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의
그런 도를 따르면
있음에는
반드시
없음이 따름을 알고,
그 없음이 있어,
비로소
있음의 존재 값이
정해짐을 안다.
그래서 이 도리를 알고
따르는 이는
있음을 통해
없음을 알고
없음의 유용함을 안다.
있음의 가치를 안다.
그렇게 있고, 없음이 어울려
성장하는 게
만물이 성장하는 이치다.
없음에 힘써
있음이 쓰이도록 하는 걸
우리는
“공(功)을 이뤘다” 한다.
없음에 힘쓰니
뭘 한다
말할 게 없고,
그래
공을 이뤘다고
뭘 했다
말 할 게 없다.
말하지 않았다고
위하지 않은 게
아니다.
말 보다
행동으로 위하고
때로는
행동하기 보다
참고 지켜봄으로써
위하는 게
진정한 위함임을 안다.
진정한 사랑이 놓아줄 수 있는 사랑이듯,
진정한 위함은
유로써
또 무로써
다함이라는 것을 안다.
그저
있음(有) 앞(前)에
없음(無)을 있어
순서가 생기고
원형의 세계에서
앞뒤가
계속 나가
언젠가
내 앞에 있는 뒤를
만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노자는
시작을
시작이라 하지 않고
그 끝을
끝이라고도 않는다.
시작이 없으니
끝도 없다.
오직 머물지 않아야,
떠남도 없는 것이다.
“是以圣人居无为之事,行不言之教,万物作而弗始也,为而弗志也,成功而弗居也。夫唯弗居,是以弗去。”(시이성인거무위지사, 행부언지교, 만물작이불시야, 위이불지야, 성공이불거야, 부유불거)
"고로
성인 무로써 위함을 다하고
말없이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이 작용하도록
조작한 적도,
뜻대로 움직인 적도 없으니
만물이 성장한들
내 몫이라,
내 영향이라
할 게 있는가?
처음부터 그렇게
지켜만 봤으니
앞으로 지켜만 볼 뿐이다.
머물지 않았는데,
어찌 떠난다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