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7월 31일 베이징 날씨는 섭씨 25℃, 기온은 따뜻했지만 구름이 많았다고 기록돼 있다. 하늘의 구름도 구름이지만, 중난하이에는 문화대혁명의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 있었다. 1966년 8월 1일 마오쩌둥(毛泽东)은 중국 공산당 8기 중앙정치국 11차 전체회의(이하 11중전회)를 연다. 이 자리에서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의 창(戈)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문화대혁명은 이른바 무산계급의 독재를 위해 반대파를 제거하는 정치적 운동이라는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마오쩌둥이 발동을 건 문화대혁명의 이름으로 공격이 시작되면서 저우언라이(周恩来)도 점차 문화대혁명 시대 방패(干)의 역할을 본격화하기 시작한다. 문화대혁명의 창과 방패, 바로 중국 공산당 당사가 규정한 문화대혁명 사인방과 저우언라이의 관계다. 1966년 8월 1일로 베이징에서 열린 11중전회는 처음부터 잔뜩 긴장된 모습이었다. 초반부터 마오쩌둥은 비판의 소리를 높였다. "지금 당 중앙이 대학 혁명 현장에 공작조를 파견해 어느 것 하나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공작조 90% 이상이 나쁜 짓만 한다. 군중을 억제하고 제어하려고만 한다." 이어 마오쩌둥은 회의 첫날 바로 칭화(清华)
중국 후한시대 환관 채륜(蔡倫)이 개발한 가볍고 저렴한 종이(紙)는 중국 역사에서 문무(文武)의 발전에 모두 기여하게 된다. 종이와 학문의 뗄 수 없는 관계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상황이고, 무(武)의 측면에서 보자면 종이 갑옷이 대표적인 파생 상품으로 꼽힌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국 고대 병사들은 대부분 종이로 만든 갑옷을 입었다. 여러 겹의 종이에 무명이나 비단 등 천을 덧대 아교, 송진 등 접착제로 고착시킨 갑옷이었다. 종이 갑옷은 장점이 많았다. 철갑(鐵甲)에 비해 제작 비용이 훨씬 적었다. 철갑에 비해 무게가 적게 나가 전장에서 재빠르게 이동해야 하는 병사들에게 유용했다. 특히 물에 빠지는 경우에도 가라앉지 않아 수군에게 적합했다. 한 마디로 저비용 고효율 갑옷이었던 셈이다. 옛 중국 기록에도 그 나름 효과가 컸다고 나온다. 송나라 인종 때 발간된 국방백서인 ’무경총요(武经总要)‘에 따르면 당시 갑옷은 철, 가죽, 종이 등 세 가지 재료로 제작됐는데 일반 병사들이 착용한 종이 갑옷이 실제 전투에서 믿음직스러운 기능을 발휘했다고 기록돼 있다. 종이 갑옷에 대한 언급은 ’무경총요‘에 앞서 당나라 때도 엿보인다. 당 의종 때 한 절도사가 "종이로 갑옷을
1966년 5월 마오쩌둥의 '통지'는 문화대혁명 시동의 첫 명령이었다. 그 명을 받는 행동이 바로 베이징대학에서 나온다. 베이징대학에 첫 대자보가 붙었다. 베이징대 당 위원회를 겨냥한 것이었다. 이에 호응하듯 마오쩌둥(毛澤東)의 전국 홍위병 총궐기 명령 "사령부를 폭파하라, 나의 대자보 한 장"도 나온다. 이로써 중국 전역이 붉은 깃발로 물들게 된다. 1966년 5월 4일부터 26일까지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무산계급의 혁명은 계속되야 한다"고 지적한다. "남아 있는 우파 수정주의를 제거하고 또 제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파 수정주의를 죽순의 껍질처럼 벗기고 또 벗겨야 무산계급의 순수함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마오쩌둥의 이 말은 바로 문서로 정리돼 전국에 시달됐다. 그해 5월 16일의 일이다. 문화대혁명의 전면적 개시를 선언한 이 통지가 이른바 '5·16 통지'로 불리는 이유다. 통지가 전파되고 응답은 의외의 곳에서, 예상보다 빠르게 나왔다. 5월 25일 베이징대학에 대자보가 붙었다. 통지가 하달된 지 불과 열흘이 지나서였다. 베이징 중앙정치국 회의가 미처 끝나지도 않은 날이었다. 대자보 제목은 '루핑(陆平), 쏭숴(宋硕) , 펑페이
중국국가는 짧다. 1절이 전부다. 내용도 명료하다. 起来! 不愿做奴隶的人们! 把我们的血肉,筑成我们新的长城! 中华民族到了最危险的时候, 每个人被迫着发出最后的吼声。 起来! 起来! 起来! 我们万众一心,冒着敌人的炮火前进! 冒着敌人的炮火前进! 前进! 前进! 前进!进! 일어나라 ! (깨어나라!) 노예가 되고 싶지 않은 이들이여 ! 우리의 피와 살로 새로운 만리장성을 만들자 ! 중화민족이 가장 위태로운 이 때에 억압받는 모든 이들의 최후의 함성이 터져나오리!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적의 포화에 맞서 전진하자! 적의 포화에 맞서 전진하자! 전진 ! 전진 ! 전진 ! 나아가자 ! 중국 국가의 별칭은 '의용군진행곡(义勇军进行曲)'이다. 1935년에 상하이에서 개봉된 영화 '풍운아녀(风云儿女)'의 주제곡, 즉 OST이다. 가사는 한 눈에 봐도 전투적이고 비장하다. 곡은 힘차고 울림이 장엄하다. 이런 내용과 느낌의 주제곡이 삽입된 영화라면 스토리가 어떠할지 감이 잡힌다. 영화가 개봉됐던 당시 시대 상황을 살펴보면 영화와 주제곡의 메시지가 더 명료해진다. 당시 상하이는 이미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의 행정권과 치외법권이 보장된 조계지가 광
1966년 4월 16일 중국 공산당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를 항저우(杭州)에서 개최한다. 이 자리에서 마오쩌둥(毛泽东)은 “우한(吴晗)의 문제는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심각하다"라는 발언을 통해 문화대혁명의 불씨에 기름을 붓는다. 이 회의를 통해 문화대혁명은 중앙 무대에서 공식화됐고, 중국 전역으로 활활 타 들어갔다. 들불처럼 문화대혁명이 번졌지만, 아직 그 마화(魔火)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저우언라이(周恩来) 등 중난하이(中南海)의 지도자들을 알지 못했다. 1966년 4월 9일부터 12일까지 3차례 연이은 서기처 회의를 통해 이미 마오쩌둥의 '해서파관(海瑞罷官)' 비판에 대한 의도가 명확해졌다. 우한의 비판에 대한 비판이 문제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우한의 비판은 진정한 적을 불러내기 위한 유인책이었던 것이다. 이어 마오쩌둥은 1966년 4월 16일 항저우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를 연다. 이제 메신저 보이, 캉성(康生)이 아닌 마오가 직접 나선 것이다. 중국의 주인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의 선봉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 회의에는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류샤오치(刘少奇), 덩샤오핑(邓小平), 예젠잉(叶剑英) 등이 참석했다. "나는 단
청나라 말기 동양의 지식인들에게 서구 문명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2500년 동안 공자와 맹자만을 최고로 알았던 지식인들에게 서구의 발달한 과학기술, 기계산업, 의학, 군사무기 등은 마치 새로운 하늘이 열린 것 같았다. 서구는 모든 방면에서 동양의 중심이던 청나라를 압도했다. 서구 문물은 빠르게 중국에 전파됐고 청 황실은 이런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는 전초기지가 됐다. 당대 최고 권력자였던 서태후(西太后, 1836~1908)를 비롯해 황제와 대신들은 서구 문물의 '얼리 어답터' 역할을 했다. 당장 서태후만 해도 중국에서 가장 먼저 자동차를 소유했던 여성이다. 또 중국 최초의 여성 사진작가이기도 했다. 청 황실의 마지막을 기록한 사진들은 대부분 서태후를 찍었거나, 그녀와 관계가 있다. 당시만 해도 사진은 영혼을 가두는 일로 여겨져 많은 중국인들이 겁을 냈다. 하지만 서태후는 직접 사진 기술을 배워 주변 궁녀들은 물론 대신들의 사진을 찍어 남겼다. 이 시기 중국에 X-레이도 들어온다. 그럼 중국인 가운데 누가 처음으로 이 X-레이를 찍었을까? 사람의 겉모습을 찍는 사진기에도 두려움이 컸는데, 몸 속을 찍는 X-레이에 누가 최초로 몸을 맡겼을까? 주인공은 바로 청
야오원위안(姚文元)의 '해서파관(海瑞罷官)' 비판은 시간이 갈수록 정치화했다. 하지만 저우언라이(周恩来 ) 등 중난하이 지도자들은 여전히 그 정치화는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피하려 노력했다. 물이 차오르면 물속에 있는 모든 것은 절로 젖는다. 피신처는 물밖에 있다. 물길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물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왕왕 사람들은 차오르는 물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러려 노력한다.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는 점점 가팔라졌다. 저우언라이 등 중난하이(中南海)의 지도자들은 그것을 인식은 했지만, 그 위험 정도에 대한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1966년 2월 6일 열린 '문화혁명오인소조'의 보고는 그런 인식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당일 저우언라이는 베이징에서 일상 업무를 보던 덩샤오핑(邓小平), 류샤오치(刘少奇) 등과 함께 문화혁명오인소조의 문화 학계의 토론 현상에 대해 보고를 받는다. 문화혁명오인소조의 조장은 베이징 시장 펑전(彭真)이었다. 펑전은 보고에서 "작금의 토론(해서파관에 대한 비판과 이 비판에 대한 비판)은 순수한 학술적 토론이고 정치적 토론이 아니다. 해서파관의 작가 우한(吴晗)은 펑더화이(彭德怀)와 어떠한 관계도 없다"
1965년 11월 문화대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지만,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의 지도자들은 아직 인식하지 못했다. 본래 뒤에서 쏜 화살은 피하기 어려운 법이다. 11월 10일 상하이 원후이바오(文汇报)에 야오원위안(姚文元)이 쓴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가 실렸다. 당장 여론은 들끓었다. 모두가 야오원위안의 트집이 지나치다는 것이었다. 본래 명나라 대신 '해서(海瑞)'의 청렴결백은 마오쩌둥(毛泽东)도 인정한 것이었다. '그런 걸 어디 감히 야오원위안 정도가 비판을 하다니?'라는 게 대체적인 분위기였다. 그러나 모두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야오원위안 뒤에는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江青)이 숨어 있었고, 장칭의 뒤에는 바로 마오쩌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마오쩌둥은 당시 중국에서 인민 전체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대부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의 지지가 있자 당 기관지인 인민일보는 어쩔 수 없이 야오원위안의 글을 전재한다. 정치적 파문을 최소화하기 위해 글은 '학술난'에 실렸으며 편집자주(註)가 달렸다. 이 편집자주는 당연히 저우언라이(周恩来)와 펑전(彭真) 베이징 시장의 심의를 거친 것이었다. 당은 언제나 학계의 백가쟁명을 지지해왔다. 우리는
마오쩌둥(毛澤東) 이래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의 공식 복장은 인민복(人民服)이었다.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즐겨 입으면서 새롭게 주목을 받았지만 사실 개혁개방과 함께 인민복은 한동안 사라졌었다. 그렇다면 과연 중국 공산당 지도자 중 누가 처음으로 인민복을 벗고 서구식 양복을 입었을까? 중국에서 무슨 일이든 용감하게 처음 시도한 사람을 '게 요리를 처음 먹을 사람'이라고 한다. 과연 이 분야에서 게요리를 처음 먹은 인물은 누굴까?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서 처음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인물은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이다. 그는 1980년대 덩샤오핑(鄧小平)과 함께 개혁개방을 주도하며 개혁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공산당 최고 지도부의 일원이자 당 총서기인 후야오방이 넥타이를 매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당대 중국 지도자들이 양복을 따라 입게 됐다. 그런데 당시는 넥타이라는 게 대단히 낯설었던 시절이다.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중국의 소설 '평범한 세계'에는 이 때의 혼란상이 잘 나타난다. 갑자기 대도시, 농촌지역 할 것 없이 당 간부들이 줄줄이 양복을 입기 시작한다. 일부는 넥타이 매는 법을 몰라 매듭을 만들어 항상 걸어 놓기도 했다. 갑자기 양복이 가장
축구장 72개(72만㎡)가 들어갈 정도의 크기로 중국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이 올해로 603살이 됐다. 베이징 한복판에 자리한 자금성은 명나라 영락제 집권기에 20만 명이 넘는 인력으로 15년에 걸쳐 공사를 진행해 1420년에 완성됐다. 명청 왕조 시기 9999개 방이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현재 많은 건물이 소실됐지만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중국인들에겐 생전에 가장 가보고 싶은 곳으로 꼽힌다. 매년 춘제(春節, 설) 연휴가 되면 방문객 신기록을 갱신하는 자금성이 처음 대중에게 개방된 날은 언제였을까? 지난 1925년 10월 10일로 황제의 거처에서 국민들을 위한 고궁박물관으로 변신을 한다. 중화민국 정부가 자금성을 고궁박물원으로 개칭하고 황실의 진귀한 보물 및 다양한 궁중 유물들을 보관,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자금성이 처음 시민에게 개방된 날은 황제의 거처를 보러 몰려든 사람으로 말 그대로 장사진을 이뤘다는 기록이 지금도 남아 있다. 기록에 따르면 첫 개방은 오후 2시쯤 이뤄졌다. 사람들은 당일 오전 8시부터 이미 줄을 서기 시작해 신무문 앞까지 이어졌다. 베이징에 자동차가 드물었던 시절이지만, 차를 몰고