位于首尔明洞的正对面,东崇洞则位于如今的大学路附近,所以按成年男生的平均步伐,走路至少需要四五十分钟,这绝不是一段短距离。然而,郑周永还是坚持每天步行上班。

 

展于蔚山现代重工业峨山纪念展览室的郑周永模型,他正骑着自行车送米。这个送货员的工作对郑周永的人生意义重大。


       福兴商会的老板是年过六甲的李景诚。当时,米店的收益普遍都很好。郑周永很勤劳,加上他力气很大,很快就成了首尔市出了名的大米送货员。那个年代,自行车是送大米唯一的交通工具,但整个城市只有郑周永能用自行车一次载两袋大米,因为他刚开始学自行车的时候,就十分重视载大米之后保持平衡的方法,从而掌握到了独特的骑法。
       郑周永干了一天的活儿之后,也不忘阅读新闻,努力了解社会的各个领域。郑周永在大米店干活勤奋,深得老板赏识,后来干脆把店里的账本都交给他管理。当时,米店老板有一个与郑周永同年的儿子,那个儿子天生游手好闲,对经营毫无兴趣。拿到新的工作之后,郑周永的月薪自然也提高了,一个月1.5袋大米,也就是一年18袋大米,相当于是2000多坪土地产出来的大米。这是郑周永老家做梦都想不到的高收入。这时,郑周永离家出走已有三年了。

 

30年代中期,与米店福兴商会的老板娘一起拍照的青年郑周永。

 

       郑周永终于有了和家人联系的勇气。他立即拿起笔来,“父亲,对不起。这不孝子现在才写信……”郑周永把这三年以来的经历与成就都详细地告诉了父亲。父亲听到大儿子的消息后非常高兴,立马回信道:“我的大儿子真的出人头地了啊。听到你的消息,我真的很高兴。”郑周永在米店的成功不止这些。没过多久,老板李店主干脆把米店交给了郑周永,因为他儿子不适合经营这家米店。“周永,你来负责这家店,让它发展起来吧。”这可真是天上掉下来的机会,郑周永没有理由拒绝。成为米店的老板,意味着“一年20袋大米根本就不是个问题”。勤劳诚实的郑周永在许多客户那里已经有很好的信誉,周围的碾米厂都愿意赊账销售大米,收购大米的顾客也愿意继续与郑周永交易。那一年是1938年,年仅23岁的郑周永感觉自己已踏上了成功的轨道。但郑周永人生中“真正的挫折与苦难”才刚刚开始。


笔者 淸露 图片摘自 现代集团

 

 

现代集团与创始人郑周永(5)

 

막노동판에서 인간사 교훈을,

쌀가게에서 경영자 훈련을….

 

서울에서 인천으로 인천에서 다시 서울로, 이렇게 결국 가출에 성공한 18세의 정주영은 다시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다고 안정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서울과 인천의 막노동판을 전전했을 뿐이다. 막노동판에서 배운 것도 많았지만, 계속 막노동만해서는 될 일이 아니었다. 겨우 입에 풀칠하는 정도라면 농사일이랑 다를 것이 없었다. “이거 이래서는 안된다” 어린 정주영이지만 위기감이 가슴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마침  서울 인현동 쌀가게에 일자리가 생겼다. 정주영은 그 전 1년간 원효로 물엿 공장에서 견습공으로 일을 했었다. 견습공은 말 그대로 일을 배우는 단계로 잔심부름꾼에 불과했다. 점원이면 그나마 조금 더 안정적인 자리였다. 가게이름은 부흥상회였다. 가게에서는 점심과 저녁을 줬고, 월급도 나쁜 편은 아니었다. 정주영은 그제야 서울에 와서 처음으로 마음을 놓는다. 말 그대로 두 다리를 뻗고 자기 시작한 것이었다.

잠자리도 이와 벼룩이 득실거리던 막노동꾼들의 것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좋았다. 때는 1934년, 정주영의 나이 19살, 가출한지 만 1년이 되는 시점이었다. 쌀 배달의 또 다른 장점은 세상 물정을 빠르게 접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서울 곳곳에 쌀을 배달하다 보면, 별의별 소식을 자연히 접하게 되는 것이었다. 정주영은 이미 세상물정의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시골에서부터 체험하고 있었다.

당시 서울에서는 1934년 한강 인도교 노량진 쪽 부분 보수공사가 화제였다. 한강 인도교는 1917년 개통됐지만 1925년 대홍수로 중간 부분이 휩쓸려 떠 내려간 상태였다. 또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정차선이 한 줄 더 깔려 복선으로 운행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정주영은 동숭동 낙산의 산동네에 살면서 쌀 가게까지 걸어서 출퇴근을 했다. 인현동은 서울의 명동의 맞은 편에 있다. 동숭동은 대학로로 유명한 곳이다. 젊은 걸음으로 걸으면 4,50분 가량, 결코 짧은 거리는 아니다. 정주영은 이 거리를 매일 걸어서 출퇴근을 했다.

부흥상회는 당신 예순 중반에 들어선 이경성 영감이 키운 가게였다. 당시 쌀가게는 웬만한 가내 수공업 공장보다 벌이가 좋았다. 정주영은 요령도 좋았고, 힘도 좋아 당장 쌀 배달로는 지역에서 알아주는 명수가 됐다. 당시 자전거는 쌀 배달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는데, 지역에서 정주영만이 자전거에 쌀 2가마를 싣고 배달을 했다. 처음 자전거 배달을 배우면서 쌀 가마 균형 잡는 법 등에 주의하며 요령을 깨우친 덕이었다.

정주영은 하루 종일 일을 뒤에 신문을 보며 사회 공부하길 멈추지 않았다. 성실한 정주영은 이 영감의 신임을 금방 얻을 수 있었다. 가게의 회계 업무도 정주영에게 바로 맡길 정도였다. 당시 이 영감에게는 정주영과 동갑의 아들이 있었지만, 그 아들은 가게 운영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정주영의 월급도 자연히 쌀 한 가마 반으로 급속히 올랐다. 연봉으로 치면 쌀 20가마 정도였다. 이는 당시 농사로 이야기 하면 논 2000평을 가꿔야 가능한 일이었다. 시골 정주영 집안에서는 꿈도 못 꾸던 일이었다. 정주영이 가출한지 3년이 지난 정도의 일이었다.

정주영은 드디어 집안에 소식을 전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바로 펜을 들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불효자식 이제야 글을 올립니다.” 정주영은 그간의 소식을 정리해 부친에게 알렸다. 그리고 현재 자신의 상태도 상세히 전했다. 부친도 큰 아들 소식에 반가워 하며 답을 보냈다. “우리 큰 아들 출세를 해도 크게 출세를 했구나. 네 소식을 들으니 너무나 기쁘다.”

정주영의 쌀가게 성공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부흥상회 주인 이 영감이 쌀가게를 아들 대신 정주영에게 물려준 것이다. 아들에게 물려줘봐야 결국 망할 것이라는 게 이 영감의 판단이었다. “주영아, 네가 맡아서 가게를 더 키워다오.” 정주영으로서는 마다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쌀 가게 주인이 되니, 이제 연 쌀 20가마 정도가 문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정주영은 그 특유의 성실함 때문에 부흥상회 거래처들로부터 아주 돈독한 신뢰를 얻고 있었다. 주변 정미소들 외상으로 쌀을 얼마든지 대주겠다고 했고, 소비처들 역시 정주영이라면 계속 믿고 거래를 하겠다는 약속을 한 상태였다. 이 때 정주영의 나이 23세, 이제 정말 성공의 길에 들어선 것만 같았다. 그러나 훗날 성공한 정주영이 시련이라 부른 진정한 시련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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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드라마 막장형 늘어나며 사회 속에 여성혐오 싹 키워
동영상 홍수의 시대다. 현실을 보다 극적인 현실로 묘사하는 과거와 달리 최근 드라마는 극적인 비현실이 특징이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비현실을 통해 현실의 불만을 대리 만족시켜주는 것이다. 마약이 주는 환상과 다를 게 없다. 아쉽게도 이 쾌감은 역시 극적이어서, 쉽게 중독되고 만다. 더욱 문제는 이 비현실을 현실로 착각하는 착란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 중국에서는 이 같은 드라마의 ‘비현실’성이 논란이 되고 있다. 비현실적 여성 캐릭터들에 대한 묘사는 현실 중국사회에 여성 혐오증을 양산할 수 있다는 우려를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미니 드라마를 본 후, 우리 엄마는 주변에 악독한 며느리가 있다고 확신했다.” 최근 한 중국 매체는 이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는 비현실 드라마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보도에 따르면, 허난성 난양시에 사는 리 씨는 어머니가 **《○○ 시어머니, 모두를 놀라게 하다》**라는 미니 드라마를 보고 나서 태도가 변했다고 밝혔다. 해당 드라마는 강인한 시어머니가 악독한 며느리와 맞서 싸우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이를 본 후 어머니는 “그동안 며느리가 보였던 정상적인 태도는 다 연기였고, 악독한 며느리 주변에는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