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조언을 들어 보다 나은 결정을 한다. 인류가 발전을 하는 가장 중요한 기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소통이다. 하지만 조언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아니 들었으면 좋았을 조언도 많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천려일실’(千慮一失:천 번을 생각해 한 번 실수할 때가 있다)하고 아무리 모자란 사람도 ‘천려일득’(千慮一得:천 번을 생각해 한 번 옳을 때가 있다)의 순간이 있는 법이다. 그럼 조언을 들을 때는 어떤 것을 듣는 게 좋을까. 전국책에 다음과 같은 고사가 있다. 하루는 진나라 무왕이 명의 편작을 만났다. 무왕은 편두통과 같은 증세를 앓고 있었다. 심한 두통이 오곤 했다. 편작은 당대 최고의 의사다. 죽지만 않으면 고치지 못하는 병이 없다고 했다. 무왕이 증세를 설명하자, 편작이 고쳐보겠다고 했다. 시술을 앞두고 이번엔 왕이 신하들과 상의를 했다. “그래 편작이 고쳐준다는 데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무왕의 말에 신하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대왕의 병은 귀 앞과 눈 아래에 있습니다. 치료한답시고 잘못하다가는 오히려 귀가 멀거나 눈이 멀지도 모릅니다.” 신하들의 말에 겁이 난 무왕이 편작을 다시 만났다. “대신들의 걱정이 참으로 많소. 어쩌면 좋겠
잘 나가던 이를 무너뜨리는 것은 쉽다. 단순하다. 단지 사람들이 잘 모를 뿐이다.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를 곤궁에 빠뜨리는 일을 자초하기도 한다. 전국시대 장의(張儀)의 이야기다. 장의는 진나라 혜왕 때 중용됐다. 당대 최강국에서 중용되니 주변국들이 모두 장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장의의 가벼운 말 한마디에도 남다르게 반응했다. 바로 잘 나가는 사람이 일을 잘하게 되는 원인 가운데 하나다. 뭘 해도 남들의 반응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국책에 나오는 장의는 참 못된 이였다. 자기 주변에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있으면 배척을 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원한을 많이 샀다. 혜왕이 죽자, 많은 이들이 장의를 궁지에 몰아넣고 싶었다. 특히 당대 권력자 가운데 하나였던 공손연이 그랬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단숨에 장의를 곤궁에 몰아넣을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혜왕이 죽어 장의의 배경도 사라졌지만 그래도 장의는 여전히 혜왕의 후광을 입어 진나라에서 힘을 쓰고 있었다. 고민하던 공손연에게 이수라는 사람이 그 방법을 알려줬다. "감무를 위나라에서 불러들이고, 공손현도 한나라로부터 불러들이십시오. 그리고 은거하고 있는 저리질을 불러 국정에 기용하십시오. 이 세
중국 전국시대는 모략의 시대다. 적국과 정적을 해하기 위한 각종 모략이 판쳤다. 읽다보면 모골이 송연할 정도다. 진나라의 천하통일 기틀을 다졌던 장의도 마찬가지다. 하루는 장의가 정적을 제거하려고 모략을 썼다. 정적의 이름은 서리질이라는 인물이다. 그런데 엉뚱하게 장의는 서리질의 직위를 높여 초나라 사신으로 가도록 돕는다. 그리고 초나라 왕에게 서리질을 진나라 재상이 되도록 지원하도록 했다. 초나라에서 왕이 성대한 잔치를 벌여 서리질을 접대하고, 진나라 미래의 재상이라 치켜세우는 일이 벌어졌다. 진나라에 머물던 초나라 외교관들은 일제히 서리질이 재상감이라고 진나라 왕에게 알렸다. 하지만 모든 게 장의의 술수였다. 장의는 초나라 사신들이 나서기 전에 진나라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서리질이란 자는 무거운 책임을 지고 초나라 사신으로 간 자입니다. 그것은 국교를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자가 초나라에 있어서인지 초왕에게 자기를 후견인으로 삼고, 진나라의 재상 자리를 탐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가 재상이 되면 진나라를 섬기겠습니까? 초나라를 섬기겠습니까?" 진나라 왕은 대노했고, 서리질이 오기만 하면 문책을 하려고 했다. 진나라에 머물던 초나라 사신을 통해 이 사실
전국시대 진나라가 천하 패권의 토대를 닦은 것은 촉나라를 합병한 뒤다. 만사가 그렇듯 키우기 위해서는 틀부터 키워야 하는 법이다. 당시 진나라의 군세는 이미 천하의 각 제후국을 압도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진나라는 천하를 갖기에는 아직도 미흡했다. 두 나라의 연합군을 상대하기 벅찼다. 즉 진나라가 다른 한 나라를 병합하려 하면 이웃나라와 힘을 합쳐 대항하면 됐다. 진나라 때문에 이웃나라끼리 힘을 합치는 외교가 빈번했다. 진나라가 천하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보다 압도적인 힘의 우위가 필요했다. 진나라 혜문왕 때의 일이다. 혜문왕은 전국시대 진나라의 26대 국군(國君)이자 초대왕이다. 당시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위해 당시 진나라에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한(韓)나라를 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촉(蜀)을 치는 것이었다. 한나라는 크고, 촉은 작고 힘은 없지만 토산물이 많은 곳이었다. 전자는 장의가 주장했고, 후자는 사마착이 주장했다. 혜문왕 앞에서 둘이 각자의 주장을 폈다. 먼저 장의가 말했다. "우리가 먼저 위, 초 두 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고 군사를 보내, 한나라의 환원산과 구씨산의 요새가 고립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나라 둔류의 길을 막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본다. 쉽게 아우라의 빛에 취한다. 진품이 내는 게 아우라지만, 사람들은 진품의 진위를 가리지 못한다. 그저 아우라만 볼뿐이다. 그게 사람이다. 사실 보이지 않고, 보여주지도 않고, 보라는 게 어불성설일 수 있다. 다만 현명한 사람, 현인은 그렇지 않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최소한 그러려고 노력한다. 보여주지 않는 것은 더욱 더 노력해서 본다. 감추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전국시대 다음과 같은 고사가 있다. 초나라 재상 소해휼(昭奚恤)에 대한 이야기다. 어찌나 능력이 뛰어난지 다른 나라의 모두가 이 소해휼을 두려워했다. 초나라 왕이 갑자기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이 때 한 사람이 나서 동화를 들려준다. 그 유명한 호가호위(狐假虎威)의 고사다. “옛날 백수의 왕인 호랑이가 숲에서 여우를 만났습니다. 그 여우가 호랑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내가 백수의 왕이야. 하느님이 그리 정했지. 힘만 세고 무식한 네가 알 일이 없지.’ 말을 들은 호랑이가 어이가 없어 말했습니다. ‘거짓말이면 잡아먹겠다.’ 여우 역시 두려워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그럼 내가 앞장서 걸어갈 터이니, 네가 따라오면서 잘 봐둬. 다른 동물들이 나
본래 교훈은 실패에 있다. 성공은 항상 특수한 상황에서 특수한 조건이 맞춰져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남이 성공했다고 해서 내가 한다고 성공하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실패는 다르다. 남의 실패는 항상 나의 실패가 된다. 남의 실패를 피하면 성공 확률이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다. 실패의 요인이 되풀이 되면 반드시 실패하게 된다. 한자로 그 것을 흔히 필망(必亡)이라고 한다. 현대 한자로 사정(死定)이라고 한다. 앞의 한자는 반드시 죽고, 뒤에 한자는 죽도록 결정돼 있다는 말이다. 필망은 시간이 지나도 필망이다. 100년 전의 실패 요인은 대부분의 경우 요즘도 실패의 요인이다. 그것이 인문적 요인인 경우 특히 더 그렇다. 기술적 발전이나 시대의 변화 속에 달라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전국시대 진나라의 책사 장의(張儀)은 이런 점에서 중국 역대 최고의 책사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많은 책을 남기지 않았지만, 독특한 지혜와 행실로 유명하다. 장의와 친구 소진을 가르친 스승 귀곡선생은 두 책사 덕에 역사 속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고도 지금까지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는 장의의 행적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 왕조 탓이다. 책사는 자국의 이익을
진실은 신뢰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만고의 진리지만 많은 이들은 진실이 신뢰를 담보한다고 착각을 한다. 내가 진실을 이야기하면 믿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현실에서 많은 경우 그 믿음은 착각이다. 거짓이 더 신뢰를 얻는 경우가 많다. 가장 단순한 거짓으로 누군가의 진실을 거짓이라 여겨지게 하는 건 중국 고래로 가장 흔히 쓰이는 계략이다. 전국지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서주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창타라는 인물이 망명을 시도했다. 서주와 앙숙인 동주로 가고 있었다. 서주의 주요한 정보가 노출될 판이었다. 창타가 망명길에 올랐다는 소식에 동주 황제는 크게 기뻐했고, 서주 황제는 크게 노했다. 급해진 서주 황제가 대신들을 소집했다. “아니 창타라는 놈이 우리 주요 정보를 동주에 넘겨줄 모양이요. 어쩌면 좋겠소?” 대신들이 머리를 맞대고 숙의를 했다. 풍저라는 책사가 서주 황제에게 말했다. "제가 능히 그자를 죽여 버릴 수 있습니다." 서주 황제가 기뻐서 말했다. “오 그럼 내가 크게 포상을 하겠오. 어서 계책을 시행하도록 하오.” 풍저가 말했다. “그럼 제게 먼저 금 30근과 친필 편지를 하나 써주시면 됩니다.” 서주 황제가 기꺼이 금 30근과 친필의
중국의 지혜는 대화법에 있다. 직설적이지 않으면서 상대방 입장에서 설명해 상대방이 수긍하도록 하는 게 특징이다. 전국시대 유세가들의 대화법이기도 하다. 전국책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있다. 유세객의 전형적인 설득 방식을 보여주면서, 실제 멈출 때는 아는 게 얼마나 현명한 것인지도 보여준다. 전국시대 유명한 책사인 소려(蘇厲)가 주나라 황제에게 알려준 계책이다. 당시 상황은 진나라 명장 백기(白起)가 한과 위 두 나라를 패퇴시키고 양나라를 공격하던 때였다. 양나라는 주나라와 순망치한의 관계였다. 소려는 먼저 주 황제에게 백기의 양나라 공격의 위험성에 대해 설명을 한다. "한, 위 두 나라를 패배시키고 위나라 장수 서무를 죽인 명장이 바로 백기 장군입니다. 그는 용병술이 뛰어난데다가 천운마저 타고 났습니다. 그런 백기가 지금 양나라를 공격한다는데 이 양나라도 틀림없이 함락당할 것입니다. 양나라가 깨어지면 주나라가 위험해집니다." 자신의 나라가 위험해진다고 하니 황제도 솔깃해질 수밖에 없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소?" 소려가 답했다. "당연히 백기의 공격을 막아야 합니다. 백기에게 한 가지 고사를 이야기 해주면 됩니다." 그리고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명나라를 치려하니 길을 빌려달라" 1592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선조에게 '정명가도(征明假道)'의 글귀가 담긴 편지를 보낸다. 선조는 이 편지를 선전포고로 봤다. 하지만 조선은 "뭐 이런 게 다 있어"하며 무시했다. 앞서 수많은 경고, 특히 이율곡의 10만 양병설도 불필요한 것으로 일축했던 조선의 사대부들이었다. 본래 무능은 무지에서 나오는 법이다. 결국 조선은 일본의 침략에 무너졌다. 왕은 북쪽 변방 의주까지 도망가야 했다. "A를 하려고 하니 B를 달라" 일본 요구의 구조다. 사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갑질 요구다. 황당하지만 거절하기 힘들다. 갑질을 하는 이들은 자신이 갑인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시를 하면 임진왜란처럼 그 대가가 크다. 이 때 필요한 게 계략이다. 계략은 궁극의 도다. 중국 전국시대, 강대국이 이웃 약소국을 괴롭히는 일이 적지 않았다. 일본이 조선에 했던 '가도(假道)의 요구'도 흔하게 있었다. 한번은 진나라가 한나라를 치겠다고 주나라(동주)에게 길을 빌려줄 것을 요구했다. 주나라는 길을 빌려주면 한나라에게 미움을 살 것이요. 거절하면 진나라에게 미움을 받을까 두려웠다. 대책회의를 했다. 이 때 한 대신이 말
전국시대(BC 770 ~ BC 476) 진나라가 주나라에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구정(九鼎)을 내놓으시오." 이때의 주나라는 흔히 동주다. 앞서 BC 1046년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한 주왕실과 구분하기 위한 이름이다. 그랬다. 주나라는 불과 400년 전만해도 천자, 하늘의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천하를 통일한 주 왕실은 이후 봉건제도를 실시해 천하 각지를 제후들에게 나눠 다스리도록 했다. 천하의 제후들은 자신의 영토를 열심히 다스려 막대한 부를 이루고, 병사를 키웠다. 하지만 정작 왕실의 힘이 쇠락했다. BC 771년 견융에 쫓겨 당시 수도였던 호경(鎬京, 현재의 산시성 시안 부근)을 잃고 낙읍(洛邑, 현재의 뤄양)을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바로 동주의 시작이었다. 전국시대는 춘추시대에 이어진다. 춘추는 동주의 시작부터 중원의 패주였던 진나라가 3명의 실권자인 한씨, 조씨, 위씨 등에 의해 나눠진 BC 403년부터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BC 221년까지다. 구정은 중국 하나라의 우왕이 전국 9개 주에서 쇠붙이를 거둬 만들었다는 솥이다. 훗날 주나라까지 전해져 천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이 됐다. 진나라가 동주에 가서 그런 구정을 달라고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